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청거리는 젊은 세대-불교는 한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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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김형균
1992년 08월 126호
실존하지 못하는 청소년 문화
청소년의 개념은 애매 모호하다. 우리나라 청소년 기본법에는 청소년을 아홉 살에서 스물네 살까지로 정의하고 있다. 그러니까 국민학교 삼학년부터 대학교 졸업반까지, 숫자로는 전국민의 삼십이 퍼센트인 일천 삼백만 명이 ‘청소년’ 이라는 불분명하고 모순된 정의 속에서 하나의 세대 개념과 범주로 묶여 있다.
우리가 으례 말하는 청소년 문화는 이런 모순에서 시작한다. 십 대에서 한 세대의 구분은 결코 삼 년 이상을 둘 수 없는데도, 국민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이 같은 선상에서 같은 시각으로 보여져야 한다는 것은 어른들이 만든 허구이다.
결국 어린이에서 청년까지를 일관하는 애매 모호한 개념 아래 청소년 문화는 하나의 프로그램과 정책, 혹은 연구 결과로 정치적인 ‘통일’을 이루고 있다. 현재 체육청소년부를 주무기관으로 하여 전국에 있는 151개의 상담 기관과 195개의 회관에서 실시하고 있는 청소년 문화 활동-그 가운데 조계종에서 운영하는 것은 단 1개소이며, 원불교가 2개소, 기독교는 46개소이다-은 그 어느 경우도 국민학생, 중고등학생이 분리된 연구 검토나 정책 시안을 접해 보지 못함으로써, 그 세대에 걸맞지 않은 허약한 체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풍토가 빚어 낸 청소년 세대의 사회 문화 역시 확실한 범주나 이렇다 할 특징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보기를 들어 보면, 출판 부문에서도 어린이 도서나 성인용 도서가 주류를 이룰 뿐 중고등학생을 위한 문학 도서나 사회과학 도서는 드물다. 음악도 동요가 아니면 성인용이며, 시나 소설에서도 청소년 문학의 장르는 성립되어 있지 않고 서양 주니어 소설의 번역물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이청소년이라고 하는 세대는 자기 세대의 정신적 주체를 뿌리내리지 못하고 소속 문화를 상실함으로써 기껏 국민학교의 연장과 성인 세대의 모방이라는 ‘존재하지 못하는 청소년 문화’를 이루고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 청소년 정책은 과거 일본이 청소년을 태어나서 스물네 살까지로 규정한 것을 모방해서 짜임새 없게 세워진 데 견주어, 일본은 유럽식으로 삼년 이내의 단위로 각각의 세대 문화를 연구해 왔고, 최근에는 학년별로 구분한 연구도 해서 잡지에서는 학년별 잡지까지 출판되고 있어 우리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종교가 저지른 죄
문화라는 것은 ‘이끼’서린 민족 사회의 전통을 기반으로 한다. 록큰롤이나 전자 오락은 하나의 사회 현상이지 문화라고는 할 수 없다. 라면이나 패스트 푸드는 문명이고, 가출, 폭행, 마약 따위는 문제 가운데서도 심각한 문제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정신인데, 문화에는 정신이 담겨 있다. 이 정신의 존재 여부가 문화와 문명을 나누며 시대와 시대를 잇기도 하고 단절하기도 한다.
오늘날 어린이와 중고등학교 세대에서 전통 문화의 황폐라는 심각한 상황과 서구 문화, 특히 기독교 문화가 청소년 문화를 대변하는 기형적인 현상이 계속되어서 우리 정신 문화의 밑바탕을 뒤흔들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수입 문화인 서구의 기독교 문화가 특히 어린이나 중고생에게 폭넓게 퍼져 있다. 우리는, 행사에서는 크리스마스가, 음악에서는 찬송가와 기독교적 클래식, 팝송, 서구 민요 따위가, 문학에서는 그리스 신화와 기독교적 동화나, 소설이 주류를 이루고 그밖에도 수입된 연극과 영화 등 서구 문화가 위력을떨쳐 민속이나 불교 전통 문화를 능가할 만큼 큰 비중을 갖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현상은 단순히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는 차원을 넘어선지 오래이다. 해방과 전쟁 그리고 배고픔에 지친 어른 세대는 구호 물품과 함께 다가온 그 문명에 결국 우리 정신을 팔아 넘기고 나서 우리 청소년들에게 서구 문화를 우월하다고 교육시켜서 결국 이 문화를 모방하도록 함으로써 청소년 문화의 상실이라는 현상을 가져 왔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그런 환경을 만들고 교육을 한 당사자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요즘 애들...” 이라는 말로 청소년을 싸잡아 비난하고 있으며, 한편 한국의 전통 종교인 불교는 아직도 옳은 소리만 할 뿐 옳은 행동을 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거나 그럴 만한 능력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불교는 지난 반세기 동안 민족과 겨레에 별다른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 채 ‘뒷줄’로 물러섰다. 불교는 국민의 삼분의 일을 차지하는 소년 소녀들의 정신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일을 방기했다. 그 동안 성장한 소년 소녀들이 삼사십 대가 된 오늘날에는 결국 국민의 절반 이상이 “불교는 우리 정신 문화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 라고 손가락질하고 있다.
