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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문화 속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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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 진철승 1988년 12월 82호
그동안 ‘불교와 세시풍속,‘ ‘불교와 민간신앙,’ ‘불교의식과 민중의례’ 등의 세 가지 주제를 가지고 일 년 남짓 연재해 왔다. 본래는 이에 이어 ‘불교와 민중문화’에 대한 글을 몇 차례에 걸쳐 연재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미 예정된 분량을 넘었고, 또 주제 자체가 한두 회에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기획연재를 필요로 하는 것이기에 본격적인 논의는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다. 다만 이제 연재의 마무리 글로서 약간의 의견을 개진해 보도록 하겠다.
‘민중문화’ 란 말 그대로 민중이 스스로 생산하고 스스로 즐기는 문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좁은 의미의 민중문화이다. 넓은 의미의 민중문화는 민중의 삶의 리얼리티를 반영함과 동시에 민중의 지배층에 대한 적대감과 분노를 표현하는, 보다 전문적인 예술 창작물도 포함한다. 이러한 민중문화의 극치는 민중이 주인되는 새로운 해방세계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며, 그를 위해 투쟁하는 민중의 모습을 형상화해 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술가란 예술 창작을 전업으로 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따라서, 인간의 삶을 유지하는 데에 필수적인 재화의 생산을 담당하지는 않는다. 폐쇄적인 자연경제를 주축으로 하던 봉건사회에서는 민중의 삶을 반영하는 민중적 예술가는 당연히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지배계급의 유한 취미나 오락으로서, 또는 종교적 세계관의 표현으로서만 예술은 존재했다.
반도에서 이러한 봉건적 사회구성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16세기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임진, 병자 양란의 피해를 복구하면서 민중의 노력에 의해 생산력은 두드러지게 발전되었고, 그에 따라 상품유통이 활발해졌으며, 한편에서는 광업과 수공업이 발전하는 등 자본주의적 요소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화폐경제의 발전을 의미했다.
생산력의 발전이 바로 농민들의 삶의 질을 높여 주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국가, 지주 및 신홍자본가에 의한 이중적 수탈의 대상이 됨으로써 더욱 생활이 어려워졌고, 결국은 마을을 떠나 유랑민이 되기도 했다. 신홍자본가는 광산, 수공업, 상업 부문과 농업 부문에서 일정한 부를 축적한 층으로서, 때로는 민중과 더불어 국가나 대지주와 같은 봉건 지배층에 대한 투쟁을 전개하기도 하였으나, 이들은 결코 민중의 동지는 아니었다. 이들은 반봉건 투쟁이나 반외세 투쟁에서도 전면적인 대중투쟁의 단계에 이르면 항상 도중에 탈락하여 일신과 자산의 보호에 급급해 하는 기회주의적인 속성을 보였다.
생산력의 발전과 상품화폐경제를 바탕으로 하는 자본주의적인 요소의 발생, 봉건적 지배구조와 수취체제의 문란, 이로 말미암은 가혹한 수탈과 착취 등은 봉건적 자연경제에 근본적인 균열을 가져오기 시작했고, 자연히 마을을 중심으로 하던 민중의 세계관도 변화되기 시작했다. 이에 가중되는 수탈에 대항하여 산발적인 경제투쟁으로부터 조직적이고 전국적인 반봉건, 반외세 투쟁에 이르기까지 각종 투쟁을 겪으면서 민중의 의식은 급속도로 고양되었다.
이처럼 격변의 시기에 고양된 민중의 의식은 당연히 나름대로의 표현 통로를 찾게 되었다. 그러나 투쟁하면서 동시에 때맞추어 일상의 생산과 노동에도 전념하지 않을 수 없었던 대다수의 민중은 변화된 사회상을 직접 표현해낼 수는 없었다. 따라서 더욱 전업적으로 이러한 변화를 표현할 집단이 탄생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들이 바로 남사당패, 솟대쟁이, 초라니패, 탈꾼, 소리광대 들로 불리던 ‘전문적 유랑예인 집단’이었다.
이들 유링예인들은 봉건적 신분사회에서 노비, 중, 무당, 백정, 장인 들과 더불어 가장 천한 계층이었다. 이들은 그 기능을 전수하며 대를 이어오는 경우도 있었으나, 이조 중기이후 급속한 농민 분해의 결과로 발생한 유어민으로 구성되기도 하였다. 당연히 이들의 가슴 속에는 봉건 지배층의 가렴주구와 천대에 대한 피맺힌 적개심이 있었고, 이는 변화된 사회상의 예술적 표현 속에 그대로 녹아들었다.
17세기 중엽 이후 자연경제 체제에 금이 가면서 생성되기 시작한 유랑예인들은 각종 민중설화, 민중의 노래, 민중의 재주 등을 종합하면서 일정한 수준의 예술적 창작물을 생산해내기 시작했다. 이들 작품들은 형식상으로는 남녀간의 사랑이나 승려들의 위선 등을 주된 주제로 하면서, 실제로는 사회의 불합리와 봉건 관료들의 부패상을 폭로하였으며 신분이나 재산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살아보려는 당대 민중들의 염원을 사실적으로 반ud하고 있었다.
