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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이 강산에 우리의 기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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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이초연 1992년 09월 127호
장마전선이 아직 물러가지 않았다는 기상 예보가 마음에 걸리는 아침이다. 습기를 머금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창문을 열고 하늘을 살펴보았다. 아침 햇살이 채 가시지 않은 하늘 저편에 낮은 구름만 조금 머물러 있고 하늘은 온통 파란빛으로 잔치를 벌이고 있다. 수련대회가 시작되는 날 화창한 아침 햇살이라니.
맑은 햇살을 주신 일광보살께 감사의 기도.
집을 챙기는 손길이 더없이 가볍고 흥겨웠다. 콧노래에 맞추어 대문을 나선다. 잘 갔다 오라는 엄마의 당부를 뒤로 하고. 이번 수련회는 얼마나 많은 초롱한 눈망울의 아이들을 만나게 될까. 불법의 한울타리에 피어나는 젊음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 만다라화와 같은 신심이 피어날까. 잔잔한 기대로 도착한 삼각산 도선사.
전국 각지에서 모인 학생들과 지도 교사들이 수련회에 대한 기대로 설레이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짐도 정리하고 새로운 도량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곳 저곳을 구경하기에 바빴다. 한결같이 환한 얼굴이고 화엄경의 선재동자를 보는 듯한 의젓함으로 넘쳐 있었다. 조용하던 여름 산사가 200여 젊음이 발산하는 싱그러움으로 터질 듯 술렁였다. 법당의 부처님도 18세의 젊음으로 돌아가 환하게 웃고 계셨다.
이번 수련회는 ‘아름다운 이 강산에 우리의 기상을’ 이라는 주제로 청소년들에게 부처님 가르침을 근본으로 한 수련 활동을 통하여 대자연 속에서 호연지기의 기상과 건전한 정서 함양과 공동체 의식을 배양하고, 신체적, 지적, 도덕적인 조화로움을 겸비하도록 한다는 데 목적을 두었다. 세부 프로그램으로는 ‘불교의 가르침을 통한 올바른 청소년상의 구현’과 ‘인성 계발’ ‘명상기공(선무도)’ ‘사경의역사적 배경과 의의’에 대한 강의를 준비했고, 또한 수련회에 참가한 전원이 각자 역할을 나누어 진행하는 공동체 놀이와 극기 훈련을 함께 하는 일정도 마련하였다.
먼저 입제식에 들어가기 전에 참가자들을 각각 조로 나누어 우리 지도 교사는 하나의 조를 맡아서 지도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수련대회에 익숙치 못한 대다수의 학생들은 같은 지역에서 함께 온 학생들과 흩어져야 한다는 것에 약간의 두려움과 서먹서먹함을 느끼는 듯 하였지만, 첫날 밤을 같이 보내고 나서는 오히려 새로운 친구를 사귀게 된 것을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드디어 입제식이 진행되고 7월 24일 부터 27일까지 삼박 사일의 수련회가 시작되었다. 먼저 각 조별로 참가 학생들이 스스로 자기를 소개하는 시간과 조별 구호와 노래를 정하여 수련회 동안 행동 통일과 집단의 단결을 이루어 가도록 했다. 나는 주로 이번 수련회가 사찰 생활을 통해서 청소년들이 어떻게 우리 전통 문화의 여러 가지 장점을 배워갈 것인가에 중점을 두고 지도하고자 했다. 발우공양을 통해서 절제와 검약의 미덕을 배울 수 있게 하고, 사찰의 음식이 모두 채식인 것이 살아있는 생명에 대한 자비의 발로인 점, 참회와 포살 의식은 일반 생활에서 빠지기 쉬운 교만과 개인 이기를 극복하는 계기로 삼아야 하는 점, 찬불가와 염불의 의미를 깨우쳐 충동적인 서구 음악보다 명상적인 우리 음악의 소중함을 알도록 하는 것들을 수련의 중간중간에 깨우치도록 했다.
오후의 일정이 대강 정리되고 곧 이어 저녁 공양 시간이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중요한 것 가운데 한 가지가 먹을 거리인데 사찰에서는 먹을 거리가 공양이라는 말로 쓰이고, 이 공양은 단순히 먹는다는 의미보다는 깨달음을 향하는 구도의 길에서 몸을 지탱하는 약으로 생각하고 먹는다는 입승스님의 말씀에 이어 공양이 시작되었다. 모두들 긴장된 자세로 조용히 공양할 준비를 하는데, 경험이 많은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처음 참가하는 학생들의 서투름을 이끌어 주는 아름다운 모습도 보였다.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 젓가락 소리, 음식 씹는 소리가 날 때마다 입승 스님의 부리부리한 눈이 쏜살같이 가닿고 학생들은 자라목 들어가듯 움추려 들었다. 어렵사리 절에서 발우공양을 마치고 나는 순간 지독한 경험이 시작되었다. 마지막 발우를 씻은 물은 반드시 스님에게 검사를 받게 되는데 여기에서 천수물에 밥알 하나라도 있으면 수련생 전부는 그 물을 나누어 마셔야만 한다. 하나의 밥알이라도 남게 되면 아수라의 목구멍에 불이 나서 원망과 저주를 받기 때문이란다. 이번에도 예외 없이 천수물을 나누어 먹어야 하는 고역을 치루었다. 이 의식에 모두들 진저리를 쳤지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자비심과 극도의 절약 정신을 체험한다는 것은 얼마나 귀중한 일이겠는가.
