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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방불교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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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 박용길 1988년 12월 82호
산행 보고
언제 그랬냐는 듯 산도 숲도 이제는 활짝 비운 몸으로 능청입니다. 도자로 밀어댄 어설픈 초입길만 서둘러 벗어나면 그래도 이곳은 오솔길이 제법 근사한 주금산(奏琴山) 한허리.
손때 묻은 부지깽이 한 가락 끌고 매일 매일 해거름녘 산보삼아 오르는 산행이 이제는 어느덧 버릇처럼 되어 버렸읍니다. 촌에서야 뭐 볼 만한 구경거리가 가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붙들고 객적은 소리나 해가며 왕창 개길 만한 주변머리도 못 되고. 하기야, 팔자좋은 소리로, 산 좋고 물 좋은 곳이라고 일껏 이곳을 찾아든 내가 뒤늦게 되도 않는 푸념을 늘어놓으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산보(山步)는 이제 아주 소중한 나의 취미요, 반일거리가 되었는지도 모르겠읍니다.
처음 개울을 건너 이어지는 길은, 이제는 영 물길을 벗어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서운한 마음으로 올라가는 곧은 오르막길입니다. 그곳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밟아도는 길은 노랗게 물든 낙엽송 잎이 가랑비처럼 곱게 날아내리는, 참 희한하기 짝이 없는 곳이지요. 더러는 새치가 많아 희끗희끗한 내 머리 위에도 내려앉고, 더러는 올려다보는 얼굴 위에도 날아와 앉는 바늘잎의 촉감이랑 그 냄새는 아는 사람은 알 겁니다.
바람소리도 옛날 같지가 않습니다. 옛날이래봐야 겨우 지난 여름을 두고 하는 말이지만, 이 골짜기에서는 바람도 영 곰살맞아서 땅위에 누운 잎새나 겨우 집적거릴 정도입니다. 이따금씩 공중에 이는 바람도 이제는 곱게 빗질하는 소리로 저만큼 비껴갈 뿐입니다.

아직은 석양이 이른 때이지만, 산마루를 넘어드는 햇살이 눈부실수록 골짜기의 음영은 더욱 짙어져 갑니다. 숨었던 개울물이 다시 암청색으로 제 몸을 드러낼 때쯤이며, 이제는 어느덧 산높은 곳의 냉기를 뒤로 하고 발걸음을 되돌려야 할 때입니다. 눈물이 핑 도는 큰 호흡에 문득 가벼운 시장끼를 달래며, 아직은 서두르지 않아도 될 길을 또 내려가는 오늘 하루, 텅 빈 숲이 다시 어두움으로 채워지는 순간입니다.

마힌다가 처음은 아니었다
지난 호에서도 말했다시피, 스리랑까에 불교가 처음으로 도입된 것은 일찍이 기원전 3세기쯤의 일로서, 그 주역이 다름 아닌 아쇼까대왕의 아들 마힌다 비구였음은 공인된 사실(史實)로서 현재 널리 유통되고 있는 바와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보다 일찍 불타의 가르침이나 불교에 대한 이러저러한 소문이나 유례없는 호불(護佛)을 시행했던 아쇼까 대왕의 업적에 대한 소식이 랑까섬에 한번도 다다른 적이 없었다고 단정할 만한 근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 또한 두루 알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는 일찍이 비자야Vijaya 시대부터 두 나라가 서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었음을 잘 알고 있다. 또한 남부 인도의 빤드얀족 Pan-dyans이, 본디는, 생전의 부처가 오랜 동안 자신의 활동무대로 삼았던 마드흐야데사 Madhyadesa에서부터 이주해온 끄샤뜨리야 Ksatriya계층의 아리안족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빤드얀족이 랑까섬에 건너온 것은 마힌다 비구보다 훨씬 앞의 일이었으며, 따라서 이들에 의해 단편적이나마 불교가 랑까에 소개되었으리라는 것과 또 그들 가운데에는 틀림없이 불교 신자도 있었으리라고 짐작하는 것은 그렇게 무리는 아닐 터이다.
