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년 초파일 엿새 전, 유월 줄장마가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생피처럼 붉게 제 몸을 열어 보일 때, 하늘에는 노란 소나무 꽃가루가, 땅 가장 낮은 곳에는 토끼풀 강인히 피어 억센 목숨 보여 줄 때, 온갖 이름 있거나 없는 것들이 땅이 곧 생명임을 다투어 천명할 때, 중생은 연등하여 부처가 오신 뜻을 기리었다. 오후 한시쯤부터 동대문 운동장을 가득 메운 연등의 행렬은 저녁 일곱시에 첫 줄이 풀려 나왔고, 끝 줄은 밤 아홉시가 훨씬 넘어 총착지인 견지동 조계사 앞에 이르렀다. 비천상, 연꽃동, 주름등, 팔각등, 불 뿜는 용과 코끼리 등 물짐승, 물속 짐승 형용의 등, 그것도 부족하여 얼굴에 분칠을 하고 고깔 쓰고 즐거운 옷을 입었으니 아예 제 몸을 공양등으로 삼은 아아들… “나의 꽃밭”에 꽃들은 화려하게 피어 올랐다.
오실 때가 되었어요. 어서 오셔요. 그러나 부처는 이미 내 속에 계신 분, 무명이 걷힌 본연의 자리에 계신 분이니 밖에서 청하여 모질 분은 아니다. 그러나 지난 해의 어이없고 참담한 일 겪은 뛰끝이니, 새삼 제 마음에 다짐해 보는 말일 터였다.
조계종 총무원 청사에 새로운 당기가 꽂히고, 다시 그것이 뽑히어 내뎐져진 뒤, 와중에 폐허가 되다사피한 조계사 살림을 선뜻 맡으려는 사람은 없었다. 지홍스님, 98년 12월 23일 청사 반환 직후, 좌1l사의 총무 겸 부주지의 소임을 맡아 이 곳에 머물게 되었고, 새해 초, 새 총무원장 스님(조계사주지, 당연직)의 재선염을 받아 부주지로 정식 임명되었다.
“조계사 신도”들은 전임 주지 스님의 “귀환”을 기대하며 “그의 귀환을 막는 무리들”을 비방하면서 3월까지 백 일 동안 “항의성 데모”를 벌였다.
그런 어수선함 가운데 시작된 소임살이였다. 법당과 덕왕전, 주차장, 난장판이 된 청사와 종무소등의 시설을 원상 복구시키는 한편으로 종무원들을 다독거리고, 법회와 법당 의식을 회복했다. 외형으로는 안정이 되었다 하나, 실질적인 정상화가 이루어지려면 한 일 년쯤은 걸릴 듯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러나 잘 돼 나갈 터였다. 소임을 맡은 뒤로 그가 내세운, 사찰 운영과 조직 정비에 있어서의 원칙과 명분은 다른 어떤 명분으로도 거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십 년 동안 광명에서 금강정사를 운영하며 세운 포교의 원력이 새로운 단계로 막 도약하려는 결정적인 시기에 이 곳으로 왔었다. 조계종 사찰 총본사격인 위상에 걸 맞는 모델을 제시해야 할 책임이 있는 곳, 그것이 이루어진다면 금강정사 같은 포교당을 열 개, 스무 개 이상을 짓는 의미가 있는 일이 되어 줄 터였다.
지난 종단사태 이후로 활발히 논의되었던 사찰 운영에 있어서의 재가자 참여 문제는 새로운 내용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94년 개혁 종단에서 각 사찰은 재정을 공개하고, 사부 대중이 침여하는 사찰 운영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종법화 하였다. 그러나 지금껏 그렇게 하고 있는 곳도 드물고, 그것을 유기하여 불이익 처분을 받은 사찰은 한 곳도 없었으니 사문화된 법규에 지나지 않았었다.
