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월指月대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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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향기 - 시명
1992년 09월 127호
아직도 한낮 기온은 삼십 도를 오르내리지만 숲에 내리는 햇빛이 한결 엷어졌다. 해제를 하자마자 걸망 귀신을 따라 만행을 떠나버린 수좌들의 뒷모습이 활기찼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늦여름의 사원은 잠시 정적을 유지한다. 짧은 여름해에 하루라도 빨리 관음전 공사를 마무리하느라고 일꾼들만 분주할 뿐 관광객의 발길도 뜸하다.
관음전! 한때 주지스님과 유나스님 그리고 강사스님, 강원의 경반 학인들의 요사채로 쓰였던 곳이요, 서쪽 부엌은 갱두간으로도 사용되던 곳이며 때때로 행자들이 국을 끓이려고 수돗가에서 퍼런 나물을 씻거나 콩을 갈아 두부를 만들던 곳이다.
1970년대 초만 하더라도 유나스님으로 계셨던 지월선사의 잔기침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정답던 관음전. 잔잔한 추억들이 묻어 있던 옛 관음전이 헐리고 새 관음전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고 나면 그때 그 따뜻했던 숨결마저 사라져 버리겠지.
지월선사! 아직도 구참 납자들의 가슴에 따뜻한 등불로 남아 있는 스님! 결코 화려하거나 놀랄 만한 행장을 가지진 않으셨지만 청정무구하고 자상하였던 스님. 한평생을 청빈과 가난으로 살아서 청백가풍의 수좌 정신을 그대로 보여주신 스님. 그래서 더욱 우리들 가슴에 그리움으로 남아있는 스님. 나이 어린 사미승에게도 결코 반말을 한 적이 없었던 스님. 가장 부드럽고 자상했기에 가장 엄격하였던 스님.
지월선사는 1911년 2월 4일에 전라북도 남원군 동면 인월리 에서 부친 김옥金玉과 모친 이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릴 때 이름은 봉만奉萬이었다. 열여섯 살 되던 해 오대산 월정사에서 지암智庵 이종욱 화상에게 입산 득도하였는데, 법명은 병안炳安이었으며 지월은 뒤에 받은 법호이다.
그 당시 상원사에 주석하며 제방 납자를 제접하시던 한암스님을 자주 찾아가서 참선을 비롯한 승행을 사사師事하다가 스물다섯 살 되던 해에 홀연히 금정산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일봉一鳳율사에게 구족계를 받고 다시 제방 선원에서 정진하다가 금강산 마하연 선원을 찾아가 만공화상을 모시고 각고 정진하였다.
어느 날 문득 이 환화공신幻化空身 즉, 이 몸 그대로가 바로 천진불天眞佛임을 깨닫고 온갖 생각을 쉬니 이로부터 자비삼매에 들어 드디어 사무량심四無量心으로 일상사를 삼으니, 가는 곳, 이르는 곳마다 자비보살과 인욕 보살로 추앙받았다.
사실 스님에 대한 이야기들은 간단히 선방 지대방에서 구참스님들에게 들을 수 있었지만 스님에 대한 글을 쓰려고 막상 행장을 살펴보니 스님의 행장은 너무나 적소謫所해서 고적하기까지 했다.
도무지 오도송 한 줄, 그 흔한 어록 한 권 남기지 않았으니 그만큼 수행자다운 풍모만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을 뿐 군더더기는 선사와 인연이 멀다.
훗날 스님께서 세연을 다하시고 입적에 드셨을 때에 스님의 방을 정리하여 유품을 살펴보니 오직 자신이 일생동안 걸쳤던 누더기 한 벌만이 남아 있을 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상좌들은 남루한 누더기 한 벌을 청정한 수행가풍의 징표로 나누어 가졌다. 그것은 황금 몇 십 덩어리보다 더 수승한 재산이요, 어떠한 허사虛詞와 미사여구로 가득 찬 그 어떤 법어록보다도 호호탕탕한 법문이었다.
그러니 선사께서 시시콜콜한 사판으로 지낸 냄새 나는 기록 같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수행자풍 말고 무슨 살림살이를 남길 필요가 있었으리요.
