빈틈에 놓여 있는 사람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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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기행 - 혜묵
1992년 09월 127호
나한전의 조상雕像들은 다채롭다. 모습이며, 표정이며, 소도구들에는 불교나 예술 들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조차 감탄케 하는 절묘함이 있다. 나는 나한전에 처음 발을 들여놓을 때부터 그곳에 대해 독특한 선입견을 갖게 되었다. 나는 그곳에서 보통 사찰의 다른 곳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장난끼 어린 분위기를 느낀다. 절을 들어서면서 만나는, 튀어나올 것 같은 눈동자의 천왕, 온통 심상찮은 절집 분위기. 큰법당에 부처님이 아무리 자비롭게 미소짓더라도 절집은 확실히 심각한 곳이다. 떠들거나 장난치거나 함부로 달음박질을 해서도 안 되는 그런 분위기가 가득한 사찰 한구석에 나한전이 있고, 그 문만 들어서면 그런 심각한 분위기를 조롱이라도 하듯 익살을 떨고 있는 나한님들을 보게 된다. 물론 그곳에도 심각한 얼굴들은 있다. 용맹으로 떨쳐 앉아 선정에 든 모습이나 험악한 표정으로 경계하는 듯한 표정도 있다. 심각한 모습과 장난스런 표정, 나한전을 생각하면 나는 습관처럼 이런 서로 다른 표정들을 떠올린다. 사람들은 서로 뚜렷하게 구별되는 오백 가지 모습에 놀란다. 그러곤 그 다채로움의 뜻을 의미심장하게 따지기도 한다. 그래도 내게 나한전은 장난과 익살의 상징이다. 나한전을 보고 있으면 어린 아이 표정으로 구부정한 늙은이들이 주변의 심각한 수행자와 경계의 함성들을 압도하고 있는 느낌이 먼저 와닿기 마련이다. 만다라라는 소설이 있다. 승려 두 사람이 세간 언저리를 왔다 갔다하다가 끝내 한 사람은 얼어 죽고, 또 한 사람은 어머니를 핑계로 환속한다. 큰 인기를 끌 만큼 워낙 널리 알려져 있는 내용이어서 새삼 끄집어 내기도 민망하다. 아무튼 나는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왜 그렇게 재미있어 하는지 잘 이해할 수 없다. 그 책이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은 술과 고기를 먹고 여자와 함께 자는 따위의 내용을 놓고 논란을 벌이고 법석을 떨었다. 그리고, 그 무렵 길거리에 나서면 사람들이 무슨 상이라도 주듯이 종종 “스님도 사람인데” 어쩌고 하며 서슴없이 술이나 고기를 권하던 일이 기억난다. 그때나 지금이나 건강한 젊은이들이 술 먹고 연애하고, 때에 따라서 남녀가 함께 자기도 하는 일은 그야말로 일상의 다반사가 아닌가 싶다. 그런 것이 정상적인 사람들이 하는 일반적인 삶의 모습이 되어 버려서, 술집 많고 여관 많은 한국 땅에서 윤리적으로나 상식적으로도 크게 놀랄 일도 아니라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절에서는 많은 스님들이 ‘세속의 여러 욕망을 버리고 사람 같지 않게’ 살기도 한다. 그것도 그냥 날마다 하는 일이어서 이상할 것도 없고 재미있어 할 것도 없다. 그것이 세간과 출세간의 정상적인 모습이다. 이와는 달리 스스로 지키고자 했던 계율을 버리고 종횡무진 사는 승려도 있다. 그러나 일상의 욕망에서 벗어나는 출가자들의 삶이 특이하다면 심각하고 절제하는 생활에서 벗어나는 수행자들의 모습은 더욱 특이하다. 불교사, 특히 선종의 역사를 뒤적이다 보면 그런 괴각들의 모습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오랜 역사를 갖고 있고, 또 그들의 비중도 만만치 않은 것으로 보아서 어쩌면 그런 모습들을 선가의 수행 풍토를 구성하는 하나의 전통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런 풍토의 최고참 선배급에 해당하는 분들이 바로 익살스런 모습을 간직한 나한님들이 아닌가도 싶다. 그들 표정에 얽힌 옛날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파격과 무애자재를 종지로 삼는 승려들의 귀감이 될 수 있다. 산속에 묻혀 그냥 산이 되어 버린 것 같은 절의 적막함, 그것을 단박에 깨뜨려 버리는 듯한 파안대소, 무상정각과 대자대비와 팔만교해와 역대 조사들의 용맹심을 뒷전에서 조롱이라도 하는 듯한 괴상한 장난기.
만다라의 스님들은 모두가 심각하다. 출가하거나 환속해도, 술을 먹거나 여자와 자도, 길을 걷거나 한마디 말을 꺼내도, 그 한 마디며 한 동작이 모두 수행과 도와 깨달음에 관련되지 않은 곳이 없어 보인다.
행주좌와가 저렇듯 철저하게 심각하고 시작과 끝이 저렇게 정연하다면, 오히려 심각하게 고민할 것도 없는 진짜 수행자의 전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들은 세간과 출세간의 고전적인 양분법을 타고 앉아 양쪽으로 걸리적거리는 윤리와 규율, 이념과 현실을 오고 간다. 그러고는 대답도 없이 얼어 죽고 환속한다. 깨달음과 그 길에 대한 그들의 집념은 대단하다. 그들은 정말로 승려라는 신분과 불교인들의 자세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갖고 있다. 다만 그럴 수 없는 자신과, 통하지 않는 현실을 한탄한다. 술 먹고 길에서 얼어 죽는 사람이 합장은 왜 하는가. 그들은 분명 장난스런 나한들의 후배는 아닌 것 같다. 심각한 불교에 불만을 가진 것도 같지만 그들은 역시 심각하다. 당당하게 술은 마시지만 속은 쓰리고 죄의식으로 가득하다. 기존의 질서를 조롱하고 과감하게 욕망을 따라 보지만 허탈하기만 하다. 따라서 그것도 해결책은 아니다.
