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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계 위기는 생존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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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 법광 1992년 09월 127호
최근에 경험한 몇 가지 깨달음
하동 쌍계사에서 사중 소임을 보고 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하동 군청에 제출할 서류가 있어서 아침 나절이 조금 지난 시간에 승용차를 몰고 시내로 나갔다. 평소 버릇대로 섬진강변의 쭉 뻗은 국도를 시속 백킬로미터 이상으로 달렸다. 한여름이지만 반쯤 열린 창문으로 시원한 강바람이 밀려들어와 더없이 기분이 상쾌했다. 하늘을 뒤덮는 매미 소리는 여전했고, 창밖으로 언뜻 스치는 강변의 백로 무리는 평화로웠다. 그러나 운전대를 잡은 내 마음은 조금이라도 빨리가는 데 있었지 그런 바깥 풍경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한참 달리는데 운전석 옆에 놓아둔 서류가 차창으로 밀려들어온 세찬 바람에 풀풀 날려 창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급히 차를 세우고서 흩어진 서류를 찾아 족히 일킬로미터 이상을 걸어 여기저기 흩어진 서류를 주워 모았다. 이렇게 서류를 찾아다니는 동안 차 안에서는 전혀 보지 못한 풍경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강변의 희디흰 맑은 백사장이며 강 한가운데에 떠 있는 고기잡이 배와 언덕배기 과수원에 탐스럽게 익어 가는 여러 과일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침 반나절이 지나 새참 먹는 농부들과 짐차를 벗어 놓고 풀을 뜯는 황소 모습도 한가한 들녘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같은 공간이지만 시간에 쫓기어 달리는 차안에서는 전혀 느끼지 못한 풍경이 땅에 두 다리를 내리고 보니 그 느낌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싶었다. 저 시원한 백사장에 목욕도 하고, 새참 국수도 얻어먹고, 떨어진 과일의 단맛도 즐기면서 서로 인정을 나누고 가야 할 이 길을 나는 한치 옆을 보지 않고 그저 달리기만 했던 것이다. 이렇듯 현대 문명의 이기인 자동차는 나와 농촌의 정서적 유대를 격리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한 번은 몇 년 전 일본에 가서 교또의 한 사찰을 들렀을 때 일이다. 불상에 개금을 하지 않는 것이랄지 건축물에 단청을 하지 않는 것도 우리와 비교되는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 양식이지만, 그곳 사찰에서 사찰을 보존하는 방식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건물 지붕에 낙엽인지 아니면 무슨 이물질인지 모르겠으나, 썩고 또 썩어 누덕누덕 붙은 것이 족히 한자 이상이 쌓여 있었다. 왜 그런가 궁금해서 안내원에게 물어보았더니, 그곳에선 되도록 자연 상태로 보존하는 것이 다시 고치는 것보다 우수한 문화재 보존 양식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대로 둔다는 설명이었다. 현대화와 선진화의 구호 아래 우리 전통 문화를 시멘트 벽과 슬레트 지붕으로 무조건 뜯어 고치는 우리와 뚜렷하게 차이가 있는 그들의 문화적 자긍심이 어떠한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인간과 자연 환경
“우주는 인류에 대해서 호의적이지도 않지만 적의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다만 우리 같은 하찮은 생물 따위는 개의치 않을 뿐이다. 우주는 결코 인간의 야망에 동조하지 않는다.”
인류의 미래에 대하여 심오한 철학적 통찰력을 가졌던 세이건이라는 학자가 인류의 미래에 대해서 말한 앞의 몇 마디 경구는 오늘 우리에게 매우 시사적이다. 산업혁명 이후 오로지 한길로 달려온 산업화의 물결로 오늘날 인류 문명은 생태계 파괴라는 해결하기 어려운 적대 모순에 빠져들고 있다. 좀더 나은 인류 생존을 위한 산업화가 오히려 그 병폐 때문에 생존 자체를 본질적으로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세이건의 경고는, 우리가 인류 생존의 근본 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물음을 던질 때 비로소 우주와 인류는 다시 한번 공생하게 된다는 뜻일 터이다.
