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의 부처님들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유마의 방 - 김봉호
1992년 09월 127호
이 글로 청정도량에서 정진하는 스님들에게 꾸중을 들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차피 해인지에 글을 쓸 바에야 이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나는 원고 쓰는 일이 밀리거나 세속의 답답한 일에 부딪치면 산사를 찾는 버릇이 있다. 내 불규칙한 습성은 그곳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시도 때도 없이 먹고 마시고 자곤 하지만, 그래도 곧 속이 개운해져 일이 능률이 집보다 두 배쯤은 되는 것 같다.
내가 존경하는 스님 가운데 향암香岩이라는 분이 있다. 본디 대처승이다. 향암스님과 첫번째 만남은 이십여 년 전 해남 대둔사(대흥사)의 대광명전에서 시작되었다. 그 때 그곳에는 고등고시를 공부하는 사람 댓 분, 박항환이라는 동양화가, 그리고 스님과 나, 부엌일을 도맡은 ㅁ보살이 살았다.
향암스님에 대한 좋은 인상은 그의 독경에서 연유했다. 내 생활이 아무리 무질서하더라도 절에서 새벽염불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나에게 새벽염불은 곧 음악이기 때문이다.
음악이야말로 인간 심성의 본질을 가장 잘 들어내는데, 그곳의 새벽염불은 그런 어떤 음악보다도 내 영혼에 감동을 주었다. 그래서 나는 염불은 곧 음악이라고 생각했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여유만만하게 들려오는 염불 소리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의 극치를 대광명전의 향암스님이 보여준 것이다.
소설 한 편과 장막극을 각색할 계획으로 산사에 든 다음날 새벽에, 좀 과장인지 모르지만 어느 선경에서 신선이 노래하는 듯한 향암스님의 염불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잘왔군 잘왔어” 하는 말이 절로 입밖에 나왔다.
나는 그곳에서 보름 동안 엄청난 일을 해냈다. 단편소설 하나, 장막극 각색말고도 희곡 한 편을 더 쓴 것이다. 그 보름 동안에 나는 향암스님과 자주 어울렸다. 주로 밤일을 하는 나는 밤중에 스님의 습격(?)을 받곤 했다. 스님은 “선상님 기시요? 한 잔 허시고 인자 주무시시오” 하며 문을 열고 들어오기 일쑤였다.
그러는 사이에 그가 서울의 불교 전문학교 출신이라는 것, 슬하에 아들이 둘 있다는 것, 대처승인 까닭에 오나 가나 푸대접을 받는다는 것, 그래서 더욱 정진하지만 야박한 인심에 속태운다는 것, 마지막 희망은 어느 깊은 산중의 암자에서 여생을 마치고 싶다는 것 들을 알 수 있었다.
또 있다. 드나드는 사람까지 합치고 보면 끼니마다 십여 명이나 되는 식구의 부엌일을 맡고 있는 ㅁ보살에 관한 사연이다.
그 보살은 부산에서 남편과 자식들을 거느리는 어엿한 가정주부였는데, 어쩌다가 속병으로 고생고생하는 판에, 해남 대흥사의 약수가 좋다는 말을 듣고 남편과 함께 그곳에 왔었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절에 온 지 보름만에 건강한 몸으로 돌아갔는데 속병이 다시 살아나더라는 것이다. 남편이 지극하게 간호한 보람도 없이 신음하다가 절에 와서 지내면 씻은 듯이 좋아지고, 이만하면 되겠다 싶어 집에 가면 다시 병이 나기를 십여 차례나 거듭했다.
결국 그 보살은 가족의 권고로 아예 절로 이사했고, 나중에는 절의 부엌살림을 몽땅 맡게 되었다. 달이 가고 해가 바뀌어 보살은 마침내 삭발하고 승복을 입었다. 삼 년이 지난 어느날 부산에 사는 가족들도 그게 모두 인간의 능력으론 어쩔 수 없는 불연佛緣이겠거니 하고 보살의 뜻을 받아들여서 보살은 속세의 모든 인연을 끊어 버리고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 뒤로도 나는 자주 향암스님을 찾았다. 그때마다 보살은 매우 건강해 보였고 절 살림은 조금씩 조금씩 빛을 더했다.
그런 어느날, 그러니까 지금부터 십여 년 전, 향암스님이 대광명전을 떠났다는 소문을 듣고 달려가 보았다. 스님과 보살은 그곳에 없었고 종적도 오리무중이었다.
다시 한 해가 지난 어느날 나는 우연히 해남 군청의 정문을 나오는 향암스님과 보살을 보았다.
“스님, 도대체 어찌된 영문입니까? 지금 어디 계십니까? 소식도 주시지 않고요.”
내가 다그쳐 물었다.
“송지 미황사에 있습니다. 대웅전을 보수하는 일로 군청에 들렀습니다.”
