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해인사 수련생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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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지일
1992년 09월 127호
한 뼘은 더 높아진 듯 맑은 하늘, 구광루 앞에 만발한 코스모스와 아침 저녁이면 힘을 잃는 대적광전 앞의 파초가, 이제는 영원한 시간의 흐름 속에 묻혀 버린 지난 여름을 더욱 더 그립게 합니다.
지금 해인사는 해제로 선원의 스님들은 흘러간 구름처럼 떠나고 관광객마저 뜸해져 방학으로 몇 분의 강원 스님들만 남아 한적한 산사 풍경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저녁 예불을 알리는 종성에 가사을수하고 침잠한 용맹심을 일으키는 법고소리에 발 맞추어 정중탑庭中塔을 지나 대적광전을 향하는 계단을 오릅니다.
부처님 전에 가사 자락을 여미고 고요히 합장하여 92년도 수련생 여러분들께 부처님의 따뜻한 손길이 미치기를 기원해 봅니다.
범종 소리가 귓가에 울릴수록 더욱 허전해 보이는 법당. 아직 여러분들이 남기고 가신 예불음이 구석 어디엔가는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비록 숙소가 멀어서 모이는 시간이 촉박하고 자리가 비좁았지만, 다른 곳에서는 들을 수 없는 명랑 진중하고 경건한 해인사 예불 운곡을 여러분도 잊지는 않았겠지요?
대적광전에서 옷깃을 여미고 경건히 합장하며 일심으로 부처님께 예경하는 마음으로 모든 대상과 이웃에게서 부처님의 모습을 발견하고 부처님을 대하듯 생활하고 계신지요?
이제 해가 짧아져 저녁 예불을 마치고 바라보는 노을이 무척이나 아름답습니다.
여름 내내 수련생 여러분들과 함께 했던 보경당.
피아노와 빈 바루 선반만이 덩그렇게 있습니다. 이제 다시 천수경 독송과 108참회 참선으로 시작해서 잠들기까지 꽉 짜여진 일정으로 생리대사(?) 해결도 할 틈이 없었던 수련회를 생각해 봅니다.
덜 깬 잠으로 혼미한 정신을 깨우기 위해 천수경 독송과 108참회를 하는 의미가 죽비 소리에 맞추어 반복되는 굴신 운동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진정 자신의 지난 허물과 행동에 대한 반성, 앞으로 부처님 가르침대로 올바른 삶을 살아 가겠다는 다짐을 확신시키기 위해 올해는 한글 예불대참회문을 읽으면서 했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양심을 속이고 합리화시키면서 현실에 대한 무력감으로 안주한 생활을 타파하고 자기 내면의 번뇌와 끊임없이 싸워 가는 과정이 진정으로 참회하는 생활이라 하겠지요. 4일 동안 새벽부터 구슬 땀을 흘린 것이 실제의 생활에서 나타나야 하겠지요.
그리고 하루 3시간 30분씩 짜여진 참선 시간. 여느 사찰보다 적은 시간이었지만 대부분 무척 힘들어했지요. 희미한 조명 아래 간간이 들리는 장군죽비 경책 소리가 아쉽지 않습니까? 아니면 다리는 저리고 무릎이 끊어질 듯한 통증으로 방선 죽비 소리만 기다린 기억과 졸음과 망상 속을 헤매인 기억뿐입니까? 힘껏 들여마신 숨에 몸과 마음의 모든 찌꺼기를 뱉아 내고 고요한 선열禪悅을 느끼진 않았나요? 바른 자세로 몸의 중요성을 깨닫고 호흡은 자연스레 고르게 하며 마음은 통일하여 잡념을 일으키지 않고 생활하면 언젠가는 선지식을 만나 진정한 자기의 참 모습에 돌아갈 날이 올 겁니다.
공양 시간!
참선 다음으로 힘들고 기억에 남는 시간이 하루 세 번 있은 발우 공양 시간이었죠. 정갈하다기보다는 조금은 거칠은 해인사 식단, 스님들의 발우 공양 의식보다 많이 간소화한 절차와 진지進旨 자세였지만 시간도 더디고 동작이 잘 나오지 않았지요.
오관게로 음식의 소중함을 되새기고, 양념 한 점조차 남기지 않는 절약 정신, 절대 정숙과 바른 자세의 예절 정신, 모두 똑같은 음식을 함께하는 평등 정신, 설거지 한 물과 계곡 물의 차이점이 없는 환경보호 정신, 아름다운 절 집안의 정신이 수련생 여러분들의 가슴에 아직 남아 있는지 아니면 단순히 세간에 내려가 신기한 경험담의 얘깃거리로만 남았는지? 퇴수물 마신 때를 생각하며 아직도 속이 메시꺼우면, 해골 물을 마시고 도를 깨달은 원효대사와 같은 심정으로 반별로 책임졌던 같은 반원을 생각하세요.
