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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교단의 성립과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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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권기종 1988년 12월 82호
불교 교단은 인도에서부터 성립되었으나 불교의 전파 지역과 시대에 따라 교단의 형태는 달라졌다. 그 까닭은 교단이 처해 있는 각 나라의 정책과 문화적 배경이 서로 다른 데에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인도에서의 교단의 성립 경위와 그 실태를 살피고 나서 중국과 한국의 교단 사정을 이야기하려 한다.

인도불교의 교단 성립과 그 실태
불교 교단은 부처님에게 귀의한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의 사중(四衆)에 의해서 부처님 당시에 성립되었다. 그러나 불교 교단을 승가 samgha라고 부를 때, ‘승가’와 사중의 ‘중’gana은 같은 의미로 볼 수 없다. 본디 ‘승가’와 ‘중’은 그 어휘만으로는 둘 다 사회학에서 ‘정치학에서의 단체’group라는 의미를 갖지만, 그 내용에서는 서로 다르다. 출가자(비구,비구니)는 일단 집을 떠나야 하고 결혼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업을 버리고 재산을 소유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출가자와 재가불자를 다 포함한 사부대중〔四衆〕은 다같은 부처님의 제자이기는 하지만, 승가라 할 때는 출가자만을 가리킨다.
초기의 출가자 집단인 승가는 일정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유행(遊行) 생활을 하였으나 해마다 유월 중순부터 시작되는 삼 개월 동안의 우기에는 많은 비가 내려 홍수로 하천이 범람하기 때문에 유행생활에 큰 지장을 주었다. 그리하여 그 기간에는 유행을 중단하고 피난처를 구하여 안주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곧 안거vassa이다. 안거 기간이라 하더라도 걸식은 피할 수 없는 것이어서 그 정주지는 도시나 시골에 위치하였다. 이때에 정주지인 주처(住處, arasa)와 원(園, arama) 이 형성되고 이어서 원림(園林, vana) 이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정주지가 처음에는 안거에만 사용되었지만, 그 기간 안에 포살, 자자, 가치나(週編那) 같은 의식이 제정되면서 점차로 반영구적인 주처로 변하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아직 승원(僧院)은 아니고 오직 비구승가로서의 하나의 집단일 뿐이었다. 본디 원(園)은 도시의 중심부나 교외에 있는 공원, 과수원, 화원 들을 이르는 말로서, 그 소유자가 승가에 기증함으로써 승가가 그것을 전용할 때 이를 승원(僧園 ; 僧伽蘫 samgharama)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때에 이 장소에서 법에 대한 토론, 포살, 자자 같은 의식이 거행됨에 따라 집회 장소 uppatthanasala가 건설되고 승원(僧園, lena) 이 형성되었다.
승원에는 정사(精舍, vihara), 평복옥(平覆屋, addayoga), 전루(殿樓, pasada), 루방(樓房, hammiya) , 굴원(窟院, guha)들이 있는데, 정사와 굴원이 주된 주처가 되면서부터 정사는 비구들이 거주하는 대건축군이 되었으며 이로써 조직화된 승가 생활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단체생활을 위하여 계와 율이 체계적으로 조직되긴 하였으나, 부처님이 입멸하기 전에 승단을 이끌어갈 후계자를 지목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단을 통제할 만한 절대 권위가 존재하지 못했다. 그로 말미암아 동일한 승가 안에 두 개의 승가가 존재하는 것에 대한 논쟁이 원인이 되어 마침내 분파의 문제가 야기되었다. 그리하여 승가의 화합을 유지하기 위한 승가갈마 samgha-kamma가 필요하게 되었고, 그것에 의해 승가의 의사 결정 및 재판이 운영되었다. 이때부터 비구승가와 비구니승가가 별립(別立)되고, 승가회의에 의한 자치적 운영이 이루어지면서 승가회의의 구성 인원이 적어도 네 명에서 열 명(변방 다섯 명) 이상이어야 한다는 원칙이 생겼다. 또 소유재산에 대해서는 그것을 사방승물(四方僧物)로 하여 사방승의 소유가 되었고, 이에 따라 현전승가(現前僧伽)와 사방승가가 구별되게 되었다.
