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에서 12세기 후반기에 있었던 무선 정권의 대두와 그 이후 원나라의 침략과 지배로 말미암아 고려사회 전체는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다. 따라서 고려 사회의 사명적 지반이었던 불교 역시 이러한 사회와 변화에 따라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이미 지난 호에서 법상종과 문벌 세력이며 왕실의 외척이었던 인주 이씨의 유착에서 일어난 암적인 여러가지 문제점을 경험한 대각국사와 왕실은 그 이후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그 왕권 강화에 부응한 일련의 노력은 속장경의 조판과 천태종의 개창(開創)으로 나타냈음을 살핀 바 있다. 그리고 천태종의 개창은 새로운 기미를 보이고 있던 선종과 교종의 이론적 분열을 통합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또한 광종대의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신비와 이적을 강조하며 화엄종의 주류를 이루어왔던 균여 계열의 화엄사상에 새로운 사상적 비판을 가함으로써 균여 계열의 화엄사상에 대하여 학구적이며 교학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학문의 토대를 이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의천이 이처럼 불교 세력이 문벌 귀족과 결탁된 데 대한 자각을 일째우기도 했지만 의천이 주도했던 불교의 성격 자체가 개경 중심적이며 김 부식 등을 비롯한 문벌을 중심으로 하였으므로 의천의 사후에는 불교와 문벌 귀족과의 결탁이 다시 심화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서기 1170년 정 중부(鄭仲夫)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무신의 난은 지금까지의 보수적인 문벌 귀족 체제에 대한 불만과 부정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사건이었다. 서기 1196년 최 충헌이 나타나 무신 정권이 고려 사회에 확고한 뿌리를 내리려 하자 기존의 문벌 귀족들과 화엄종과 법상종같은 교종 세력은 함께 무신 정권에 대해 항쟁하였는데 그로써 무선 정권 이후 교종은 문벌 귀족 세력과 함께 침체의 국면을 맞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최 충헌에 의한 교종의 탄압은 곧 선종 중심으로의 불교 개편을 의미하기도 했다. 최 충헌이 보조국사의 정혜결사에 관심을 보여 1204년에 수선사(修禪社)라는 사액을 내렸으며 그의 아들을 선종 계통의 사원에 출가시킨 점 등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상당히 선종과는 밀착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최 우(崔瑀)가 등장한 l219년 이후에는 선종 일변도로 밀착되어 있던 균여 계통의 화엄종에 대하여 그 태도를 완화하였는데, 그 당시 화엄종의 승려인 천기(天其)는 고종판대장경을 각판하면서 교장별록(敎藏別錄) 30권을 쓰는 등의 활약을 하였음이 최 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에 밝혀 있다. 특히 그는 그 무렵까지 의천 계열의 화엄사상에 의해서 소외되었던 균여의 저술인 석화엄지귀장원통초(釋華嚴旨歸章圓通訬)와 일승법계도원통기(-乘法界圖圓通記) 등을 판각하면서 발문(跋文)을 썼는데, 그 발문에는 그가 화엄종의 승통이었음과 흥왕사, 흥교사, 해인사, 반용사(盤龍寺), 동천사(東泉寺) 등에서 활약했음이 밝혀 있으므로 이를 통해서 지금부터 살펴보아야 할 각해대사와도 그 종맥이 닿아 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14세기 전반기의 화엄불교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체원스님의 생몰 연대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으며, 그의 생애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있을 만한 자료가 없다. 다만 극히 제한된 그의 저술을 통하여 그의 생애를 유추할뿐이며 겨우 최근에 와서야 사학계의 학자들에 의해서 부분적인 자료만이 밝혀지고 있는 실정이다.
스님에 대한 단편적인 자료가 실려 있는 동문선(東文選)권(卷) 84에도 최해(崔瀣)가 쓴 송반룡여대사서(送盤龍如大師序)가 있는데 이를 살펴보면, 스님의 법명은 체원(體元)이며, 법호는 목암(木巖) 또는 향여(向如)라고도 했으며, 각해(覺海)는 그의 익호(益號)였음이 나와 있다.
