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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집권제의 장단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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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박경훈 1988년 12월 82호
종단에 있어서 ‘중앙집권제’라고 하는 제도는 종단의 운영에 필요한 모든 제도와 함께 불교의 수행과 성취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집권’이라는 말은 정치권력이나 행정력의 중앙집중을 연상케 하여 상당히 저항감있는 뉘앙스를 준다. 불교라고 하는 독특한 종교단체를 효율적으로 운영해 나가는 데에 있어 독점된 정치 권력이 필요한지, 또는 행정력의 중앙집중을 의미하는 ‘집권’이라든가 ‘중앙집권’이라고 하는 제도가 합당한지에 대해 의심이 가기 때문이다.
말할 것도 없이 종단의 제도는 불교의 본질을 지키고 향상시키는 입장이어야 한다. 불교의 본질을 지키면서 향상시키는 면이 있다면 그것은 그 제도의 장점일 것이며 그렇지 못한 점은 단점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장단점의 배합율에 따라서 우리는 제도의 개혁을 모색하고 탄생하며, 또한 새로운 제도의 도입을 필요로 하기도 한다. 어느 제도이건 완벽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의 완벽한 제도를 구상하기도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또 설령 완벽한 제도가 있다고 해도 그것을 운영하는 사람에 따라 제도의 효과는 달라질 것이므로, 다만 바라는 것은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신장시켜 나가는 가운데 종단을 구성하게 된 본래의 뜻을 충족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한 것은 강력한 중앙집권제도란 독선으로 흐르기 쉽고, 따라서 권위주의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독선과 권위를 쫓다보면 편의주의적 행정을 고집하게 되어 임의적으로 집합한 개인이 소외됨으로써 집권종단을 구성한 본래의 뜻에서 벗어나 목적보다는 수단이 중시되는 ‘행정을 위한 행정제도’로 전락할 위험이 많다는 점이다. 또한, 마음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할 개인의 수행이나 신앙생활이 개인이 속한 집단의 권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개인의 발심이 바탕이 되어 형성된 단체에 의해 규제받는 일이 다반사로 생긴다.
물론, 집단의 권력이 약하다면, 단체를 구성해서 일사 불란하고 강력하게 집합된 힘을 구사하는 데는 매우 큰 약점이 될 수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불교의 본질을 변질시키고 개인의 신행을 희생시키는 힘의 구사는 자칫 교각 살우가 된다는 점이다. 그러한 까닭에 현대에 있어서는 가능한 대로 권력의 분산을 도모하고 있고, 종단에서도 의결기관, 집행기관, 감사기관으로 각각 분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분산된 힘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이제 지금까지의 역사 속에서 시행되어온 제도들을 점검하며 중앙집권제의 장단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조에 이르기까지는 오늘날 행해지는 것과 같은 형태의 중앙집권제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불교를 관리하는 여러 형태의 제도는 존재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신라의 성전(成典) 제도를 불교를 관리하는 하나의 제도로 볼 수도 있을 것이고, 선교양종의 판사직이라든가 도총섭(都據擔)이라고 하는 승직이 그러한 제도의 일단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정부가 불교를 관리하는 입장이며, 불교인 스스로가 신행의 완성과 불교의 종교적 성취를 위해서 만든 제도라고 볼 수는 없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한국불교 전체를 통할하는 제도라고 보기는 더욱 어렵다.
조선시대 말기인 1899년 조정에서 원흥사(元興寺)를 세우고 사사관리세칙(寺社管理細則)을 만들어 시행한 것은 비록 그것이 국가의 관리제도라고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시행된 ‘한국불교를 관리하는 제도’ 였다.
이 관리제도는 서구의 문물이 유입되면서 국가가 그동안 방치해 두었던 불교를 관리할 필요성에서 나온 것이며,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동기가 작용하였다.
하나는 개화(開化)라고 하는 조류를 타고 들어온 군국주의 사상 속에서 군국주의 체제를 정부나 권력 기구가 종교를 관리하는 것을 우리 조정이 배운 것이다. 다른 하나는 관속과 토호들로부터 극심한 수탈을 겪는 사찰이 늘어나고 폐사하는 절이 속출하자 조정에서 이를 막기 위함이었다.
이 때 조정이 전국의 승려와 사찰을 통할하는 제도로 실시한 ‘대법산(大法山)’이 오늘날의 총무원과 같은 기구이다. 조정은 이 대법산을 원흥사에 두고 원흥사를 국내의 수사찰(首寺刹)로 삼았다. 그리고 각 도에는 중법산(中法山)을 두고 도내 수사찰로 삼았다. 당시 도내(道內)수사찰이 된 열여섯 개 사찰 속에 끼지못한 범어사, 선암사, 은파사, 건봉사 등의 사찰이 있었는데, 이들 사찰은 가풍이 뚜렷함에도 불구하고 인접한 대찰로 인하여 수사찰이 되지 못한 것이다. 이렇듯 도내 수사찰이라는 명칭에서부터 한국불교의 법통성(法統性)에 입각해서 세운 제도가 아니라 행정의 편의상 마련한 제도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신행의 완성을 통해 불교의 참뜻을 이 사회에서 성취하고자 하는 불교인의 자발적인 참여로써 구성된 제도가 아니었으므로 한국불교의 전통성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으며, 이러한 점은 이 땅 불교인의 신행의 완성이나 한국불교의 성취에 대해 반드시 있어야 할 관심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사사관리세칙이 발효된 지 이 년 뒤, 이 세칙을 수행하는 정부기관인 사사관리서(寺社管理署)가 폐지되기 전에야 앞의 네 개 사찰이 도내 수사찰이 되고, 이밖에도 고은사 등 열 개 사찰이 도내 수사찰로 지정되었다. 이 서른 개 수사찰은 후에 총독부가 정한 30본산의 모태가 된다. 뒤늦게라도 한국불교의 본사전통이 고려된 것은 다행한 일이라 하겠으며, 이 본사전통이 갖는 신행상의 가풍이 존중되었던 만큼 당시는 비록 정부 주도의 종단 통할기관이라고 해도 중앙집권적 요소와 분권적 요소가 함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통할기관으로서 원흥사에 두었던 사사관리서는 폐지되어 법적 근거가 없어졌으나, 불교인들에 의해서 한국불교의 통할기관으로서 명목을 유지한다. 총독부에 의해 30본산제를 시행하는 사찰령이 발표된 뒤에도 한동안 본사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는 총독부의 의도가 아닌 불교인 스스로가 본사의 가풍과 전통을 중시하여 지킨 것이다.