독일의 불교학자 올덴베르크 Hermanm Oldenberg(1854-1920)는, 싱할라 Simhala족의 고대역사기를 인용하면서, 스리랑까의 불교는 결코 마힌다에 의해 처음 도입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웃 인도 대륙의 깔링가 Kalinga에서부터 전래된 불교가 랑까섬 전체에 서서히 확산되었다고 생각했다. 그의 말에도 분명히 일리가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면 일찍이 빤두까브하야 Pandukabhaya에 의해 건립된 여러 종교적인 건축물을 열거하고 있는 「대사(大史)」가운데에서 불교와 관련된 것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까닭은 과연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올덴베르크뿐만 아니라 말랄라세께라Malalase kera도 그것은 모든 주의를 마힌다에게 집중함으로써 스리랑까의 불교 도입은 결국 전대미문의 호법왕 아쇼까 대왕을 빼놓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으로 단정하고 있던 일부 불교사가(佛敎史家)들의 고의적인 폄하에 의해 누락된 것이 분명하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들의 이같은 견해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불교가 마힌다에 앞서 섬주민들에게 전파되어 이를 신봉하는 무리들이 섬 전체에 산재해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 무렵에는 이들을 총괄하여 지도해 줄 만한 승려도 없었으며 따라서 특별한 불교 건축물을 건립하지 않으면 안 될 뚜렷한 이유가 있지 않았다는 설명이 더욱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마하비하라[大事]의 탄생
마힌다와 데바남삐야띠싸 왕의 첫번째 만남은 젯뜨하월 The month of Jettha의 보름달 밤에 왕의 수렵지에서 이루어졌다. 그때의 분위기는 상당히 우호적이었으며, 왕의 근기를 한눈에 간파한 마힌다는 그 자리에서 「주라하상비경(呪羅詞象譬經, ulahatthipado pama-sutta)」을 설하는 것으로 래도제일법륜(來島第一法輪)을 굴렸다.
이튿날 왕과 같이 수도인 아누라드하뿌라 Anuradhapura의 왕궁으로 들어간 마힌다는 다시, 모든 왕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업(業, karma)과 사성제, 그리고 윤회에 관한 설법을 통하여 이들 모두의 귀의를 받았을 뿐 아니라, 왕궁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그의 청중은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그 무렵 마힌다와 그 일행의 거처는 왕실 소유의 마하메그하 원 the Mahamegha park에 있는 전각에 임시로 마련되어 있었다. 얼마 뒤에 ‘도회지로부터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점을 마음에 들어하는 마힌다의 말에 왕은 선뜻 그곳을 승가(僧伽)에 기진(寄進)하였다. 마힌다는 곧 이곳을 랑까불교의 중심지로 바꾸어나간다는 계획을 수립하였으니 명실상부한 상좌부 불교의 요람이요, 스리랑까의 불교문화 및 불교학의 중심지인 저 유명한 마하비하라(Mahavihara, 大寺)는 이렇게 해서 탄생하게 되었다.

보리수의 이식
랑까 체재 스무이레째 되던 날, 마힌다는 아누라드하뿌라를 떠나 미싸까-빠바파Missaka-pabbata로 도량을 옮겼다. 이는 연례적으로 반복되는 우기(雨期) 동안의 안거를 위해서였다. 행렬 가운데에는 왕의 조카인 마하-아리뜨하를 비롯한 쉰다섯 명의 재가신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몇 개의 석굴(石窟)을 자신들의 거처로 사용했다.