인간 존립의 조건 가운데 자연 환경의 영향은 절대적이다. 자연 환경은 인간의 자아 실현과 행복을 가꾸는 터전이요 인류 문명의 모태요 또한 인류의 미래이기도 하다. 인간의 사고와 행위는 자연 환경의 변화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자연과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사는 삶은 안정되고 풍부한 문화를 창조하며, 그렇지 못한 삶은 필연적으로 파멸의 길을 가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프레온 가스에 의해 지구 오존층이 파괴되는 문제나, 이산화 가스의 무제한 방출에 따라서 지구 온난화 현상이 일어나 가뭄과 홍수가 빈발하는 문제나, 열대림을 무한정 벌목해서 산소가 부족해진 문제들은 이제 지구 생태계가 크게 파손되어서 그 보존을 위해서 모든 인류가 함께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르렀음을 웅변하고 있다. 인류가 지금처럼 성장 위주의 산업화 정책을 계속해 나간다면 머지 않아 지구의 자연 자원은 고갈될 것이고 우리의 정상적인 생존은 불가능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생태계 문제를 사고의 중심 고리에 두고 생각하지 않으면 인류 생존에 대한 어떤 문제도 올바르게 해결할 수가 없다.
생태계를 보존하여 우리 땅과 하늘을 다시 살려 놓으려면 지금 우리 생활방식의 대부분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지금 우리 생활 양식은 단 하루라도 자연 환경에 대해서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서는 존립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이 거대한 산업 문명의 생활 양식을 밑바탕부터 바꾸지 않으면 우리는 더 이상 살아남을 수도 없게 될 것이다.
오늘 우리는 극도의 사고 혼란과 가치 체계의 붕괴를 경험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기도 하다. 이것은 체제의 문제도 이념의 문제도 계급의 문제도 아닌 생존의 문제로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이 폭력의 문명을 거부하고 비폭력의 문명을 건설하기 위한 가치 전환이 필요한 시기인 것이다. 인간에게만 배타적으로 적용하는 기독교적 사랑의 베품도 이제는 전지구적 모든 것에 자비의 손길을 베푸는 불교적 가치와 행동을 요구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지식과 기술만으로 인류를 발전시키고 행복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류가 도덕적 기준과 가치를 설명하는 사람을, 과학적 진리를 발견한 사람보다 높이 평가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인류가 붇다나 모세나 예수와 같은 인격에서 받은 은혜에 대한 보장과 삶의 즐거움을 잃지 않으려면 이들 성인이 우리에게 준 가르침을 정성을 다해서 지켜 살려 나가야 한다. 그리고 현대 과학에 결여된 것을 메꾸어 주는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불교다.”
아인쉬타인 박사의 이 말은 생태계 파괴 문제를 단지 기술 문제로 환치시켜서 해결하려는 기술 우위의 사고 방식에 사로잡힌 사람에 대한 경고라고 할 수 있다. 기술 우위의 교만한 사고를 하는 사람은 문제 해결을 위해 이런 기술에 기대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전지구적 생태계 문제는 기술 문제이기보다는 인간 생존의 지혜 차원임을 지나쳐서는 안 된다. 인간이 다른 생명체와 더불어 조화롭게 공생의 길을 가려면 무엇보다 남들보다 많이 가지고 앞서려는 욕망, 많이 누리려고 하는 생각을 바꿔야 하리라.
세계는 한떨기 꽃
결국 생태계 문제는 인간이 원인 제공자이고 피해자이며 해결할 수 있는 하나뿐인 존재이다. 이 해결 방법 또한 어떤 새롭고 거창한 사상을 만들거나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 해법은 지금까지 인류가 모색하고 창조해 왔던 가치에 있다. 우리의 선택을 소유에서 무소유로, 폭력에서 비폭력으로, 파괴와 착취에서 자비와 보시로 바꾸어 가는 길이야말로 해결의 지름길이 아닐까. 우리는 불교의 마음자리를 밝히는 공부가 이런 문제의 해결장을 제공하는 가장 좋은 가치 체계임을 깨닫고 있다.
세계는 한떨기 아름다운 꽃이라는 불교의 세계관은 불교가 수행하는 온갖 가치 체계를 총체적으로 표현한다. 함부로 살생을 하지 않는 불살생의 계율, 청빈과 절제의 무소유 정신, 탐심과 진심과 치심을 깨끗함과 고요함과 지혜로움으로 바꾸는 수행이야말로 오늘의 인류 문제를 풀어내는 주체적인 지침이다. 인간의 무한한 탐심이 만들어낸 기계 문명의 병폐를 치유하는 것은 그 근본인 인간 마음을 정화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한 마음이 청정하면 한 국토가 청정하다”는 원각경의 말씀은 인간이 변화하면 세계가 변화할 수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총체적 위기에 처한 세계는 바야흐로 불교에서 그 해결 방법을 찾고 있다. 오늘 우리가 심각한 고민의 일단을 드러내는 까닭은 너무 서구 물신주의에 사로잡혀 우리의 아름답고 고귀한 전통 가치를 내팽개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