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우화(寓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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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 허운
1988년 12월 82호
계절이 바뀔 때 우리는 무엇인가를 느낀다. 옮아가는 것들은 소리 없이 가지는 않으며, 오는 자들 또한 예고가 있다. 역사가 새롭게 시작되는 마디는 돌연하게 이루어지는 법이지만 거기에서도 연속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역사의 전체상이 새로운 자세를 갖출 때, 그 속에 살고 있는 개인의 대부분은 이것을 눈치채지 못할지 모르나, 다음 시대를 짊어질 층은 이러한 흐름을 감득하게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무엇인가 얼핏 형언하기조차 벅찬 무상감을 지금 우리는 느끼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을 따라가다 문득 만나게 되는 것은 유한(有限)이며, 여기서 아무리 더 해 보아도 무한(無限)은 되지 못한다. 유한에는 어딘가 끝이 있다는 것이 종교적인 감각이다.
어림잡아 말한다면 옛사람들에게는 이런 감각이 지나칠만큼 깊게 스며 있었다. 무상, 이는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에 대한 앎이다. 이런 앎 때문에 일어나는 폐단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가시가 있다고 해서 장미꽃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옛사람들에게는 이런 앎이 모든 행위의 바탕이 되었다. 절제나 사랑과 같은, 사회를 사회답도록 하는 이런 규범들은 존재의 유한에 대한 인식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유한한 앎은 우리의 마음을 속이기도 한다. 속인다는 것은 우리 존재가 유한하다는 것을 잃어버린다는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교만해진다. 그리고 자기가 가진 것이 영원토록 없어지지 않을 것처럼 살아간다. 그러나 그렇게는 되지 않는다. 언젠가는 있던 것이 없어지고, 나하고는 상관없을 것 같던 일이 문득 나타난다. 그때 사람들은 놀란다.
요즈음 날마다 매스컴에 보도되는 오공화국 비리에 대한 청문회를 통하여 새삼 느끼게 되는 것은 절대권력의 허망함이다.
오월 광주 민중항쟁의 진상에 대한 공청회가 국회의 광주 특위에서 열리고 있다. 팔 년 동안 가려져 온 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온 국민의 눈과 귀가 모두 거기에 쏠려 있다. 그런데 그 청문회가 열리기도 전에 국민의 이런 열망을 짓밟는 조직적인 은폐와 조작이 너무나 노골적으로 자행되고 있다. 80년 5월 17일은 유신독재의 청산과 민주화시대의 개막을 열망하던 온 국민의 가슴에 피멍울이 맺히게 한 날이었으며, 오공화국의 모든 범죄와 불의가 잉태된 시발점이었다. 그것은 권력욕에 불타는 소수 정치인들의 쿠테타로 비롯된 참혹한 내란이었다.
가까운 버마에서도 나타난 문제지만, 80년대 후반 민주화라는 정치변동을 겪고 있는 일련의 아시아 제국들은 군부가, 혹은 군부의 지지로 집권한 세력이 정권을 유지해 간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군부는 제3세계의 국가들에서 어떻게 무소불위의 권좌를 차지하게 됐는가. 그것은 신생국의 엘리트들이 자국의 체제 형성이라는 초미의 과제를 전쟁 혹은 국내정치의 어려움 때문에 군부를 통하여 손쉽게 해결하려 했기 때문이다. 정치 정통성의 문제와 민주적인 통치질서를 폭넓은 동의를 거쳐 수립한다는 것은 그들로서는 인내를 요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군부가 가진 힘과 조직에 의존해서 통치 기제를 시급히 성립하려 했다. 이러한 신생국의 여건을 파악하게 된 군부의 지도자들은 그들 군부의 조직과 힘을 정치지도자들에게 빌려주기보다는 그들 스스로가 쿠테타를 통하여 정치지도자로 나서게 되었다. 쿠테타를 통해서 정권을 장악한 군부는 그런 뒤 강압적인 국민투표나 선거를 통하여 문민통치의 외양으로 위장한 채 정권을 장악해 왔던 것이다.
물론 이 작업에는 민간 출신의 정치 기사(技士)적인 많은 테크노크라트들이 동원된다. 여기서 군부정권과 이를 돕는 테크노크라트들은 안보논리를 강조하면서 그들의 취약점인 정통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서 경제개발의 목표를 신생국의 절대명제로 내세운다. 그리고 이 과제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군부 중심의 체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식으로 개발독재의 정당성을 입증한다.
그러나 군부정권은 군부체제의 속성상 강제력을 위주로하는 복종의 통치에 의존하여 유지될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지배기제는 사회 각 부문이 그 영역별로 조직을 할 수 있는 시기가 되면 여건이 달라진다. 국가나 정부 또는 체제의 모체라 할 경제, 사회, 문화, 종교, 정치 들의 각 부문에서 나름대로의 조직을 형성해 가기 시작하면, 그것은 곧 군의 정치영역에 대한 패권에 도전하는 단계로 옮겨가기 마련이다.
신생국, 특히 군부패권하의 신생국은 상당한 기간 동안군이 체제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체제 또는 사회라고 하는 범주에는 정치, 경제, 사회 등의 부문이 있지만, 이 부문들은 조직화되지도 또 될 수도 없었으므로 아무런 정치적인 대표성이나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정황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단계적인 수직연계체제는 사회나 민간의 체제외적인 부문이 그 영역을 획득하기 이전까지의 단계까지로만 국한된다. 체제 밖에서 체제를 성립시키는 모태의 역할을 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각 범주에 단체나 운동 또는 문제 중심의 자치적 기제들이 그 영역을 획득하게 되면, 구조적 수직연계체제의 기제는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그러한 성숙 과정이 민주화로 나타나게 되며, 마침내 군부 중심의 사회에서 이루어지던 복종의 정치는 무너지고 동의와 참여의 정치가 새로 시작되기 마련인 것이다.
