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됨의 어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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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윤구병
1988년 12월 82호
석가모니가 정말 성불하셨을까요? “그야 두말 할 나위가 있나, 부처를 이루었기에 우리는 부처님이라는 일반명사를 고유명사로까지 끌어올려 석가모니를 부처님이라고 곧바로 일컫는 것이 아닌가?”하고 반문하실 분이 백에 아흔아홉은 될 것입니다. 아니, 그런 질문을 한 사람의 정신 상태에 대해서 의심하는 사람이 대부분이겠지요.
꽤 오래 전부터 저에게는 석가모니의 행적이 수수께끼처럼 여겨졌읍니다. “몰록 깨우쳐서 성불을 했으면 혼자서 열반의 경지에서 노닐 것이지, 왜 누더기를 걸치고 동냥그릇을 들고 저자거리로 기어나와, 기어나오기는.” 대자대비하신 마음으로 그러셨을 거라고요? 그러면 그 대자대비하신 마음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무엇이 석가모니를 대자대비하지 않을 수 없도록 몰아갔을까요? 우리는 비슷한 질문을 소크라테스의 행적에 대해서도, 예수의 삶에 대해서도 할 수 있읍니다.
우리는 석가모니가 대궐에서 나와 설산에서 고행을 하고 여섯 해 동안 보리수 밑에서 꼼짝 않고 앉아 있던 끝에 깨우침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한 개인의 수행과 득도의 과정으로만 이해하기 쉽습니다. 여기에서 개인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이름일까요? 그것은 낱낱의 사람, 곧 원자로서 고립되고 다른 아무와도 연관이 없는 독립된 인간을 가리킵니다. 말하자면 사회적 원자라고 할 수 있지요. 실제로 개인을 나타내는 서양 말 ‘인디비두알’(individual)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것’(in+dividuum) 이라는 라틴어에서 나왔읍니다. 이 세상 어떤 것도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것의 모습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원자는 다른 원자와 뭉쳐 하나가 될 수도 없고, 쪼개져서 둘이 될 수도 없읍니다. 한 원자와 다른 원자 사이에는 충돌과 반동이라는 작용과 반작용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과연 석가모니가 이런 사회적 원자였을까요?
석가가 임금인 아버지와 왕비인 어머니라는 사회적 관계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잠깐 잊기로 하지요. 석가의 몸을 이루고 있는 피와 살이 석가가 먹고 마신 음식에서 전화된 것이라는 사실도 제쳐둡시다. 석가의 탄생과 그 뒤의 생활이 결코 자연과 사회로부터 고립된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는 우선 눈을 감자는 이야기입니다. 석가의 지혜는 어떨까요? 가없다고 일컬어지는 그 슬기로움은 어느날 하늘에서 석가에게 떨어진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슬기로움은 수행의 결과로 얻어진 것입니다. 수행은 몸으로, 마음으로 배우는 과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석가는 바라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읍니다. 사서 한 몸고생을 통해서도 많은 것을 얻었읍니다. 석가의 슬기로움은 이렇게 오랜 배움을 통해서 축적된 앎이 석가의 몸과 마음을 통하여 질적인 변화를 일으켜 생긴 것이지, 태어나면서부터 지니고 있던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어쩌면 석가를 깎아내리는 것으로 오해받을지도 모르는 말을 제가 이 자리에서 하는 까닭이 있읍니다. 그것을 깨우치신 뒤로 중생들을 건지기 위해 입에 단내가 나도록 많은 말씀을 하실 수밖에 없었던 석가의 행적의 필연성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석가는 당신이 깨우친 경지를 중생들에게 일러주지 않고는 한순간도 견디지 못했읍니다. 일러주어 중생들도 자기처럼 깨우침에 이르게 하지않고는 삶의 보람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내 시험답안을 옆에 앉은 동무가 보고 그대로 써서 나와 비슷한 성적이 나오거나 더 좋은 성적이 나오면 어쩌나 싶어 온몸으로 시험지를 가리고 답안을 작성하는 시대에 태어나고자란 우리에게는 납득이 가는 생각도 아니고 행적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니까 부처님이지. 부처님은 본디 대자대비심을 천성으로 타고난 분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골치 아프게 따지긴 왜 따져”하며 얼버무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석가에게는 중생구제에 대한 타는 목마름이 있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보리수 아래서 커다란 깨우침을 얻었지만, 그 깨우침은 시작일 뿐이었읍니다. 당신의 몸과 마음을 어지럽히는 자질구레한 욕구는 쉽사리 잠재울 수 있게 되었지만, 그 대신에 그런 하잘것 없는 욕구와는 견줄 수 없는 엄청난 새 욕구가 생겼읍니다. 욕구는 결핍의 산물입니다. 무엇인가를 바란다는 것은 그 무엇인가에 대해 아쉬움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그리워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내 곁에, 나와 함께 있는 사람을 내가 그리워하는 일은 없읍니다. 곁에 없으니까, 손에 닿지 않은 곳에 있으니까 아쉬워지고, 이 아쉬움이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낳습니다.