스님은 본관이 경주이며, 그의 가계(家系)는 향리였다. 그의 부친은 문신 관료층으로서 한때 입사(入仕)하기도 했던 이 진(李瑱, 1244-1326)이었고 그의 동생은 고려 말의 유명한 문장가이며 외교가였던 익재(益짧) 이 제현(李齊賢,1278-1367)이었다. 그러므로 스님의 출생 연대를 이 제현의 출생 연대보다는 삼 사년 전인 것으로 대략 파악할 수 있겠다.
스님이 출가한 나이는 대채로 스무살 전후였으며, 출가한 동기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승려생활도 원만하고 선부상(選佛場)에서도 좋은 성적을 얻어, 일찍부터 중요한 주지직을 역임하였으며, 한때 충선왕의 총애를 받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스님은 천성이 착하여 출가한 이후에도 형제간에 우애가 있었으며, 노부모를 봉양하느라 주지직을 사임하는 등 효성이 지극했음을 동문선은 전하고 있다.
체원스님에 대한 또다른 자료는 현재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사경본(寫經本) 화엄경으로서 붉은 종이에 은자(銀字)로 쓰여 있는데, 그 가운데 권(卷) 21에는 스님의 발문(跋文)이 포함되어 있어서 이 화엄경은 당시의 화엄종의 상황과 아울러 스님에 대한 행적을 살필 수 있는 단편적이나마 중요한 자료이다. 이 사경 화엄경의 조성 연대는 1338년 충숙왕 7년으로 스님의 말년에 해당하는 해인데, 이 발문에 의하면 스님은 반용사를 중심으로 화엄경의 사경을 주도했으며 양가도승통(兩街都曾統)이라는 직책에 있기도 했다.
스님의 저술로는 현재 해인사의 사간장(寺刊藏)과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백화도량발원문약해(百花道場發願文略解)와 화엄경관자재보살소설법문별행소(華嚴經觀自在菩薩所說法門別行疏)와 화엄경관음지식품(華嚴經觀音知識品) 등이 있는데, 이들은 그 제목이 그러하듯 자신의 독창적인 저술은 아니고 선인(先人)들의 저술에 대한 주해(注解)로서 주로 관음 신앙과 결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화엄종에서의 관음신앙은, 화엄종의 여명기인 화엄초조 의상대사가 지은 「백화도량발원문」의 내용에도 나타나며, 의상대사가 스스로 관음보살에 대한 지극한 신앙을 실천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적은 삼국유사에도 나오는데, 우리나라 관음도량의 성지인 낙산사와 홍연암 등에 얽힌 이야기로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의상의 뒤를 이은 균여와 천기의 화엄종은 신앙을 중심으로 하면서 신비적이며 영험적인 것을 중시했는데, 특히 14세기 초에 체원에게서 이러한 점이 강조된 데에는 여러 가지 사회적인 요인이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12세기에 무신 정권으로 인하여 사회가 불안했던 데 이어 13세기에는 몽고의 침략으로 민심이 극도로 피폐했을 때, 불력(佛力)으로 침략군을 물리치려 했던 왕실과 민중은 고려대장경을 각판했으며, 이처럼 신앙의 힘으로 뭉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민중과 가장 가까운 관세음 신앙으로 전환함으로써 어떤 활로(活路)를 찾으려고 했을 것이다. 그의 저술들은 이러한 민중의 신앙적 요구에따라 화엄경 속에서도 관세음보살에 대한 신앙적 실천과 영험을 강조한 점이 특이하다. 그런데 영험과 감응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현세 기복적이며 타력 신앙적(他力信仰的)이며 다분히 주술적인 민간 신앙과 결합하는 등 그 이후 불모철학의 근본적인 자세를 잃어서 이전의 화엄종과 비교할 때, 오히려 사회적인 기능상 한 단계, 퇴보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뭏든 체원의 이러한 신앙적 측면과 노력은 14세기 전반기 고려 말의 신앙적인 단면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글에서는 이를 통하여 주로 해인사를 중심으로 반용사, 법수사, 동천사, 등 경상도의 일원에서 펼쳐졌던 화엄불교의 모습을 단편적으로나마 살펴 보았다.
화엄불교의 맥락은 사실상 14세기 체원스님으로 일단락 된다. 이는 이후의 불교가 조선시대의 숭유억불 정책에 의해 된서리를 맞았으며, 조선 시대 이후의 해인사는 사실상 화엄종의 계보가 끊어졌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 글을 쓰는 데는 부산 대학교 채 상식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서울대, 1987)에서 많은 자료를 인용하였음을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