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데없는 망상 피우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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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원소
1999년 06월 208호
사미계를 받기 일 주일 전쯤 백련암 큰방에 군불을 지피면서 나는 하산하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하근기인 나로서는 안 될 일이었다. 성철스님의 한치 어긋남 없는 엄격한 생활을 보아도 자신이 없었고, 시간만 나면 하루 종일 염불을 하시던 큰절의 자운 노스님을 뵈어도, 큰스님들처럼 평생 구도자로서의 치열한 삶을 살수 있을까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산문에 처음 발을 들여 놓으면서 공부를 잘하면 도인의 삶을 살수 있으리라던 그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도전에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나의 그런 생각을 이는지 장작은 활활 번뇌의 불길로 타고 있었다.
산에서 내려가면 재가신도로서 열심히 불법을 공부하며 살면 되지 않을까 스스로 위로를 하면서, 지난 행자 시절을 돌아보았다.
해인사 큰절 행자실에서 행자 반장을 하고 있다가 백련암 스님 한 분이 군대에 가게 되어 차출되어 온 첫날, 성철스님께선 그 형형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시더니 “젊은 놈이 벌써 대머리가 까졌노? 공부 열심히 하거라” 하시며 껄껄 웃으셨다.
그 다음날부터 참 혼도 많이 났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히 남는 것은 큰스님 방에 군불을 처음 지피던 날이었다. 큰스님 방의 온도를 겨울에는 섭씨 이십 도로 맞추어야 하는데, 그 날은 날도 춥고 해서 장작을 두 개 정도 더 넣었다.
다음날 아침에 “야. 이눔 자슥아, 날 뽀까(볶아) 지길래(죽일래)” 하고 호통을 치셨다. 그 다음날 주눅이 들어서 장작을 적게 넣었더니 냉방이 되어 버렸다. “이눔 자슥아, 날 얼카 지길래”하며 또 다시 호통을 치셨다. 그렇게 몇 번 혼쭐이 나고 나서는 장작불로 방 온도를 맞추는 데는 도사가 되어 버렸다.
백련암을 거쳐간 행자들은 누구나 겨울이면 곤욕을 치른다. 일주문 앞에서부터 큰절에서 꺾어지는 초입까지 가파른 산길을 눈이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운력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침을 먹고 눈을 쓸면서 내려가면 돌아와 사시 불공 참석하기가 빠듯할 정도였다. 예불을 두 번 빠졌다가 암자에서 쫓겨날뻔한 일이나, 감자를 두껍게 깎다가 신도들이 갖다 주는 시주물을 아끼지 않는다고 혼난 일들이며, 암자에서 아침마다 참선을 하고, 백팔 참회를 하며 오후엔 지게를 지고 뒷산에 나무하러 가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리에 스쳐갔다. 사미계 수지를 눈앞에 두고 하산을 생각하고 있던 것은 평생 독신으로 승려 생활을 할 수 있는 수승한 근기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회의 때문이었다. 그러한 번뇌의 소용돌이 속 혼란에 빠져 있던 나를 큰스님께서 모르셨을 리 없을 것이다.
내 번뇌를 대변이라도 하듯 활활 타고 있는 아궁이 불 앞에서 내일이면 하산하리라고 다짐하고 있을 때, 큰스님께서 부엌 옆을 지나시다가, 안을 들여다보며 거두절미하고 한마디 하셨다.
“키다리, 니 , 쓸데없는 망상 피우지 마라. 세상의 영화는 뜬 구름 같은 것이고 우리 인생은 너무나 짧다. 불도나 열심히 닦아라.”
큰스님의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그 말씀 한마디가 자신 없음으로 휘청거리고 있던 나의 마음을 강한 힘으로 일으켜 세웠고, 출가 사문의 길을 걷게 했다.
사미계를 받으면 보통 강원에 가기 마련이었으나, 그 무렵 백련암에서는 강원에 보내지 않는 것을 방침으로 하고 있었다. 백련암에선 큰스님의 방침에 따라 행자 때 일본어를 독학하게 하고 사미계를 받고 난 뒤 한두 해쯤 일본어로 된 대·소승 경전과 조사어록을 스무권쯤 본 뒤 선원에 가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백련암에서 강원에 가고 싶은 행자가 있으면 은사 스님을 다른 분으로 바꿔야 하는 것을 불문율로 하고 있었다. 그러한 방침이었음에도 나는 해인사 큰절에서 행자 생활을 할 때, 새벽이면 온 도량을 쩌렁쩌렁 울리던 강원 스님들의 그 우렁찬 독경 소리를 잊을 수 없어, 그 곳으로 가고 싶어했다. 나의 이런 마음을 전해 들은 원택스님이 신행자가 수계를 하면 강원에 가고 싶어한다는 것을 큰스님께 조심스레 말씀 드렸더니 아무 말씀이 없으시더라고 했다. 큰스님의 묵언은 날벼락만 떨어지지 않으면 적어도 반대는 아니라는 표시였다.
그래서 나는 백련암 스님 중에서 처음으로 강원에 가게 되었다. 계율에 어긋남이 있으면 가차 없이 추방을 시킬 만큼 규율이 엄격했던 해인사 강원에서 경전을 익히고 승려로서의 기본 자질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은사 스님의 은덕 때문이었다.
강원을 마치고 승가대학과 선방, 동국대학원을 거친 지난날들을 돌이켜보면 어느 것 하나도 버릴 게 없는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행자시절은 엄격한 스승 밑에서 수없이 들었던 꾸지람과 그 이면에 있던 무언의 가르침이 사문으로서 살아는 데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던 시절이었고, 강원에서의 생활은 경전을 보면서 신심을 고취시키고 중물을 들어는 데 가장 좋은 시간들로 기억된다.
평생지기가 되어 함께 한길을 가게 되는 좋은 도반들을 만날 수 있었던 곳도 강원이었다. 또 하루 스물네 시간이 온전히 내 것이었던 선방은 어떠했는가. 치열한 자신과의 싸움 끝에 소리없이 밀려 왔던 마음의 평화와 자유로움을 경험했던 나날이었다.
‘사문이 되길 잘했구나’ 하는 자부심에 넘쳤던 선방도 승려라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으로 생각한다. 승가대학은 불교교리를 체계화 시키고 불법을 사회에 전파시키는 능력을 배양하는 데 아주 도움이 되는 곳이었다.
그래도 승려 생활 가운데 중요한 시절이라면 당연히 첫발을 디뎠던 행자시절인 것 같다. 스물아홉 늦깎이로 출발하여 산문에 들어온 지 스무 해가 훨씬 넘었다. 승랍이 15년이 될 때까지는 마음대로 공부도 할 수 있었고 자유로웠지만 승랍 15년이 지나니 문중이나 연고 있는 각처에서 가만히 놔두지를 않는다. 본의 아니게 일하는 소임을 자꾸 맡게 되는 것 같다. 주위의 강압과 나의 독하지 못한 성격 탓도 있겠지만 공부와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것 같다. 그래서 요즈음은 이젠 공밥 먹은 밥값을 하는 나이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으며 살고 있다.
출가사문으로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 첫째 밥값이겠지만, 그러지 못할 때는 인재 양성이나 포교,복지 활동, 종무 행정 가운데 어떤 것이든지 자기에게 인연되어진 불사에 최선을 다하며 사는 것이 공밥 먹은 밥값을 조금이라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하루하루 살아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