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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주경(阿摩晝經) 하(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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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해설 - 무관 1988년 12월 82호
이 세상의 모든 것에는 반드시 길이었다. 짐승에게는 짐승의 길이 있고 사람에게는 사람의 길이 있기 마련이다. 길이란 도(道)요 진리요 원칙이다.
장사하는 이에게는 상도라는 길이 있고 예술가에게는 예도라는 길이 있다. 이처럼 만사에는 다 길이 있다. 또한 길이있는 곳에 밝음이 있고 밝음이 있는 곳을 정도(正道)라고 한다. 정도는 옳은 길이다. 옳은 길은 우리가 나아갈 곳이요 어둠의 길은 반드시 피해야 할 곳이다. 어둠은 암흑의 골짜기로서 앞뒤와 좌우를 구분할 수 없는 곳이다. 그러므로 어두움 속을 방황할 때 행복과 안온은 얻을 수 없다. 진리의 밝음앞에 설 때, 정의의 옳은 길에 나설 때, 우리는 마음에 행복과 평화와 안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죄의 그늘이나 악의 어두움 속에서 행복한 사람을 우리는 일찍이 보지 못하였다. 우리는 밝음을 원하며 옳음을 바란다. 밝은 마음과 밝은 가정과 밝은 사회와 밝은 인류를 바라는 것이다. 어두움을 미워하고 밝음을 찾는 것은 사람의 공통된 의지요 근본 염원이다. 뜻이 있는 곳에 반드시 길이 열린다. 열린 길은 밝은 곳이요 어두운 길은 닫힌 길이다. 열린 길을 위하여 관심을 가질 일이다. 자나깨나 그 길을 골똘하게 생각할 때 광명의 빛을 보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못을 세우는 것은 인생의 목적을 세우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원력(願力)을 세우라고 말한다. 무엇이나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뜻을 세우는 것은 인생의 목적을 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밝고 옳은 뜻이라야 한다. 만약 뜻이라 하더라도 세계에서 제일가는 깡패나 도둑이 되겠다고 하면 그 뜻은 크긴 하나 바르고 밝은 뜻이 못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옳은 뜻을 세워야 한다. 바른 믿음과 바른 수행이 강조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바른 입지(立志)를 대원(大願)이라 한다. 과거의 수많은 불보살이 이 대원을 성취하여 과위(果位)에 오른 것이다. 우리의 믿음이 한 목표를 향하여 집중되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다. 석가세존도 큰 뜻을 세우셨다. 뜻이 없는 인생은 목적지가 없는 항해와 같다. 언제나 떠도는 신세를 면치 못하며, 불안과 공포와 번민이 있을 뿐이다. 그와 달리 목표가 있는 삶은 행복과 안온과 평화가 있다. 먼저 바르고 밝은 원을 세우면 반드시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과 길이 생긴다.
어떤 것을 일심이라 하는가. 성계(聖械)를 구족하여 깨끗한 모든 근(根)을 얻은 비구는 어지러움이 없이 혹은 걸어다니거나 드나들거나 좌우를 돌아보거나 몸을 굽혔다 펴거나 위를 쳐다보고 밑을 내려다보거나 옷을 입거나 바루를 가지고 음식을 받거나 대소변을 보거나 잠자거나 깨거나 앉거나 서거나 말하거나 잠자고 있는 일체의 때에 있어서 항상 생각하여 위의(威儀)를 잃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일심이라 한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대중과 함께 갈 때에 혹은 앞에서 가고 혹은 가운데나 뒤에 있어서 항상 안온함을 얻어 두려움이 없는 것과 같다. 또 사람이 오랫동안 병을 앓다가 나아서 음식이 소화도 잘되고 원기도 완전히 회복되었을 때 그 스스로 생각하여 다시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어 크게 기뻐하는 것과 같다. 또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감옥에 갇혔다가 무사히 옥에서 나왔을 때, 그 스스로 구속에서 벗어나 다시는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이 크게 기뻐하는 것과 같다. 또 어떤 사람이 많은 재보를 가지고 큰 광야를 지날 때 도둑을 만나는 일이 없이 안온히 지나서 그 스스로 다시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이 크게 기뻐하면서 그 마음이 안락한 것과 같다.

세상에서 원력의 힘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양 정모 선수는 꼭 영광의 승리를 하고야 말겠다는 간절한 원을 세우고 부처님께 일천배의 절을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승리의 영광을 차지했다. 이번 이십사회 올림픽에서도 불자들의 영광된 승리의 모습을 빼놓을 수 없다. 금메달을 딴 레슬링의 김 영남과 유도의 김 재엽과 이 경근, 은메달을 딴 사격의 차 영철과 역도의 전 병관 그리고 레슬링의 김성문, 또 동메달을 딴 체조의 박 종훈과 레슬링의 김 상규와 이 재석 그리고 안 대현 등은 모두가 간절한 소원으로 도중에 포기함이 없이 쉬지 않고 일심으로 노력하여 좋은 결과를 얻은 것이다.