스님께서 온 산중 대중의 천거로 잠시 해인사의 주지를 지냈을 때 선사는 ‘수행인이 직책을 맡는다는 것은 자기를 더럽히는 행위이고 세상의 물정과 야합하여 결국 자만심을 갖게 될 뿐’ 이라며 고통스런 표정을 지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선사는 고고하게 자신의 갈 길만 갔다. 수행과 정진 그것이 오직 자신의 길인 양 그것만을 고집스럽고 우직스럽게 걸으셨다. 마치 사자처럼.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선사는 당대의 다른 어떤 선지식보다 행복한 분이셨다. 일생 동안 변함없이 자신의 길을 고고하게 걸어간다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정복淨福이다.
가끔 도량에서 어린 사미들이 다투는 소리가 나면 “보살님들, 서로 참아야지 그렇게 다투면 됩니까?” 하고 자비롭게 달랬다. 도량의 누구에게나 보살님이라고 지칭했는데 이는 상불경常不輕보살이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당신은 미래의 부처님이 되실 분이니 결코 가벼이 여기지 않겠습니다” 라고 경배하였다는 것과 한치도 어긋나지 않는다.
스님은 이렇듯 자비보살이었다. 자비무적慈悲無敵이라고 산중의 크고 작은 시비는 스님 앞에서 봄빛에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그러므로 선사는 단 한번도 상대의 마음에 상처를 내거나 분노를 일으킬 만한 가시 돋은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가 지닌 하심下心하는 정신은 보살의 인욕과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지월 선사는 남의 잘못을 용서하는 데 지나칠 정도로 너그러워서 때때로 대중의 빈축을 살 때도 있었다.
그는 언제나 대중스님네의 잘못이 있을 때마다 “다만 보살이 할 짓이 아니라”고 그 잘못을 깨우쳐 줄 뿐 그 이상의 말은 한 마디도 없었다.
선사가 해인사 주지로 계실 때였다.
강원에 있는 학인들이 밤이면 외출이 잦아서 그 외출을 막기 위해 야경꾼을 두도록 하였다. 어느 날 밤, 한 학인이 도량을 살피다가 인기척이 나자 사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칠흑 같은 밤이라 물체를 분간할 수 없었다. 다가서는 물체는 다름아닌 지월선사였다. 그러나 학인은 도둑이라고 잘못 알고 무작정 몽둥이를 휘둘렀다. 다행히 몸체가 작아 몽둥이는 허공만을 갈랐을 뿐 선사의 몸은 무사하였다. 자칫 잘못했다가 선사는 학인이 잘못 휘두른 몽둥이에 크게 다칠 뻔하였다. 선사는 몽둥이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를 들으며 “보살은 장난이 심하구먼” 하고 유유히 사라졌다. 혼비백산한 쪽은 선사가 아니라 몽둥이를 휘둔 학인 쪽이었다.
선사는 만년에 이르자 구름처럼 이 땅의 산천을 떠돌아 다녔다. 설악산으로 오대산으로 자신이 정진했던 여러 곳으로 마치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듯 애정 어린 눈으로 강산을 돌아보셨다. 행각을 마친 뒤 스님은 여행의 피로 때문인지 미질微疾을 보이셨다. 대중 스님들은 몸살 정도로 생각했지만 스님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문병객을 맞을 때마다 스님께서는 자신이 무슨 큰 죄나 지은 것처럼 “죄송합니다. 보살이 수행력이 모자라서 이렇게 눕게 되었어요. 수좌들에게 면목이 없습니다. 부지런히 수행하십시오. 생사에 해탈하지 못하면 육체의 고통에 속박당하고 맙니다.”하고 경책하여 주었다.
그렇게 아픈 가운데도 스님은 내의만은 자신이 빨아 입었다.
1973년 9월 27일 스님께서는 세수 67세 법납 47년의 생애를 마감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또 한 사람의 선지식이 너무 일찍 사라졌음을 아쉬워하였다.
선사는 마치 먼 길을 떠나는 사람처럼 큰 고통도 없이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셨다. 인욕보살, 자비보살이라는 큰 음덕만을 우리 마음에 남겨 놓고 꽃잎이 떨어지듯 그렇게 이 사바를 떠나셨다.
스님의 일생을 기리는 비가 해인사 일주문 남쪽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