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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지키는 풀잎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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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비의 소리 - 여연 1988년 12월 82호
모든 것을 다 건네주고 차겁게 엎드린 겨울벌판이 새로운 새벽의 침묵을 풀고 있다. 봄의 창조를 꿈꾸는 대지는 시린 칼바람을 비껴 안으며 여린 풀잎들의 뿌리를 잠재운다. 대지 속에 잠든 풀잎들의 뿌리를 생각하면, 수난과 격동으로 얼룩진 우리들의 역사, 그 숨결을 느낀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되풀이되는 역사적 수난의 소용돌이를 겪어오면서도 그 고통을 극복해내며 지금까지 문화와 민족의 동질성과 일체성을 지닌 채 살아온 우리들의 역사와 백성, 그리고 그 숨결의 존재를 말이다.
공자는 군자(君子)를 바람으로, 소인을 풀로 비유하면서 바람이 불면 풀은 엎드리기 마련이라고 했다. 치자(治子)가 덕스러운 바람으로 백성을 다스리면 민초는 이에 따를 뿐이라는 통치의 원리를 일컫는 말이기는 하지만 이 비유는 잘못된 것이리라. 대지 위로 바람이지나고 나면 풀잎은 다시 머리를 든다는 사실, 바람은 지나가는 것이지만 풀잎은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 있다는 사실, 차거운 바람이 부는 겨울이 와도 그 뿌리는 결코 시들지 않고 단단한 대지 아래서 잠시 잠든채 창조의 생성을 기다린다는 것, 폭풍이오면 거역하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꺾이지 않으며 그래서 대지의 주인은 바람이 아니고 풀이라는 것을 왜 공자는 몰랐단 말인가. 바람은 다만 풀의 씨앗을 옮겨 그 생명력을 키우는 일을 할 뿐 바람은 결코 풀을 지배하거나 풀의 성질을 바꾸어 놓지는 못한다. 그런데 왜 공자는 대지라는 무대의 주인공은 풀이 아니라 바람이라고 보는 편에 섰을까. 공자에게는 역사의 주인공이 민중이 아니라 다스리는 자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권력자의 생각에 사악함이 없는 것(思無邪)’을 정치의 이상으로 삼았던 것일까. 그러나 어쩌 권력자의 생각에 사악함이 없기를 바라리요. 과연 그들의 바른 생각으로 역사의 지평을 열 수가 있겠는가.
이에 비해 맹자는 역사의 주역이 민중이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여름의 험한 가뭄에 모든 싹이 마르지만, 하늘에 구름이 일어 한바탕 비가 쏟아지고 나면 시든 싹들은 갑자기 마를 대지를 뚫고 기운차게 솟아오르게 되니 그것을 막아낼 자 누구인가” 하고 묻고 있다. 이 말은 다름아니라 비를 오게 하는 구름으로서의 치자(治子)보다는 어느 구름에 비가 오건본래의 생명력을 지니고 솟아오르는 싹으로서의 민중의 힘에 대한 깊은 신뢰에서 비롯한 말이다. 이처럼 우리의 역사를 지탱해 온 힘의 원천은 대지에 뿌리박고 자라는 풀과 같은 이름 없는 민중들의 생명력에서부터 싹튼 것이다.
오늘 아침 전씨가 그 숱한 영욕과 오욕의 상처를 민초의 대지 위에 남긴 채 연희궁을 떠났다. 그토록 모진 바람으로 민초들의 뿌리를 뒤흔들어 강탈했지만 결코 풀잎의 생명력을 지배할 수는 없었고 풀잎의 진실됨을 이겨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나 하고 그는 떠났을까. 만일, 그가, 비록 대지 위에 군림하는 모든 것보다 약하면서도 그 모든 것을 끝내는 이기고야마는 들풀과 같은 생명력을 닮은 민중이 대지의 주인이라는 것을 좀더 일찍 알았더라면 우리의 역사가 그렇게 어둠 속으로 뒷걸음질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시에는 가정법(假定法)이 없다고 사가(史家)들이 말하지 않던가. 이제라도 우리들의 역사가 다시는 가정법으로만 돌아보는 미련의 역사가 되지 않도록 하기위해서는, 전씨에 대해 사법적으로 단호하게 단죄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들과 궤를 같이하는 현 위정자들의 검은 바람을 철저하게 막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씨가 육공 주역들과 공동으로 연출하여 감정어린 호소로 위장한 깜짝쇼에 마취당하지 말고, 언어의 분장 뒤에 감춰진 사과와 해명의 진의를 바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직도 그와 함께 오공화국의 무대에서 주역을 맡았던 그의 하수인들이 틈만 있으면 서슴없이 온갖 거짓된 꾀를 짜내어 위장함으로써 민초를 기만하고 지배하려 하지 않는가. 시궁창보다 더 더러운 악취를 풍겨내는 저 음흉한 혀들, 썩은 시체를 쪼아먹는 갈가마귀떼처럼 주둥이에 묻은 악취를 씻어내려는 자들이 저지른 최악의 진상을 가려내야 함에도 오히려 덮어주고 위장하려는 육공의 배역들, 그들에게 이 땅을 지켜온 대지의 풀잎, 민초의 눈이 똑바로 지켜보고 있음을 상기시키자. 그래서 역사의 강물은 결코 썩지않고 끊임없이 흘러 여과되는 것임을 알려주자. 바람으로 쓰러진 풀잎들이 다시 일어서고 있는 이 창조의 대지에 통일의 새벽이 올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