이후에 본산주지는 총독부에서, 그밖의 대찰은 도지사가 임명권을 갖고 강력히 시행하게 되면서부터 각급 주지들이 임명권자의 안색을 살피게 되었고, 총독부가 바라던 대로 본사의 주지에 의해 본사의 가풍과 전통이 무시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행정 위주의 제도가 전락함을 의미하는 동시에 한국불교의 전통을 말살하여 한국불교를 일본화함으로써 양두구육(羊頭狗肉)의 내선일치(內鮮一致)정책을 펴는 총독부의 마수에 걸려든 것이다.
한국불교의 일본화, 이것이야말로 총독부의 식민종교정책이 가장 노리던 일이었다. 더욱 서글픈 것은 일본불교에의 예속화를 강력히 추진하기 위해 원종종교소(圓宗宗敎所) 라고 하는 한국불교 초유의 통할기관이 탄생한 것이다.
이 기관은 쉰두개 사찰의 주지들이 모여 설립한 것으로 한국의 불교인이 스스로 뜻을 모아서 결성한 통할기관임에 틀림없다. 이에 맞서 탄생한 임제종은 나름대로 통할기관인 종무소를 가졌지만, 한국불교에 있어서 불행한 일은 친일, 즉 일본에 동화하기 위한 기관으로서 중앙집권제를 도입한 통할기관이 탄생했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통탄할 만한 것은 우리의 전통불교를 지키기 위해 탄생한 임제종 종무소가 일제에 의해 좌절되고 만 것이다.
총독부의 사찰령과 사법(寺法) 에 의해 시행된 제도에 대해서 김 영수(金映遂)스님과 이 운허(李耘虛)스님, 두 분의 말씀을 새겨듣는 일은 오늘날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는 중앙집권제나 본산제의 결함을 살피는 데 중요한 관건이 된다고 생각한다.
영수스님은 “본•말시대는 사찰령의 반포로부터 시작되었다. 사찰령 시행규칙에 열거된 서른 개의 사찰이 곧 본사나 본산이라는 명문은 없다. 사찰령은 사찰의 재단법인적인 면을 관리하는 것이지 종교적인 불교 내부 문제에 속하는 본말 관계는 하등 상관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주지의 취임을 인가할 때 그 사찰이 크면 총독부가 작으면 지방 장관이 인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찰령과 시행규칙이 서른 개 사를 서른 개 종파로 만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찰령을 실지로 운영하다보니 서른 개 사찰이 본사로 자처하여 저마다 사법(寺法)을 정하는 한편 이 서른개 사찰 이상의 통할기관이 없으므로 서른 개 본사가 독립종파를 형성하여 본말 제도가 성립된 것이다”라고 하셨다. 또한 운허 스님은 사법에 관하여 ‘총독부 종교과 주임 나미베(波邊)가 일본 승정(僧政)의 예를 참작해서 식민지 통치에 편리하도록 미리 초안하여 각 본산으로 하여금 작성케 하였으므로 각 사법은 그 내용이 똑같았고 다만 소재지, 사찰명, 개창시대(開創時代), 개창자의 이름 등이 다를뿐 조금도 사찰의 특성은 감안될 수 없었다”고 이르셨다.
이같은 사찰령과 사법을 근거로 만들어진 종단의 통할기관이 오늘 우리가 전해 받은 총무원의 전신이라고 할 조선불교 조계종 총무원이며, 이 조계종은 1841년에 총독부로부터 정식으로 인가를 받았다. 그리고 일제의 사찰령이 근거가 되어 불교재산관리법이 제정, 시행됨으로써 종단의 중앙집권제는 더욱 공고해졌다.
지금은 그 불교재산관리법이 폐지되고 전통사찰보존법으로 대치되어 제정, 시행되고 있다. 이같은 현실은 사사관리세칙이나 사찰령, 불교재산관리법으로 이어지는 중앙집권제의 타율적 장치가 없어진것을 의미한다.

중앙집권제의 역사적 고찰을 통해 다음의 것을 정리,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한국불교 특히 조계종의 종풍이나 종풍이 확산되어 형성된 가풍을 말살해온 강력한 중앙집권제는 고려되어야 한다.
둘째, 분권을 고려할 때는 마땅히 본사의 전통성과 가풍의 진작이 따라야 한다.
세째, 종풍을 진작하고 한국불교 내지 종단의 이름으로 사업을 펼칠 수 있는 대표적인 성격의 기관이 중앙에 있어야 한다.
네째, 중앙의 대표기관 장(長)은 종정 혹은 종회가, 본사 주지는 산중공의(山中公議)에서 선출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