이러한 원시교단에는 경험이 많고 연륜이 오랜 비구를 장로(長老)라고 불렀을 뿐 특별한 법계는 없었다. 그리고 재산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것은 비구가 아닌 정인(爭人,aramika) 이 하였으며, 사정인주(使淨人主, aramika-pesaka)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에 대승불교라는 새로운 불교운동이 재가자(在家者) 사이에서 일어났으며, 이들은 자칭 보살이라고 하였다. 보살은 다시 출가보살과 재가보살로 나뉘어 전문적인 출가보살들은 원시(또는 부파)교단의 규범과 체제를 도입하여 계를 확립하지만, 교단의 성립에 대해서는 뚜렷한 자료가 없다. 무엇보다도 인도불교의 교단이 중국의 교단의 크게 다른 점은 국가 통치의 밖에서 독자적으로 존립하여 교단 스스로가 자율적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추진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중국의 불교 교단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불멸로부터 오백여 년 뒤인 기원초이다. 이때는 이미 인도에서 원시불교가 부파불교시대를 거쳐 대승과 소승이 나뉜 뒤이다. 그러나 불교 전래 초기의 중국인들에게는 대승, 소승의 구별없이 정전들이 한역되었다. 이 무렵 중국불교의 전수자는 중국의 일반인이 아니라 통치자인 왕이었으며 또 정부 그 자체였다. 따라서 중국불교는 전래 초기부터 독립된 교단의 자치적 운영을 상실한 채 국가 정책에 의해서 관리되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인도불교의 초국가적인 체제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여산(盧山) 혜원(慧遠)이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을 저술하여 불법이 왕법의 밖에 있음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대와는 관계없이 국가는 불교 교단의 관리를 위한 승관제도(僧官制度)를 행하였다. 북위(北魏)의 태조는 황시년중(396-397)에 도인통(道人統)이라는 승관에 명하여 법과(法果)를 관장하게 했고, 홍시 7년(405)에는 승략(僧慢)을 승정(僧正)에, 승천(僧遷)을 열중(悅衆)에, 그리고 법흠(法欽)과 혜빈(慧斌)을 승록(僧錄)에 임명했다. 승관은 이렇듯 그 명청은 시대나 왕조에 따라 달랐지만 계속하여 시행되었으며, 이들 승관에게는 관급과 함께 수레와 노비도 주어졌다.
중국 역사에서 강력한 통일국가였던 수나라에 이르러서는 막강한 통치력에 의해 국가행사로서 불사(佛事)가 거행되고 또 오중(五衆), 이십오중(二十五衆) 따위의, 불교학 학파의 성격을 띤 전공 분야가 구분, 설치되기도 하였다. 수의 뒤를 이은 당나라는 주립관사(州立官寺)와 내도량(內道場)을 설치하고, 국립관사에 명하여 성절(聖節), 국기일(國忌日) 등에는 대대적인 불사를 거행하게 하였으며 모든 비용은 국비에서 부담하였다. 이러한 지원과 더불어 철저한 통제를 가하였으니 승니 부적(簿籍)과 도첩, 계첩 등을 철저하게 관리하였다. 곧 승니의 정수를 제한하고, 시주도승제(試住度僧制)를 실시하였으며, 모든 승니는 득도(得度)의 승려증〔憑由〕을 갖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상서성 사부(祠部)에서 교부한 사부첩이다. 또 승니들의 범법도 국가법으로 다스렸으며, 심지어는 공덕사(功德使)라는 관
직을 두어 절을 짓고 탑을 세우는 일을 총괄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수•당시대에 성립한 각 종파들은 독립된 교단으로서의 종(宗)이 아니라 학파로서의 성격을 띤 종파였다.
국가에 의한 불교 통제는 그 뒤에까지 이어져 송, 금, 원, 명, 청에 이르기까지 그 제도의 차이는 다소 있었지만 불교 교단은 계속해서 나라의 통제와 관장하에 있었다.

