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경전의 언어를 통해 가르침은 어떻게 수행되는가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교학에의 초대 - 혜묵 1988년 12월 82호
II. 본론

1. 敎本와 体性의 通局(교체론의 두가지 다른 의미-본성론과 현상론)
화엄교학의 교체론을 놓고 ‘가르침의 통로를 여는 방편’을 거론하는 것은 교학의 전통에서 볼 때 지나친 확대해석이 될수 있다. 또, 앞에서 교체라는 말을 ‘가르침의 근거’ 라고 해석하면서, 교체론을 다루는 현담의 두 가지 다른 입장을 지적한 바 있다. 敎体章의 첫머리에서는 体와 性의 의미를 구별하여 교체론의 전개양상을 이 두 입장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그 속에 담긴 태도상의 변화를 주목해 보면 간결하게 표현되어 오해의 소지가 많은 교체론의 의미가 조금은 명백해진다. 예컨대,
“부처님의 가르침은 음성으로서 体를 삼는다. 음성은 의미를 전달하는 기능을 갖기 때문이다”라는 구절과, “부처님의 가르침은 會緣入實의 實体, 곧 眞如性을 体로 삼는다. 眞如에서 흘러나온 교법은 다른 교법에 비해 가장 수승한 까닭이다.”라는 귀절에 담겨 있는 体라는 용어의 의미에는 간과하기 쉬운 큰 차이가 있다. 앞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음성의 의미전달 능력 위에 근거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교체를 문제삼는 것은 부처님과 제자들 사이에 음성을 매개로 실제적인 가르침이 수행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논증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뒷귀절에서는 가르침의 본성을 바로 문제삼는다. 가르침을 가르침이게끔 해주는 것으로서의 본성과 그 본성의 우위성이 밝혀지기만 하면 음성의 전달기능 따위는 논증의 여지가 없는 하찮은 문제로 전락하고 만다. 앞귀절을 말하는 교학자들이 가르침의 재현가능성과 그 방도라는 구체적인 문제에 부딪쳐 ‘가르침이 성립할 수 있었던 기반’을 논증하는 데 대해, 뒷귀절을 말하는 교학자들은 가르침을 본성론과 현상론으로 구별, 전자를 현상론의 일부분이어서 천박한 것이라고 못박는다.
현담의 교체장에서는 이 두 입장을
㉠事相의 측면에서 敎의 体를 물은 것(体는 依의 뜻) …여기서의 体는事相의 体, 곧 사상의 근거를 의미한다. 외형화되어 이미 실존하고 있는 가르침을 事相으로 포착하여 그 근거가 聲 따위임을 논증하는 것.
㉡本性(理性)의 측면에서 体를 물은것(体는 性의 뜻) …敎를 敎이게끔 해주는 敎의 본성, 시공을 초월하여 불변, 내재하는 敎의 眞性을 물은 것(相은擧於外, 性은主於內), 이에 대해 眞如性이나 海印三味 따위가 敎의 본성이며 근거라는 것.
이와 같이 구별하고 이의 通局을 논증전자를 후자에 종속시켜 버린다. 理事, 休性 등의 용어를 둔 이런 유형의 해석을 ‘본성론적’이라고 못박기 위해서는 사실 화엄교학의 보다 중요한 부분들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런 유형의 해석이 결과적으로 전자(앞에 인용한 두 귀절 중첫귀절)가 갖고 있었던 구체적인 문제들을 임의로 호도하고 있다는 점만큼은 밝혀 놓아야 한다.
“경전을 통해 가르침이 어떻게 수행되는가” 같은 문제는 “깨달으면 그만”이라는 투의 본성론적 태도로 무시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교학의 전통속에 남아 있는 본성론(또는 본체론)-변화하지 않고 그 스스로 동일하게 남아 있는,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게끔 해주는 것으로서의 보편적 본성과 이 본성이 현실화되어 나타나는 다양한 측면 또는 양상으로서의 현상을 구별하여 현상의 배후에 숨어 있는 조정자로서의 불변의 본성을 규명하려는-적 태도는 교학의 현대적 발전을 장애하는 중요한 요소들 중의 하나이다. 또, 이런 전통하에서 씌어졌던 体用, 性相 등의 용어들도 일면 구체적인 문제들을 쓸모없는 관념적 논쟁의 틀 속에 가둬버리는 그릇된 선입견의 원인이 된다. 경전(언어를 통한 가르침)을 통하지 않고는 입증될 수 없는 이같은 性相論의 선입견들을 갖고 거꾸로 경전을 해석해봐야 구태의연한 동어반복식의 記述 이외의 해석을 얻어낼 수 없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玄談의 性相論같은, 성공하기 어려운 本性에의 무모한 논쟁에 휘말리기보다는 좀더 유연하게, 전자를(앞에 인용했던 두 귀절 중) “가르침에 대한 기능적 태도”라 부르고, 후자를 “가르침에 대한 본성론적 태도”라고 편의상 구별하여 전자와 후자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경전을 통해 가르침이 수행되는 구체적 과정”을 기능적 입장에 치중해서 살펴보려 한다. 예를들면 唯識에서는 佛說은 부처님의 心上에서 妙觀察智와 이에 상응하는 無漏爭識, 또 無漏文義가 긴밀하게 연결된 것이어서 오류에 빠질 수 없다고 한다. 이를 本質敎로서 凰成實性의 근거 위에서 교체론을 전개하는 것은 기능적인 입장에서는 별소용이 없는 논증이 될 테지만, 이 논증이 시사하는智-識-義-文 등의 구체적인 상관관계는 經文을 통해 가르침을 재현해보려는 우리의 노력에 확실히 유용한 지침이 되어 줄 수 있다.