석가는 깨우친 순간 중생에 대한 미칠 듯한 그리움에 사로잡혔읍니다. 따라서 보리수 아래에서 깨우친 것은 참으로 깨우친 것은 아니었읍니다. 그것이 깨우침이었다면 이제까지는 혼자서도 살 수 있을 줄로만 생각했는데 이제부터는 죽어도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깨우침이었읍니다. 사랑이란 궁극적으로 ‘너 없이는 못 살아“라는 느낌입니다. 출가하기 전의 석가는 중생을 사랑하지 않았읍니다. 그러니까 중생으로부터 떠나 산속으로 들어갈 생각을 한 것입니다. “너 없이는 못 살지만, 널 위해서 널 떠난다”고요? 그런 것은 유행가 가사에나 나오는 신파요, 사기입니다. 정말 사량에 빠진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날 수가 없읍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는 경우가 하나 있기는 합니다. 그것은 자기 지신을 더 사랑하는 경우입니다. 보리수 아래서 가부좌를 풀기 전까지의 석가의 의식을 온통 다 지배한 것은 바로 지극한 자기 사랑이었읍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 (天上天下唯我獨存)‘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이때까지 석가가 알고 있었던 것은 ‘이 세상에 오직 나만 있다’는 원자론적인 개인관이었읍니다. 그런데 석가는 이 말이 지닌 두번째 뜻을 모진 고행 끝에 비로소 깨우친 것입니다;
‘천상천하유하독존’ -그래, “세상에 나 아닌 것이 없구나.’ 이제까지는 이 살갗 속에 갇혀 있는 내 몸뚱이가, 무명(無明)에 끄달리는 두서없는 정신이 나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나는 세상에서 가장 좁은 감옥 곧 내 살갗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어 나 넓은지를 몰랐구나. 나 깊은 줄을 몰랐구나. 나 높은 것도 몰랐구나.” 석가가 작은 자기 사랑에서 큰 차기 사랑으로 옮아간 뒤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는 비교적 잘 알고 있읍니다. 이세상에 나 아닌 것이 없는데, 그 나 가운데 아직도 나만 알고 있는 작은 나가 있다면, 큰 나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큰 나가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은 하나밖에 없읍니다. 그 작은 나로 하여금 ‘내가 너고 네가 나다’라는 사실을 깨우쳐, 나됨이 뿔뿔이 낱낱으로 흩어져 서로가 서로에게 등 돌리는 일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게 마음 먹기에 달렸어(一切唯心造)’-이 말을 석가 당신께서 직접하셨는지, 뒷사람들 중 누가 뇌까려놓고는 석가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 둘러댔는지는 모르지만, 이 말이 관념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뜻이라면 틀린 말입니다. 이 세상에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이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로 석가가 노린 것은 중생들의 의식의 변화입니다. 그것도 자질구레한 변화가 아니라 혁명적 변혁입니다. 지독한 계급사회였던 그 무렵의 인도에서 최하층 천민과 노비계급인 수드라에게 “어디 부처가 따로 있는 줄 알아, 당신이 바로 부처여” 하고 부추기는 것은 그들을 브라만 계급에 맞서 일어서게 하는 혁명의 메시지입니다. 그때에 브라만 계급은 자기들만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믿었으므로. 그리고 브라만에게 “어디 부처가 따로 있는 줄 알아, 깨우치면 부처여” 하고 윽박지르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수드라와 어깨를 나란히하게 하는 자기 변혁의 메시지입니다. 브라만을 수드라와 나란히 세우는 길은 브라만으로 하여금 지닌 것을 모두 이웃에게 돌리고 누더기 차림에 쪽박을 들도록 하는 수밖에 없었으므로.
아뭏든 석가는 “이 세상에 나 아닌 것이 없구나” 하고 깨우침으로써, 부처를 이루는 것이 ‘지금’ ‘여기에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긴 역사적 과정 끝에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읍니다; 그렇다고 해서 석가가 부처되기를 포기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포기하다니요? 석가는 살아 생전에 자기가 부처를 이룰 수 있으리라고 믿었읍니다. 그래서 그 많은 설법에 아낌없이 시간을 쏟으신 것입니다. 맙소사! 팔만사천 가지라니. 우리는 여기에서 석가의 욕심을 가늠할 수 있읍니다. 석가는 ‘이 세상에 나 아닌 것이 하나라도 남아있으면, 나는 부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읍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이를 부처로 만들고자 했읍니다. 유명한 지장보살 설화에서 우리는 석가의 이러한 소망을 엿볼 수 있읍니다. 그러나 석가는 살아 생전 이 소망을 이루지못했읍니다. 부처를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묘미는 바로 여기에 있읍니다. 우리는 석가가 부처를 이루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이 부처님은 미래불, 곧 앞으로 도래할 미륵세상을 가리킵니다. 우리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하고, 평화롭고 우애로운 세상에서 내것 네것 없이, 너나없이 나누고 하나 되어 살 때 갖게 되는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뜻합니다.
석가의 말씀은 오늘도 일천 강물에 달빛 비추듯이, 한밤중에 등잔불 건네듯이, 그렇게 공간으로 시간으로 몸과 마음을 통해서 흐르고 있습니다.
문제는 오늘날 많은 불자들이 하늘의 달을 보는 대신에 강물에 떠 있는 달그림자를 떠올리려는 헛된 노력에 한평생을 보내고, 불빛이 어둠을 비추는 동안 길을 걸을 생각은 하지 않고 등불을 깨뜨리지 않는 일에만 몰두한 나머지 한 발자국도 부처의 땅으로 내딛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웃과 더불어 하루바삐 부처세상을 만들어 우리 가운데 마지막 사람까지 부처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부처를 이룰 석가의, 수천 년 지속되어온 소망을 충족시켜야 합니다. 석가는 우리 때문에 아직 부처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들 가운데 석가의 ‘나 너 없으면 못 살아’라는 사랑의 고백을 진실로 받아들일 만큼 빈가슴을 지닌 사람들은 아직도 굶주리며 일하다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 가난한 이웃이지, 아직 있지도 않은 부처를 섬긴다는 허울 아래 예토를 방치하고 있는 당신도 나도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