우리나라의 불교 교단
신라 선덕여왕은 643년에 자장을 대국통에 임명하여 승계를 관장하게 하였고, 그 뒤에도 많은 승관을 두어 왔다. 승관에는 속관(往官)도 있었는데 중요한 사원에는 성전(成典)이라는 속관을 두어 사원을 관리하고 운영하게 하였다.
고려왕조 또한 불교를 높이 숭상하였지만 불교 교단에 대한 철저한 통제와 관리를 행사하여, 교단은 자율적 운영을 이룰 수 없었다.
나라에서는 출가자의 나이를 15세로 정하고, 네 자녀를 가진 자가 한 자녀를 출가시킬 수 있다는 것을 비롯한 제규정과 법계(法階) 및 승과제도를 확립하고, 승록사(僧錄司)라는 관부를 두어 교단과 불사를 관장하였다. 사원의 직제는 자체 조직에 따랐지만, 주지는 나라가 인정하는 자격을 가진 자가 종파의 추천에 의해 전보되었으리라고 짐작한다. 이같은 인사제도에는 뇌물(賂物)에 의한 부작용도 있었다. 충선왕은 즉위교서에 사사(寺社)의 주지를 맡기는 공의(共議)가 모두 뇌물로써 이루어지므로 이를 금지하는 명을 내리기도 하였다.
고려 후대에 이르러 어느 정도 국가의 간섭이 줄어들고 상대적으로 승관에게 많은 권한이 주어졌으나, 이에 따라 종파 사이의 새로운 대립이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조선조로 이어진 불교는 태종, 세종, 성종, 연산군, 중종 등을 내려오면서 계속적인 배불정책으로 억압의 시대를 맞이했다. 태종은 사원과 노비의 수를 대폭 삭감
하고 속전(續田)을 제한하였으며 종파를 임의로 폐합하여 11종이 7종이 되었다. 또 세종은 1424년에 승록사를 폐지하고 종파를 폐합하여 7종을 다시 2종으로 하고, 흥천사(興天寺)를 선종도회소(禪宗都會所)로, 흥덕사(興德寺)를 교종도회소(敎宗都會所)로 삼았으며, 사원의 권한을 크게 줄였다. 태종이 전국 242개 사원으로 감축한 것을 세종은 다시 36개 사원으로 줄이고, 이어 승니의 성내 출입을 금하고 연소자의 출가를 금하였다. 이리하여 사원의 재산과 전답과 토지 및 노비가 크게 줄어들었다.
연산군은 삼각산의 절들을 불태우고 성내의 비구니 사찰을 헐었을 뿐더러 비구니승을 환속시켜 궁방의 비(婢) 또는 관비로 삼았으며, 사사의 토지를 관부에서 몰수하였다. 승과제도도 폐지되고 양종의 본사도 없애버렸다. 한편 중종은 금불상을 녹여 군장비를 만들고 원각사를 헐어 재목으로 사용하였으니, 그 혹독함은 말로 다할 수가 없었다.
그 뒤에 문정왕후 때에 이르러 잠시 승과가 부활되고 봉은사와 봉선사에 각각 선종본사와 교종본사를 두었으나 오래가지 못하였다. 따라서 선교양종(禪敎兩宗)이라고는 하지만 종지(宗旨)나 종파로서의 특징은 갖지 못하였다. 이같은 상황에서 불교 교단은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을 뿐이며, 교단의 통일된 정책이나 통제가 없이 각 사원은 저마다의 여건에 맞추어 운영되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도불교를 제외한 중국과 한국에서의 불교 교단은 전적으로 국가의 정책에 의해 그 방향이 결정되었을 뿐, 독자적인 운영과 관리는 이루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의 경우, 비록 조선시대에 와서 국가와 결별하게 지만, 억압과 제약을 받았기 때문에 자립 교단으로서의 충분한 자생력을 갖지 못했다. 곧, 불교 교단은 국가의 통제 하에서는 승관제도에 의한 중앙집권제가 유지되었으나, 그렇지도 못한 시대에는, 조직적인 체제에 의한 일사불란한 교단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다만 각 사찰중심으로 사찰이 운영되었을 뿐이었으므로 실제로 교단은 유명무실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