2. 聲, 名, 句, 文의 四法-能詮의 体
(가)能詮과 所詮
瑜伽論 81에는 “契經의 体에는 간략히 二種이 있다. 하나는文이고, 둘은 義이다. 文은 所依이고 義는 能依이다. 이렇게 二種을 -切所知境界라 한다. 곧 六文에 의지하여 十義를 밝히는 것이다.”했다. 이는佛敎 전체를 “能詮의 文이 所詮의 義를 詮” 하는 구조로 해석하는 것이다. 즉 佛說에 의해 얻어지는 所知는 詮을 매개로 하는 것인데, 이는 표현수단(능전)을 의지하여, 전달하려는 내용을(소전) 전달함으로써 얻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詮을 기준으로 能所를 분별하는 해석의 방법은 복잡한 논쟁을 유발하는 독특한 사고방식의 전형이 된다.

(나)의미를 전달해 주는 聲, 名, 句, 文 -능전의 구조가 의미를 제약한다.
能詮을 둘러싼 교체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 용어들의 의미를 좀 명백히 하고 이에 연관된 특징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 聲…물리적 소리(色法), 여기서는 음운의 굴곡 즉, 높낮이, 세기, 음색 따위의 차별상에다가 自性, 差別 등의 의미를 담아 듣는 사람의 耳根에까지 전달한다.
● 名…諸法의 自性의 의미를 담아 전달한다. 名蘇, 또는 개념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기서는名 자체가 의미를 갖는다기보다는 의미를 담는 그릇의 일종이라는 뜻이 강하다.
● 句…自性과 自性의 차별된 의미를 담는다.定義나 명제에 해당한다.諸行無常, 諸惡莫作 등의 자성과 자성을 연결,差別의 의미를 전달한다.
● 文…名과 句를 연합하여 의미를 연결하는 구실을 한다. 즉 일정한 문장 형식을 통해名句를 연합, ‘의미의 연결’을 전달한다.
이런 단순한 설명은 각 부분에서 거듭보충될 것이지만, 아뭏든 이처럼 표현수단에서 의미를 엄밀히 구별해내어 名句文 등이 독자적으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며, 의미는 오로지 대화자의 인식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 언어관은 서구적 전통에서의 唯名論的(nominalistic) 언어관에 가깝다. 그러나 의식상에 포착한 法相, 이에 상응하는 구체적 현실, 이들을 담아내는 능전의 수단 등의 관계를 본성론적으로 一元化하면 또다른 복잡한 이견들이 나타나게 된다. 다만 여기서는 능전과 소전의 결합을 통해 전달이 이뤄진다고 할 때, 소전을 필연적으로 능전에 의해 제약을 받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려 한다. 다시 말해 名句文과 法相(인식주관 속에서 제6식으로 포착한 法의 의미)의 상응이 名句文과 소리와의 연합을 통해 외부로 전달되어 他人에게 이해를 유발한다 할 때 전달자의 心上에 나타난 의미는 전달과정에서 능전의 특성 때문에 왜곡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입 ↔ 귀
소리
전달자의 意識 피전탈자의 의식

의미전달의 외적 형식

첫째로 名과 句는 각기 自性, 差別 이외의 의미를 담을 수 없다. 따라서 名을 통해 전달되는 의미는 自性이라는 형태로 고정화, 추상화되어야 한다. 예컨대, 날아가는 새의 생생한 푸득거림은 자성으로 포착되지 않는 한 묘사, 전달할 수 없다. 움직임은 자성간의 차별상으로만 표현이 가능하다.
둘째로 法相, 名, 句 따위는 소리라는 色法의 특성에 의존한다. 즉, 名, 句에 담긴 자성차별을 소리의 굴곡을 빌어 전달하는 것이므로 음운굴곡의 차이를 빌 수없는 의미는 전달할 수 없다. 흔히 “지혜는 차별상을 떠났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 지혜는 소리(말)로써는 묘사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셋째로 이같이 제한된 의미는 문장의 연결형식을 벌어서만 연합될 수 있다.
요컨대,法相과名, 名과句, 名과句 등을 연결하는 文, 그리고 이들과 소리와의 결합이라는 전달과정에 있어서의 형식상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전달자가 전달하려는 의미를 변질시킨다는 점이다. 이러한 변형과 변질은 전달과정을 통해 피전달자의 의식 속에서 의미를 재현해내는 과정까지를 포함한다면 지독히 복잡한 해석학적 논쟁들을 불러일으킨다. 교학에서는 초기에서부터 언어를 통한 의미전달의 한계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능전의 제약을 피해가며 어떻게 전달자의 의사를 정확히 피전달자의 의식상에 재현해 낼 수 있느냐는 것이다.
교학자들간에 나타나는 중요한 이견들에도 불구하고 화엄현담에서는 본성론적 교학의 기반 위에서 실제적인 난제들을 회피해가며 긍정적 입장만을 밝히고 있다. 이를테면 부처님과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本有覺性이야말로 부처님과 우리사이를 연결해 주는 가장 확실하고도 유일한 통로라는 식이다. 覺性을 실현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경전 속에서 부처님의 그림자 일부밖에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사실 그들의 “相을 모아性으로 돌아감” 같은 방법은 너무나도 분명한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이기도 했겠지만 경문해석이라는 당면의 문제를 일종의 형이상학적 논쟁 속에 가둬버리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 바로잡음
지난 11월호의 이 글에서 첫 문단의 “일상적 언어Language이건 학문적 언어speech이건”은 \"일상적이건 학문적이건 이를테면 language나 speech 따위에 상응하는”의 잘못이고 도표 속의 “後得者”는 ‘後得智”의 잘못이므로 바로 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