스님 음성은 담담하였다. 나는 그 주말에 미황사에 갔다. 스님과 보살은 밭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날 밤 그 동안에 두 사람이 겪은 피나는 역정을 들었다. 방에는 비가 새고 요사채는 헛간이 되었고 밭뙈기와 논은 잡초가 무성하였다.
“우선 먹어야 하겠기에 논밭을 일구었지요. 틈틈히 요사채를 고치면서요. 대웅전 보수는 이천만 원이 들었어요. 천만 원은 관에서 내기로 되어 있고 오백만 원은 모연금으로, 또 오백만 원은 보살의 부산 식구들이 냈고요. 그런디 공사는 끝났는디 관에서 준다는 돈이 나오지 않아요. 그래서 자주 군청에 들리는 구만이라우. 그래 저래 오 년이 걸렸구만요. 고생 많이 했지요. 인자 이 절 누가 맡아도 살만하게 되았어요.”
이튿날 새벽, 귀에 익은 염불송에 잠이 깨어 절 안을 둘러보았다. 스님과 보살이 기거하는 윤기 나는 다섯 칸짜리 요사채, 저만치 학생들 공부방이 다섯 개나 되는 또 하나의 요사채, 빗자루 자국이 선명한 이쪽 저쪽의 뜨락, 뛰어난 안목으로 곱게 가꾼 꽃과 정원수들, 잡초라고는 눈 씻고 봐도 보이지 않는 갖가지 채소밭, 향내와 송진내가 뒤엉켜 풍기는 대웅전. 돈만 가지고는 그렇게 될 것 같지 않은, 지극한 사랑이 오롯히 깃들어 있는 절이 거기에 있었다.
나는 그 절에 자주 들렀다. 서울로 팔려간 부도를 찾아왔다는 기별을 들었을 때, 스님이 독감으로 누웠다는 소식이 있을 때, 갑자기 스님이 보고싶을 때, 일감이 밀렸을 때마다 불쑥불쑥 찾아가곤 했다. 그러면서 나는 가끔씩 엉뚱한 짓으로 스님과 보살을 괴롭히곤 했다. 이를테면, 스님의 염불송과 판소리 명창을 맞물려 보면 어떨까 하여 지금은 이승에 없는 박초월과 요즘 한창인 박계향을 그곳에 오게 하여 한 달을 공부하게 한 일 따위이다.
그건 정말 희안한 일이며, 즐거운 노릇이며, 보람있는 작업이었다. 염불송과 판소리의 만남, 그 화합! 그건 부처님께 올리는 비길데 없는 최상의 보시였다. 박초월과 박계향은 소리할 때마다 울고 있었고 향암스님의 독경은 그답잖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감히 그랬다. 우리나라 산사가, 아니 우리 절이 그만한 사랑과 그만한 멋은 누려야 당연하다고.
그런데, 아! 향암스님과 보살의 불행은 또 이어졌다. 열과 성, 땀과 피 온갖 지혜와 지극한 사랑으로 일구어 놓은 그 절에서 또 쫓겨나야 했다.
향암스님과 ㅁ보살은, 지금은 ㅎ군의 한 절에 있다. 처음에는 이 절 역시 보잘것없는 폐사였다. 그들에게는 이른바 좋은 절이 걸맞지 않았다. 그들은 전에 했던 대로 또 일을 하고 땀을 흘리고 피를 쏟았다. 별의별 멸시와 푸대접을 이겨내면서 그 조그만 절을 새도량으로 바꾸어 놓았다.
몇 년 전에 내 작품 ‘황진이’를 서울 국립극장에서 공연할 때, 표를 사느라고 사이사이에 줄서 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에 피어나는 행복한 표정을 보면서 나는 언뜻 그 두분을 끼도록 하고 싶어졌다.
나는 곧 그들을 서울로 초대하였다. 국립극장의 귀빈석에 자리를 잡아드렸다. 저녁 공양에는 국립창극단의 주연급 소리꾼 두 사람을 배석시켰다. 호텔은 서울의 야경이 내려다뵈는 높직한 크나큰 방으로 정했다. 불을 켜고 끄는 법, 변기 쓰는 법, 목욕물 쓰는 방법, 실온을 조절하는 방법, 냉장고의 음료수 따위를 낱낱이 일러드리고 쉬게 하였다.
이튿날 아침, 미리 마련해 두었던 두 분의 승복을 내밀고 나서, 고궁, 남산, 육삼 빌딩을 구경한 다음 조금 이른 저녁 공양을 들면서 내일의 관광 계획을 말하는데 스님이 불쑥 나섰다.
“그러는 거 아니구만이라우. 한꺼번에 구경 많이 허는 건 한꺼번에 음식 많이 먹는 것하고 같지라우. 우리는 내려가야 혀요. 일이 꽉 찼구만이라우.”
향암스님과 ㅁ보살의 소망은 쫓겨날 염려가 없는 조그만 절에서 여생을 마치는 것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부랴부랴 차를 타고 떠나는 스님의 뒷모습에서 온갖 풍상을 걸머진 이 땅의 부처의 한 모습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