그렇더라도 확실히 요즈음에는 사람들도 술 먹는 중을 보고도 옛날처럼 놀라거나 재미있어 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만다라류의 소설이나 영화는 승려 불음주라는 따위의 사회적인 통념을 깨뜨리는 역할 정도는 해 준 것 같다. 그래서 “스님도 사람인데” 라는 말은 일견 승려들의 ‘인간 선언,인간 승리’ 라는 인상도 준다.
얼마 전 미국의 어떤 철학자가 쓴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과거의 철학에 대한 비판과 투정을 내용으로 하는 책이었다. 그 사람은 과거 철학을 ‘심각하고 진지한 것’으로 규정짓고 자신들을 기꺼이 ‘장난스럽고 경망스러운’ 철학자로 자부했다.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철학자는 그런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요즘 책방은 그런 사람들의 책으로 가득 차 있다. 내용이야 접어 두고, 그런 사람들의 재기 발랄하고 한편으론 방정맞기도 한 문체를 대하다 보면, 재미있고 일리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과거에 우리들이 철학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철학자들의 고뇌에 찬 표정돠 식음조차 잊는 심각함을 흉내냈듯이, 앞으로는 억지로라도 오도방정, 좌충우돌을 따라 배워야할 생각을 하니 살웃음만 나올 뿐이다. 그들은 분명히 과거의 심각한 철학이나 진지한 철학자를 싫어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꼭 그렇게 경망스럽고 가볍게 굴어야만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절은 심각한 곳이다. 그런 심각함이 절 바깥 사람들에게도 절에 대한 통념과 선입견으로 굳어 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통념이 깨어지는 것, 다시 말하면 심각해 보이지 않는 것에 호기심을 느낀다. (그런 호기심은 하나의 쾌감까지 동반한다) 돈을 내고 머리가 둘 달린 뱀, 또는 머리나 다리 개수가 많은 소 따위의 변종들을 구경하러 가는 것처럼 정상적인 통념을 깨는 변종과 변태적인 불교 모습에 열광한다. 술먹고 오입하는 중은 사람들의 통념을 깨뜨려 주고 호기심을 충족해 주며 쾌감까지 제공하기도 한다.
황진이가 지족선사를 파계시킨 이야기는 그런 파적거리의 전형이다. 사람들은 고명하고 도도한, 그래서 멀리 있어 보이는 선사의 위선을 이야기한다. 그 위선의 일그러진 억지 속에 숨어 있는 인간의 참모습과 그 본능과 욕망을 토로한다. 그리고 그것을 까발려 내는 황진이의 통쾌함을 찬미한다. 변태적으로 살아가던 중 한 사람과 또 황진이를 만나 변태적인 중이 되어버리는 한 사람이 그들 이야기 속에 남아 있다. 겹으로 변태가 되어 버린 지족선사는 누구인가. 웃음과 몸을 팔던 미모의 한 여인이 몇 십 년을 하루같이 산속에서 수행, 정진해 온 스님과 하룻밤을 함께 잤다는 사실은 재미있을 수도 있다. 숱한 사내들을 경험하고 조롱해 본 기생 황진이가 고결하고 진지한 고행자의 의지를 꺾고, 견고한 위선 속에서도 꿈틀거리고 있는 보편적인 성욕을 재확인했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남는 것은 무엇인가. 한 사람의 새로운 변태적인 중과 함께 세간은 정상으로 돌아가고, 변태적인 불교를 바라보며 세간도 다시 정상으로 되돌아간다. 또 다른 지족선사들은 또 다시 화두를 안고 절로 산으로 떠돌고, 또 다른 황진이는 저자 바닥에서 몸과 웃음을 판다. 나한전에 늘어서 있는 오백 가지 형상들이 모두 다르듯 만다라의 중들도 자기 나름의 어느 한 나한의 얼굴을 닮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가 진지하게 추구하고 신앙하는 대상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그곳에는 혼돈과 방황이 있다. ‘삶을 심각하게 추구하던’ 이상한 사람들의 혼돈은 국외자들과 방관자들에게 겹으로 비뚤어진 인상을 심어주기 마련이다. 괴이한 형상으로 파안 대소하고 있는 나한상을 변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그에 대한 이야기들이 아무리 괴이하다 하더라도 그들은 진지하고 심각한 절 집석에서 날마다 당당하게 웃고 앉아 있을 수 있다. 세간에도 출세간에도 그들의 삶은 의미가 있고 또 제 몫이 있다. 그러나 술 먹고 오입하는 만다라의 중들이 서야 할 자리는 어디인가. 중들의 욕망을 해방시켜 준 인간 회복의 기수인가. 알 수도 없고, 알아도 이야기할 수 없고, 이야기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상황에서 불교는 어쩔 수 없이 변태가 된다. 변태로 낙인 찍힌 불교 안에서 중들의 행동거지는 다시 이중의 변태가 된다. 그런 상황이 싫어서 몸부림칠수록 심각하며, 심각하고 진지할수록 괴상한 변태가 된다. 진지함이, 심각함이 싫어서 점점 천박해지고 경박해져 가는 세상에서 나한전에 어린 장난끼는 점점 더 요령 부득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