한편 이 땅의 기독교인들도 청소년의 정신이 서구화되는 것을 마치 기독교화되는 것인 양 착각하고 좋아하는 우매함을 부끄러워할 일이다. 자기들 종교를 위해 민족 정기를 저버린 채 이기적인 선교 욕심으로 청소년 세대들이 민족의 전통을 잃게 한 잘못 또한 적지 않다.
문화를 선양하지 못하는 종교는 민족 종교로서 자격이 없다. 그래서 앞으로는 종교가 문화를 얼마나 창달하느냐, 어떻게 전통 정신과 종교의 이미지를 합일하느냐 하는 점이 중요시 될 것이며, 거기에서 앞선 종교가 모든 것에서 앞설 수 있을 것이다.
불교가 해야 할 일
어린이, 중고등학생 세대의 문화적 가치의 변질에 대하여 불교는 두 가지 방법으로 대처할 수있다.
하나는 불교가 변화되어 가는 그들 신세대의 특성에 맞추어-앞으로 그들의가치관이 이 땅을 지배할 것이므로-능동적이고 주체적인 모습으로 변화되는 방법이다.
또 하나는 그들의 변화나 변질을 회귀回歸시켜 겨레 전통 문화의 속성과 정신에 맞는 체질로 만드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병행되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전자는 ‘불교의 현대화’ 라고 할 수 있으며, 후자는 ‘민족정신의 부흥운동’ 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전 및 의식의 한글화, 법회 프로그램의 개발, 청소년 사회운동의 참여, 청소년 문제 연구, 청소년 전도 활동 들이 불교가 현대화하는 방법이 될 것이고, 청소년 문화 예술의 개발, 전통문화의 보급, 놀이 문화 시설의 확보 들이 민족 정신 문화 운동이 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새로운 문화 매체를 통한 청소년 운동이 필수적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음악, 연극, 영화, 출판, 문학, 스포츠, 레저 등 새로운 현대 문화로 접목하거나 그런 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좀더 전문적이고 장기적으로 계획하여 추진해야 한다. 실내에서 강연하는 식의 정신 고취는 이미 식상하고 낡은 보수적 방법이다. 각 문화의 연구 활동에 따른 문화운동의 비중이 절실한 것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이들 세대에게 불교를 전파하겠다는 종교적 포교 개념은 다음 문제이다. 만약에 종교 범주에만 머무르더라도 불교답지 못한 것이고 민족종교적인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청소년 세대에 대한 것만큼은 적어도 종교적 차별을 떠나 민족적 문화 정신에 우선 중점을 두어야 한다. 그런 탈종교적 자세를 지녀야만 비로소 청소년 세대에서 불교에 대한 관심과 호응을 효과적으로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 스님들과 재가자 가운데 청소년 문화 각 분야에 정통한 전문가-불교적 정신을 깊숙이 간직한-가 백 명 이상만 되고 또 분야마다 열 명만이라도 그룹을 이룰 수 있다면, 우리는 무엇인가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인물을 키울 경제적, 조직적 자원이 마련된다면 머지 않은 때에 풍성한 청소년 문화를 진흥시킬 수 있을 것이다.
청소년용 도서출판, 연극, 영화, 비디오, 음악, 문화 행사, 미술 대회, 민속 놀이 개발 등 다양한 분야에서 부처님 말씀을 기본으로 다듬어진 문화인을 기다리고 있지만, 오늘의 현실은 통계조차 거론할 수 없을 만큼 흔적을 찾기가 힘들다. 그것이 불교계 청소년 문화 활동의 현실이다.
올 여름 산사의 수련 대회 함성이 우렁찬 것을 보면 내일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일주문을 나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