“염불보다는 잿밥”, 지난해 종단사태가 한창일 때에 한 면 전체를 할애하여 분규의 원인을 진단한 어느 일간지가 뽑은 기사의 제목이다. 보는 이에 따라 억울함을, 안쓰러움을, 자조를, 비아냥의 갖가지 반응을 불러일으켰을 그 내용은 그러나 어쩌면 현실의 이면을 꿰는 가장 본질적인 지적이 될지도 모른다.
사찰 재정 공개에 관한 한 그의 입장은 단호하다. 개혁위원으로서 개혁 종단에 참여하면서, 사찰 재정 공개 조항을 신설한 것은 그의 공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그가 이 곳에 부임한 뒤로 선임 대중에게 선언한 첫 일성도 그것이었다. 사찰 재정은 공개하여 운영의 투명성을 꾀하겠다. 그러나 부임 다섯 달째인 지금까지 아직 운영위를 구성하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상주대중 스님과 거의 같은 수효로 구성될 신도회 부장단등 재가자들의 낮은 인식 수준 때문이다.
전 주지의 “십이년 전횡 체제”에 익숙한 그들로서는 재정 공개나 운영에 관한 논의 과정을 그저 번거롭고 일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제도 정도로 안식하고 있다고 그는 판단한다. 스스로 사찰운영의 주체가 되고 책임을 지는 구성원으로 참여하기 전에는, 형식적이고 관행화 되기 쉬운 운영위로 전락하고 말겠기에 서둘 일이 아니라 여긴다. 그는 “아직도 궁금한 것이 없는 신도들”에게 날마다 문건을 통해 “일방적으로” 재정 운영의 현황을 보여 주면서 때를 기다린다.
사찰 운영의 투명화를 위한 “재정의 공개” 개념은 그에게는 “일의 공개”로 된다. 재정의 공개란 일의 공개에 부수되는 결과일 따름이다. 일이 공개되지 않고서는 재정 버리는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일의 공개란 곧 인식의 공유, 책임의 공유, 역할 분담에 의한 원만한 진행 및 화합분위기 조성의 의미로까지 확대된다.
현재 나라안등록 사찰의 수효는 포교당과 암자까지 포함하면 삼천쯤, 스님의 수효는 일만이천이니 수행자로서의 정체성을 지켜 나가기 위해서라도 재가자의 참여가 불가피하다는 상황 논리는 그의 그러한 생각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그런 논리로 일을 대처한다면 출가자가 감당해야 할 고유 영역까지 침범되어 종지나 종통 수호의 위협, 불교의 정체성 위기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그는 판단한다. 대승 불교가 소승 불교의 경직성에 맞서 일어난 것이라면, 개유불성의 진리를 현실화시키는 갖가지 제도 및 장치가 지금보다 훨씬 더 너그러워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부 대중이 공히 참여하는 승단, 재가자 참여의 폭에 대한 그의 생각은 그래서 좀더 “급진적”이다. 출가 수행자는 중생 교화의 지도자 역할, 법주로서의 역할, 그리고 사찰 행정의 최종 결제권자로서의 역할만 담당하게 하고, 그 밖의 영역은 모두 재가자가 참여할 수 있다고 본다. 의식의 집전만 해도 그렇다. 상가에서 임종, 입관, 발언 등의 상례를 집전하는 일도 스님 아닌 재가자가 할 수 있다고 본다.
법당에서 목탁을 쥐고 인례를 하는 것까지는 글쎄, 조계사에서의 현실화 여부까지는 자신이 없다. 그러나 거사들이 주도하는 상례 의식 집전은 실행에 옮길 뜻을 밝혀 놓은 상태이다. 거부감? 그것은 훈습하기에 달린 문제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 밖에 포교, 재무, 사회 복지 등의 영역에서까지 스님은 법사로만 남게하고, 그 외에 실무 등의 역할과 장의 명칭까지 재가자에 양도할 수 있다 여긴다. 이는 출가자에게는 수행자로서의 본디 자리를 되찾게 해 주는 일이고, 사찰 행정에서는 전문성, 지속성, 책임성 등을 담보할 수 있게 해 주는 길이라 생각한다.