사람이 모여 사는 이 사회는 인체의 각 기관과 같이 모든 분야가 원활하게 움직여야 한다. 그 목적은 사실상 인간의 삶을 보다 풍요하게 만들어 주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그 각기관들이 자신의 독립성을 지나치게 고집하면서부터는 사람을 위해 있어야 할 그 기관들이 오히려 사람을 억압하고 사람의 삶을 방해하는 쪽으로 발전하고 확대하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 각 기관들의 목적과 이익만이 중요시되고 본래의 목적인 사람의 삶의 문제는 뒷자리로 물러나버리게 되었다. 물론 각 기관이 원활히 움직여야 인체가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조화와 협력의 관계가 문제이다. 만약 그 관계가 무너지는 경우에는 인간의 삶은 보편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의 삶이 바로 그렇다. 거대하게 부풀어오른 허영심리는 자신의 처지를 살피지 않은 채 현란한 빛을 좇아 방황하고, 화려한 목적에 의해 세워진 모든 문화 기관들은 사람보다는 그 기관의 성공적인 운영에 더 관심을 둠으로써 사람의 내적인 정신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종교 단체 또한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천국과 성자들을 위해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실정이다.
그럼 오늘의 불교는 어떠한가. 불교 본래의 의미는 석가세존이 출가함으로부터 사람의 정신생활을 도와주고 삶의 실상을 올바르게 보도록 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마치 폐쇄적인 성벽 속에 들어앉아 암호문자를 풀어가고 있는 듯한 것이 불교의 모습은 아닌가. 이러한 암호문자는 그것을 해독할 수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통하게 된다. 평범한 사람들이 암호를 이해하려면 특수한 가르침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특수한 가르침을 통해야만 불교를 알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종교는 보편성을 지녀야 한다. 그리고 불교의 믿음과 실천의 행위도 그 보편적인 삶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져야 함은 물론이다. 보편성이란 창조적인 능력이나 경제적인 재화를 똑같이 분배해서 살자는 것이 아니다. 삶의 보편성이란 먹고 자고 생각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차원을 지칭하는 문제이다. 이는 사람이 사람다운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정신과 육체의 모든 타당한 의미를 바로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멀리 극락세계를 상상하기보다는 우리 주위의 기본적인 것들을 바로 알아야 삶이 보편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은 인간의 길에서 요청되는 것이,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나 죄의 용서 또는 은총의 갈구가 아니라, 자기를 확립하고 실현하면서 거기에서 궁극의 자유와 안온을 발견하는 일임을 가르치신 것이다. 인간의 길이란 인간 스스로가 자기 형성의 길이라는 뜻이며, 부처님도 그러한 길을 스스로 보여 주셨다. “성계(聖戒)를 구족하여 깨끗한 모든 근(根)을 얻어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 성계란 바른 윤리를 말한다. 올바른 삶이 정도라 한다면 바른 윤리는 올바른 삶을 위한 방편인 것이다. 그 성계를 얻기 위하여 일체의 때에 위의를 잃지 않는 것이고 이를 일심이라 한다고 하신 것이다.
사람의 삶은 어떠한 목적의 수단으로도 전락되어서는 안된다. 지극히 순수하고 아무리 타당한 듯 보이는 주장이라도, 모든 종교와 사회의 제도가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고 기여하기 위한 것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리 새로운 주의나 주장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현실과 불교 사이에 괴리가 있음에도 이를 제대로 된 믿음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 지구상에 인간이 없어지지 않는 한 인간의 삶의 문제에 기여하지 않는다면 불교는 지탄받게 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다른 경에서 “이것이 생김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없다”고 하셨다.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것, 영원한 것, 무조건적인 것을 용납할 수가 없다. 절대자란 다른 것들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그 자신만으로 존재하며, 조금도 남에 의해 제약받지 않는 존재를 말한다. 불교의 존재론은 상의성에 의해 확립되어 있으므로 무신론적이고 상대주의적이며 또한 현실주의에 귀결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를 잘못 이해하여 숙명론적이라고 기계적으로 해석을 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사람은 살아가다가 필경에는 늙고 죽음에 이른다. “늙고 죽음은 무엇이 있기 때문인가” 하는 존재론적 물음에 대한 답변이었다. 이것을 때로 연기론이라고 하기도 한다. 부처님이 “깨달은 사람”이라고 한 것은 연기론이 객관적인 서술에 그치지 않고 주체적이고 실천적으로 그 논리가 극복된 차원에서 한 말이다.
인간의 삶이 지닌 괴로움이란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원인이 있다는 자각을 연기의 사상으로 집약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苦)는 현상학적인 삶의 실재이고, 연기론은 그 실재가 지니고 있는 구조의 의미라고 이해해야 한다.
욕(欲)을 더러운 때라 하고 상루(上漏)를 환(愚)이라 하고 출요(出要)를 최상이라 하시고 청정을 펴시며 말씀하셨다. 모든 부처님의 떳떳한 법과 같이 고성제(苦聖諦)와 고집성제(苦葉聖諦) 고멸성제(苦滅聖諦)와 고출요성제(苦出要聖諦)를 말씀하셨다. 어느 바라문은 곧 그 자리에서 허물과 때를 멀리 여의고 법눈의 깨끗함을 얻었다. 그것은 마치 정결한 흰 천이 물감을 쉽게 받아들여 물드는 것과 같았다.

배가 고픈 것은 괴롭다. 질병에 의하여 건강을 앓고, 죽음에 의하여 생명을 잃는 것도 괴롭다. 언젠가는 늙어서 결국 죽지 않을 수 없는 괴로움, 이것은 삶의 가능성이 한계 상황속에서 쇠잔해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과, 그 주체가 바로 자신이며 이것이 삶의 유일한 내용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생긴다. 그리고 이 괴로움을 극복할 수 있음은 “이것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없다”는 것으로부터 비롯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