심청전이나 춘향전 따위는 이 시기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었다. 이 작품들은 구전설화를 토대로 하여 18세기쯤에 처음 소설로 쓰여졌으나, 그 뒤에도 계속 소위 ‘이야기꾼’들에 의하여 구전되거나 다시 기록되기도 하면서 수많은 이본들을 내었다. 따라서 이들 작품에는 그만큼 이 시기의 민중들의 생활과 감정, 봉건 착취자들에 대한 분노, 인간다운 삶에 대한 염원이 진하게 반영되어 있었다.
황해도의 탈춤, 경기 일원의 별산대와 본산대, 경상도의 오광대놀이 같은 가면극은 이 시기 민중문화의 정화였다. 이 가면극들은 드러내 놓고 양반놈들의 무능, 무위도식, 허위의식 들을 풍자하거나 승려들의 이중생활을 풍자하고 조롱하는 한편, 취발이나 말뚝이 등으로 상징되는 민중들의 건강성과 전투성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가면극은 오래 전부터 궁중의 산대극을 중심으로 그 기법이나 내용이 전승되어 왔으나, 이 시기에 와서는 궁중이 아니라 마을 공터나 장시에서 민중과 함께하는 민중연회로 전화되었다. 또 가면극이 별도로 정착되지 못한 전라도같은 지역에서는 풍물굿의 뒷치배들이 벌이는 뒷굿의 형태로 발전되었다.
판소리 또한 이 시기에 완성된 민중연회의 하나이다. 판소리는 18세기 초엽에 이미 전라도 지방에서 그 선행 형태가 발생하였고 중엽 이후로 활발히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이 판소리는 민요나 잡가를 비롯한 도시가요들의 바탕 위에서 음악적으로 완성되어 갔으며, 가곡, 가사, 시조, 무가 등의 음악 형식들을 종합하여 그 속에 민중적 내용들을 채워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민중예술 속에는 불교적인 세계관이 깊게 깔려 있으며, 동시에 천인이되 민중의 사제 역할을 하던 승려집단에 대한 통렬한 풍자가 전면에 걸쳐 깔려 있다. 이조 후기에 있어 가장 진보적이었던 민중예술에 이처럼 불교적인 내용, 그것도 주로 풍자나 조롱의 내용이 포함된 이유는 매우 역사적이며 동시에 포괄적이기에 현재로서는 충분히 규명하기 어렵다. 여기서는 몇 가지 가능한 이유들을 상정해 봄으로써 앞으로의 작업에 기초로 삼고자 한다.
첫째, 격렬한 사회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의 세계관은 아직 봉건적 지배 이데올로기나 윤리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불교적 세계관, 즉 극락왕생의 내세관이나 권선징악의 윤리관은 대중에게 있어서 아직 벗어날 수 없는 절대적인 관념이었다. 승려들의 이중생활이나 위선에 대해서는 풍자하면서도 불교적인 교의체계에 대신할 다른 관념체계를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종 민중예술은 불교에 대한 표면적인 비난에도 불구하고 불교적 세계관으로 포장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둘째, 승려는 무당이나 사당패 등과 더불어 이조 사회에서 최하층 천민이었다. 승려들은 민중예술을 창작하던 광대들과 쉽게 어울렸으며, 그들의 근거지로 절을 제공하기도 했다. 따라서 승려들의 일상 생활은 그 위선적인 타락상까지도 이들에게 노출될 수밖에 없었으며, 이것은 민중예인들의 좋은 창작 소재가 되었다. 즉 신분은 같은 천인이라도, 다른 한편으로는 민중의 상담자나 사제로서 엄격한 도덕적 가르침을 베풀어야 하는 승려들의 이중생활은 바로 지배권력의 이중성과 수탈을 폭로할 수 있는 매개의 좋은 소재가 되었던 것이다.
민중연희 속에 등장하는 불교나 승려의 모습이 몹시도 계면쩍고 부끄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그것은 등장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역으로, 그것은 바로 불교의 민중적인 친화력을 재는 척도가 될 수도 있다. 이는, 이조 후기의 반봉건투쟁에 있어 사상적으로 지주의 역할을 했고, 또한 무력적으로도 앞장서서 활약했던 하층 승려들의 적극적인 투쟁이 오히려 민중연희 속의 볼썽 사나운 모습, 즉 풍자되고 조롱받고 멸시받던 그 민중적인 친화력에 토대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민중문화와 불교의 관계에 대한 심층적이고 포괄적인 검토가 있기를 기대하면서 이것으로 연재를 마감한다. 그동안의 미흡하고 부족한 글에 자괴를 느끼며 분발을 약속한다. 계속해서 많은 질정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