혼탁한 사바 세계에 고고한 수행자로서 면모를 지키시는 부방장 큰스님과 일타 큰스님의 오랜 수행 경험에서 하신 법문은 목마른 우리에게 시원한 감로수였지요. 강주스님, 교무스님, 포교 국장 스님의 강의로 근본불교, 대승불교, 화엄사상을 맛보았고 현응스님의 권발보리심문權發菩提心文 원전 강의로 발심이 더욱 돈독해지고 여연스님의 “불교와 문화” 강의는 젊은 불자들에게 깊은 공감을 이끌었지요. 모두가 짧게만 느껴졌던 좋은 시간들이었습니다.
사경과 독경은 팔만대장경을 봉안하고 있는 법보종찰과 화엄사상의 선양에 있는 창사創寺정신에 입각하여 시간이 많이 배정되었습니다.
컴퓨터니 워드프로세스니 하는 발달된 인쇄 매체에 점점 멀어져만 가는 옛 수행 의식을 되살려 팔만대장경을 새긴 우리 선조의 전법 원력을 되새기고 일자일례一字一禮의 지극한 정성으로 하는 사경은 일념이 그대로 신앙이요 선의 경지로 경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함이지요.
화엄경의 보현행원품과 원각경의 발심수행장, 원효대사의 발심수행장을 한글로 독경함으로써 부처님이 설하신 진리의 말씀을 읽고 터득하여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의식을 하루에 한 시간씩 가졌는데 청소년을 위해 준비한 부모은중경이 뜻밖에도 일반 수련생에게 감명을 준 것 같았습니다.
해인사 안내는 일반부 세 차례를 필자가 맡았던 시간으로서 단순히 해인사 역사와 가람배치, 유물의 소개가 아니라 사찰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과 경내의 건조물 하나하나에 선조 스님들의 정성과 땀, 구조물과 벽화 한 장에도 담겨 있는 불교의 사상, 금전적 역사적 가치를 넘어 종교 신앙심의 결정으로서 성보聖寶에 대한 이해를 위해 노력하였지만 시간과 제 능력의 한계를 절감했던 시간이었습니다.
포교국장 시명스님의 발군의 실력으로 모두 넋이 나갔던 찬불가 시간은 참선 시간과는 정반대로 끝나는 시간이 아쉬움으로 가득했지요.
마애불 산행은 갑갑하기 쉬운 실내 생활에서 벗어나 자연을 완상하며 대자연의 무언의 설법을 듣고 마애 부처님의 자애로운 미소 아래서 반별로 기록을 남긴 화사한 시간들이었고요.
108배를 하여 육체적 피로가 더해지고 땀방울이 굵어질수록 자신의 허물은 벗어지고 몸과 마음이 신선해지고 홀가분해짐을 느꼈고, 참회를 마치고 수박을 먹을 때는 지옥에서 바로 극락에 직행하는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또 우바새 불자님들은 홍제암 계곡의 노천 샤워장의 상쾌함도 잊을 수 없겠지요.
계사 스님의 낭낭한 묵소리와 자상하신 오계의 설명으로 진행된 수계식은 윤리적인 삶으로 부처님의 제자가 되겠다는 다짐인데 비록 단번에 이행되지 않아도 계를 지키려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참회하는 삶이 진실한 부처님의 제자이며 수행인의 태도가 아닐까요.
마지막으로 내년의 수련회가 올해보다 내실있는 수련회가 되도록 금년 수련회의 아쉬웠던 점을 적어 보겠습니다.
금연과 묵언이 철저히 이행되지 않아 열심히 해보겠다는 분들에게도 피해가 갔던 점입니다. 내년에는 인례사 스님들의 철저한 감독과 엄한 경책이 준비되어야겠습니다. 남자 분들의 숙소와 샤워장의 불편함은 내년에 관음전이 완공되면 해결될 것이고 내년에는 6차는 경험자 위주로 할 계획입니다.
아무쪼록 일상적인 생활에서 벗어나 출가 수행승의 기분으로 인생과 삶의 진지함을 관조해 보고 심신을 단련해 본 수련회가 여러분 삶의 청량제가 되고 신선한 자극이 되어 삶의 의미가 더욱 깊어지기를 기원하며 내년 수련회를 기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