종교는 제3세계에 만연해 있는 하나의 문화적인 현상인 권력악에 대해서 거부할 수 있는 세력을 창출할 수 있는 자구력을 갖고 있다. 종교의 도그마는 권력악에 대해 거부할 수 있는 상징을 그 내부에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거부의 상징을 운동으로 전개할 사람과 돈을 종료는 모두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권력악을 극복할 수 있는 생체적인 힘을 만들어 내는 일이 자동적으로 보장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도그마는 그 해석에 따라 체제 거부와 체제 강화를 두루 뒷받침할 수 있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종교가 가지고 있는 예언자적인 면과 제사장적인 두 면이 바로 체제거부의 기능과 강화의 기능을 가능하게 한다. 체제의 기능적인 면을 조장하는 종교의 기능적인 면을 제사장적인 역할이 뒷받침하고, 지금의 관성을 거부하고 새로운 체계를 찾아내야 한다는 갈등적인 면을 종교는 그 예언자적인 면을 통하여 모색하게 된다.
삶의 자리에서 종교의 두 면은 언제나 각축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결국 그 두 면 중 어느 것이 부각되느냐 하는 것은 대중의 연대가 정한다는 것이다. 대중이 연대한 가운데 각종 영역들이 상호작용을 할 때, 종교는 선택하는 기능을 통하여 그 역사적인 소임을 담당하게 된다. 노동자, 지식인, 학생, 언론인 들과의 연대가 만들어 주는 토론을 통하여 종교는 자신을 거듭나게 하는 사회적 소임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종교가 가진 제사장적 기능을 몰역사적이라고 몰아부칠 수는 없다. 종교의 이 제사장적 기능은 역사를 축적하면서 사회를 만들어 간다. 또한 가치와 제도를 건사하고 유지시키며, 역사적으로 축적된 가치와 제도 위에서 새 가치와 제도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정리한다. 학생운동이나 새 운동이 자리가 잡히도록 도와주고 또한 숨을 장소도 마련할 수 있는 것은 이 제사장적 기능이다. 그리고 종교는 이 제사장적 기능을 통하여 다른 운동들을 일방적으로 돕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자라난 새 운동들이 다시 종교의 예언자적 기능을 강화하도록 한다.
종교는 이와 같이 학(學)의 영역, 지식인의 영역, 문화의 영역이 서로 연결되도록 하는 상징과 조직의 수단을 가지고 있다. 종교세력이 오래도록 다듬은 공동체성은 정치 사회가 공동체적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대중의 수평적인 연대를 쌓아준다. 독재권력의 가혹한 탄압이 가해지는 시대에서는 종교가 체제거부운동의 불씨를 종교의 제사장적 기능 안쪽에 묻어둔다. 종교는 민주화 과정의 여러 운동에서 땀을 씻어주는 누이의 역할을 한다. 미얀마에서 붉은 법의(法衣)를 걸친스님들의 행렬은 시위에 가담한 모든 대중을 법〔진리〕의 사람으로 만들었고, 학생운동에서는 의로운 형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노동운동의 영역화를 위해서 종교계는 큰 힘이 될 것이 분명하다.
계절이 바뀌고 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계절감이 아니라 어떤 시기에 얻었던 문명감각, -인간의 삶에는 절대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 나아가서 인간과 자연 사이에도 그러 차별은 없다는 것-이것을 우리는 오랫동안 잊고 지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종교감각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굳어버린 교조주의와 용기 없는 신물(新物) 숭배는 모두 참다운 종교감각을 잃게 하는 것들이다. 이 감각이 없는 삶도 삶이긴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본질인 평화에 어긋나는 삶이다. 이 감각은 우리에게 어떤 이익을 가져 올까? 이 감각은 세상을 과학적으로 볼 수 있는 부드러운 마음을 지닐 수있게 한다. 제행(諸行)이 무상(無常)한 이 삶에서, 서로 사랑하던 사람과 갈라지는 슬픔을 견디기 위해서도 부드러운 마음을 되찾는 것이 행복의 첫 조건이다.
동시대를 사는 인연이 참으로 어렵다 함은 책임이 중하다는 말이요, 이는 말 한 마디 낸 것이 어려워서 싫은 일도 약속으로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옛사람들은 고지식해서, 약속을 당대에서만 지키는 것도 모자랐던지 윤회(輪廻)라는 것까지 지어 냈다. 세세 생생(世世生生)을 두면서까지 자기(自己)라는 것이 있으려니 믿고서, 자기가 있는 바에는 전생에 마음먹은 바를 후생에서도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역사의식(歷史意識)’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지 다른 것이겠는가.
독재자의 마지막 황혼 같은 모질고 긴 하루의 해가 붉은 낙조가 되어 단명(短命)하게 떠나고 있다. 봄의 씨앗보다 더 가벼운 가을은 쭉정이만 남고 계절의 한기조차 감당할 수 없는 겨울이 이제 다가오고 있다. 혹한의 겨울이 기다려지는 것은 생명을 잉태한 건강한 봄이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해발 몇 백미터의 산뿌리에 내일의 해〔日〕는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