한편, 데바남삐야띠싸 왕은 아눌라 공주가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출가하여 교단에 합류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마힌다와 상의한 끝에, 서둘러 아쇼까 대왕에게 사신을 보내어 상그하미따 Sanghamitta 비구니와 함께 스리랑까에 보내줄 것을 간청하였다. 이윽고 석가의 대각을 묵묵히 지켜본 보리수가지와 함께 상그히미따 비구니가 섬에 도착하자, 공주와 그의 친구들은 곧바로 득도식을 거쳐 비구니교단을 형성의하였다. 이들은 상그하미따와 함께 아누라드하뿌라 근교의 우빠시까-비하라 Upasika-vihara에 머무르면서 계율 연구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상그하미따 비구니와 함께 인도에서 건너온 보리수는 실로 성대한 의식을 거쳐 새로운 땅에 무사히 이식되었다. 섬의 전지역에서 주민 대표가 선출되어 참석하였을뿐더러, 아쇼까 대왕은 많은 경축 사절을 파견하여 행사를 더욱 빛내 주었다. 그 뒤에 이 보리수로부터 채취한 여러 개의 묘목이 섬의 곳곳으로 퍼져나가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로부터 불교 신앙의 상징으로 추앙받아오고 있다는 사실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스리랑까와 마힌다
마힌다가 스리랑까에 상륙한 것은 그의 나이 스무두살이던 때의 일이었으며, 데바남삐야띠싸 왕의 동생 우띠야 Uttiya왕 8년에 여든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그의 유골은 아누라드하뿌라를 비롯한 스리랑까 각지에 분산되어 봉안되었으며, 이어 그 다음 해에 상그하마따 비구니가 열반에 들었다.
스리랑까의 문화는 마힌다의 상륙으로부터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하여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는 다만 불교라는 새로운 종교만을 랑까에 소개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온전히 성숙한 문화 전반에 걸쳐 불교를 당시의 스리랑까인들에게 널리 전파시키는 일에는 크게 공헌하였다. 사원 건립을 통한 건축술 및 예술의 보급이 그 좋은 보기이다. 그는 또한 싱힐라 Simhala 문화의 아버지로도 숭앙받고 있다. 붇드하고오샤 Buddhashosa의 말에 따르면, 그는 랑까섬에 삼장(三草)의 주석서를 들여와 이를 주민들의 일상용어로 번역하여 널리 유통시켰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싱할라어의 문어(文語)를 최초로 확립시킨 사람으로, 그리고 이를 사용하여 직접 저술 행위에 참여한 선구자로 스리랑까인들에게 길이 기억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가 스리랑까에 불교를 전파하는 일에서 급속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것이다. 마힌다의 스리량까상륙은 한마디로 인도와스리랑까사이의 사회, 문화, 그리고 외교 관계의 정점을 기록하는 대사(大事)였다. 우선 데바남삐야띠싸 왕은 아쇼까 대왕과의 강력한 우호를 희망했다. 그뿐 아니라 왕과 왕족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당시의 불교가 그밖의 다른 계층으로부터 외면당할 이유는 아무 것도 없었다. 물론, 그 무렵, 섬의 곳곳에는 각양각색의 토속신앙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 어느것도 불교라는 신흥 종교의 잘 정비된 조직에 대항할 만큼 온전하지는 못했다.
나아가 불교는 스리랑까인들의 삶 자체에 그 전에는 느낄수 없던 새로운 활력과 질서를 부여하기에 충분한 유형, 무형의 자산을 가지고 있었다. 간단한 보기를 들면, 중생의 복리를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승려들의 거룩한 삶은 백성에 대한 군왕의 구태의연한 통치관에 심각한 반성과 자각을 촉구하는 중요한 모범이 될 수 있는 점 따위가 그것이다. 아울러 새로운 종교가 제시하고 있는 덕목(德目)의 실행이 곧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의 구현에 그대로 직결되리란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란 점 또한 마힌다의 불교 전파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요인의 하나였음에 틀림없다.
또 하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은 언어 문제이다. 아쇼까시대의 명문(銘文)과 기원전 3세기쯤에 기록된 랑까의 명문을 비교하면 우라는 두 나라의 언어 사이에서 별다른 차이점을 찾아낼 수 없다는 사실을 금방 깨닫게 된다. 따라서 마힌다는 별 어려움 없이 자신의 설법을 랑까 주민들에게 온전히 전달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