삼십 년 전, 평생 동안 공부할수 있는 곳-열여섯 나이에 스스로 출가를 작정하게 했던 말, 전남신안의 속가를 떠나 그가 처음 찾아온 곳에 서울의 조계사였다. 소년은 다시 범어사로 내려가 광덕스님을 은사로 출가한다. 그리고 서울로 올라와 봉익동 대각사, 불광사 시절을 거쳐 십 년쯤 전에 광명 하안동에 금강정사를 창건한다. 법당을 짓기 전에 신도회가 조직되었던 곳, 그래서 재정 공개는 물론, 신도는 운영 전반에 걸쳐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밖에 없었던 곳, 빌딩이라는 “이색공간” 속에 어린이 법회, 일요법회 등이 열리는 곳, 서민 도서실, 문화 강좌등으로 주민들에게 새롭게 다가간 곳, 무엇보다도 환경 및 교통 문제 개선 등, 지역 사회의 현실에 관심을 두고 문제 해결을 시도했던 곳, 그리하여 재적 신도 일천사만의 사찰로 성장한 곳, 그것은 해마다 갱신되나 허수 아닌 조직화된 실수實數들로서 “만사천 세대” 이상의 의미가 되어 주는 곳, 그리하여 사찰이 건강한 “정치적 압력 단체”로까지 발전될 수 있음을 보여 준 곳이다. 하안동의 금강정사는 세 해 전 종단에 등록을 했고, 지금 또다시 소하동 기아자동차 공장 뒤편에 천여 평의 땅을 마련, 제2불사를 진행중이다. 지역적으로는 서울과 광명과 안양을 겨냥하는 포교 거점이 될 만한 곳이다. 그가 검증해 낸 바, 그것을 바탕으로 삼고 지향하려는 바는 그래서 자주 금강정사 이야기로 풀리거나 뒤섞인다.
그 가운데 하나가, 조계사는 여러 사람을 불러 모으기는 하되 흩어지고 마는 법회 중심의 도량이 아니라, 선행 중심의 도량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조계사의 신도 대상 교육 체계는 입문 단계인 기초 교육 과정 , 그리고 포교사 배출을 위한 불교 대학 등이 있는데, 그것을 “입문-기본 교육과정-수행 단계”로 재편하고, “교리 중심”의 현행 체계를 “수행 또는 신행 중심”으로 가려 한다.
우리나라의 전통불교 수행법은 계율, 간경, 염불, 참선의 수행과 보살행의 다섯 가지로 나눠 볼 수 있고, 가도와 주력 동이 더해 질 수 있는데, 이 모두가 궁극적으로 겨냥하는 바는 “보살행”이라야 했다. 그래야 다른 네 가지 수행법이 개인 수행의 차원에 떨어지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곧 포교원에서 책자로 출간되어 나올「재가불자를 위한 수행 지침서 )에 자세히 밝혀져 있다.)
보살행이 어떤 명칭으로 세분화되어 활동하는 신행 조직이 되든, 그에 부합되는 불교사상을 근거로 조직된다. 환경 보호는 계율 수호에서 그 근거를 찾고, 사회 복지 및 봉사 활동은 보살도의 실천에서 그 근거를 찾는다. 이것은 곧 활동을 위한 조직화 체계가 된다. 지장재일, 아미타타재일, 관음재일 등 재일에 따른 법회 중심의 조직 형태가 아닌, 기독교식 조직 방식인 지역 중심의 조직이 아닌, 경제 조직, 사업 조직 위주가 아닌, 수행을 중심으로 한 조직이야 말로 우리 정서에 맞는 전통적인 조직 형태이다. 금강정사의 경우, 조직에 십 년이 걸련 지역 중심의 조직에 비해 삼년밖에 걸리지 않았던 수행 중심의 조직이 그가 앞으로 조계사에서 펼쳐 보일 교육의 방식이자 포교의 방식이다.