첫날의 일과를 마친 시간은 밤 11시였다.
설레임과 낯설음, 잠자리의 불편함으로 잠을 못 이루는 학생들이 많았지만, 우리 지도 교사들은 다음 일정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다음 날은 새벽 4시에 기상하여 예불을 모시는 것으로 시작했는데 지난 밤의 짧은 수면으로 조는 학생이 많았다.
점심 공양 뒤에 공동체 놀이가 시작되었다. 각 조 구성원들이 힘과 지혜를 합쳐서 한 과정 한 과정을 통과하고, 선생님들이 점수를 매기는 화엄법계 놀이이다. 각 과정에는 남에 대한 봉사의 마음을 점검하는 세심정토 과정, 법에 의지하여 저 언덕을 건너가는 의지를 징검다리에 비유한 의법정토 과정, 자기보다 남을 위할 때 곧 자기가 이롭게 됨을 알려 주는 보시정토 과정 들로 12과정을 나누어 진행하는데 참여하는 학생들 모두 진지하고 매우 열심이었다.
나는 불국정토를 담당하였다. 작은 공을 젓가락으로 집어 미리 그려 놓은 우리나라 지도 위에 테를 두르고 주요 도시 이름과 그 위치를 표시하고 그 주위에 있는 대표적인 절 이름을 알아 가는 과정이다. 분단된 조국, 분열된 민족인 남과 북이 하나임을 생각하는 통일에 대한 작은 염원과 우리의 것을 먼저 알자는 취지였는데, 대부분의 학생들이 우리나라 지리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음을 알고 깜짝 놀랐다.
탈이 났다.
수련회 중간에 벌써부터 계획하였던 송광사행을 시작하려 할 즈음 몸이 아프고 배가 뒤틀리면서 토하기 시작했다. 주위 분의 도움으로 병원으로 옮겨서 진찰을 받는데 담당 의사는 이 한여름에 먹을 것이 없어서 더위를 먹었냐고 핀잔을 하셨다. 송광사행도 놓쳐버리고 수련회의 학생들도 끝까지 지도하지 못한 죄스러움에 몸둘 바를 몰랐다. 학생들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참회의 기도를 드리고, 다음 날 아이들에 대한 밀려드는 불안감을 안고 다시 도선사로 갔다. 여러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돌아온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고 서로 눈인사와 포옹으로 다시 만난 것을 기뻐했다.
셋째날은 예불 시간에 108배도 하고 극기 훈련으로 북한산을 오르내린 탓에 다리를 저는 학생들도 많았고, 중간의 일정 때문에 먼저 해산하는 학생회도 있어서인지 분위기가 많이 흐트러지는 점이 눈에 띄었다. 삼일째부터는 주로 모든 일을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하게 배려하고 지도 교사들은 그들이 하기 어려운 것을 보조해 주는 위치를 지켰다. 그래서 이 시간부터는 학생들 스스로 마련하는 촌극과 개인의 장기를 선보이는 시간을 가졌는데 극이 진행될 때마다 웃음 바다를 이루었고, 실수한 모습에는 서로 격려하고 잘한 조에게는 힘찬 박수와 환호를 보내는 흥겨운 시간이 되었다. 저녁 10시 화합의 시간인 모닥불 놀이를 끝으로 이번 수련회 공식일정은 끝이 났다.
마지막 날 회향식을 하기 전 자유 시간에는 나흘 간 함께 딩굴었던 새로 사귄 친구들과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다음의 만남을 위해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으며 무척 좋아하는 모습이었다. 짧은 수련회 기간이었지만 아이들의 태도에서 어려운 과정을 낙오 없이 해낸 자신감으로 벌써 당당한 성인으로, 열렬한 불교의 포교사로서 성숙한 느낌이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청소년 시기에 삶의 여러 가지 지표 가운데 불교적 삶을 선택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겠는가. 이번 수련대회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오늘의 학생들은 각자의 개성이 매우 뚜렷하고 자기 의사를 숨김없이 잘 표현한다는 것이다. 다른 표현을 빌린다면 그들 고유한 색깔을 가지고 있으며, 각각의 색깔이 서로 어우러지는 조화 속에 아름다움을 가꾸어 간다는 것이다.
해마다 개선되어 가는 청소년 수련대회이지만 올해도 여느 해 못지 않게 훌륭하게 치루어진 대회였다.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청소년 일반 문제를 강의 프로그램에 배치하기 보다는 불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이 많이 포함되었으면 하는 점이다. 청소년들이 불교를 너무 어렵게 생각한다는 점만을 고려하다 정작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불교의 가르침은 소홀한 듯 싶다. 아이들은 사찰에서 하는 수련회라고 미리 각오하기 때문에 불교적 생활 양식을 적절히 조화시킨 프로그램은 무리없이 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장기적 안목으로 청소년 문제를 고민하고 여러 가지 대안을 개발하여 참신한 수련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일 것이다.
벌써부터 내년의 수련대회가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