70년 여름, 그가 처음 이 곳을 찾았을 때는 대웅전 법당뿐, 주위는 온통 나지막한 여염 살림집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러나 도량은 삼십 년 세월을 보내고도 정비되지 못한 채 여전히 어수선하다. 한국을 대표하는 사찰 일번지, 한국불교의 장자종단인 조계사 제1교구 본사로서 그에 걸 맞는 외양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원력대로라면, 소비적이고 형식적인 공간이 아닌, 대중이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생산적인 공간, 미래 사회가 요구하는 바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공간으로 거듭 태어나게 될 모양이다.
우선 경복궁과 조계사와 인사동을 한데 묶는 이른바 “문화 벨트화” 계획이다. 문화 벨트 조성은 종단이나 사찰 단독의 관점이 아닌, 서울시 전체의 관점에서 계획되는 안으로서, 서울이 국제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는 데 있어 조계사가 그 중심 핵 역할을 해낼 수 있게 하는 것이 그의 소망이다. 올 연말까지 확정될 전체적 도량 정비의 마스터 플랜은 그런 차원에서 구상되고 있다.
녹지가 확보된 전통적 자연적 휴식공간, 신행 공간, 행정 공간, 그리고 문화 공간의 조성이 그 목표가 된다. 문화공간 조성을 위해서는 박물관, 불교용품 백화점, 극장, 찻집, 탁아소 등의 시설이 필요하다. 이들은 낮게 지어진 건물의 지하로 자리잡게 한다 앞쪽으로 일주문아 옮겨지게 되면, 현재 옹색하게 내걸린 “조계사” 푯말은 더 이상 필요가 없을 것이다. 녹지와 전통적인 낮은 돌담 거리, 우정로의 경관은 그리 되면 크게 달라지리라.
현재 총무원 청사 건물 앞에 세워진 신축 계획 조감도는 기존 부지에 첫 단계(2001년 12월 완공 예정)로 이루어질 불사의 내용이다. 2단계인 새 총무원 청사를 비롯, 불교 언론 매체, 신행 단체 등이 입주하게 될 불교 회관 건립 (2005년 완공 예정)으로 마무리될 최종 계획까지는 가시화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출가 뒤 범어사에서 일 년 남짓 산 기간말고는 줄곧 서울에서 살아온 나날, 그의 사문으로서의 삶은 “포교”로 초지일관해 온 것이 된다. 조계사에서 그의 원력을 실현해 보임도 그의 삶과 무관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가 꿈꾸어 온 것은 따로 있었다.
그가 금강정사 법당을 지을 때, 팔순 할머니 한 분이 그를 찾아와 천만 원을 내놓았다. 월남민이었던 그 분이 남의 집 살이를 해서 평생 모은 그 돈은 그가 시주 받은 가장 큰 돈이었다. 전통 법당을 짓게 되면 삼시로 예불을 올려지는 그 곳에 당신의 위패를 모셔 달라 했다. 그의 청대로 무료 양로원은 안내해 드렸으나 위패를 모시겠다는 약속은 아직 못 지켰다. 그의 초발심을 지탱하게 하고 느슨해진 그를 초발심의 자세로 다시금 끊임없이 환원시켰던 것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포교당을 하기 전부터 품고 있던 생각은 고아원과 양로원을 지어 그런 사람들을 거두는 것이었다. 소하동 제2불사에는 그의 원력대로 노인 복지 시설이 설계되었다. 그 다음은 고아원이다.
사람 사는 게 별거겠어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춘다.
삶의 자치를 실현하는 것이 먼 데 있지 않고, 현실을 떠난 신비한 곳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 생각해요.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간다는 것, 이런 곤고한 사람들의 문제를 풀어 나가는 것이 보살행일 것이고, 그들과 함께 하는 삶이 곧 부처의 삶이 될 터였다. 그런 속에서 보람과 가치와 의미를 찾는 것이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이 되지 않겠는가. 그는 그리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