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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靑潭 대선사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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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향기 - 시명 1992년 08월 126호
고성 연화산 옥천사는, 신라 의상조사가 개창한 이래 고려 시대에는 진각 국사가, 근세에는 용성대사가 주석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청담선사는 이곳에서 그 당시의 석학 박한영 스님을 스승으로 하여 재득도한 뒤, 한영스님이 강사로 계시던 서울 개운사 대원암으로 가서 부처님의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선사는 부처님의 많은 경전 가운데서도 특히 능엄경을 가장 좋아해서 일생동안 수지독송과 탐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사는 언제나 마음속에 고뇌가 그림자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그것은 말 한 마디 없이 슬그머니 집을 떠나온 뒤 어떤 상황에 처해 있을지 모르는 아내와 홀어머니에 대한 인간적인 고뇌였다.
선사는 이듬해 방학을 한 뒤 세속과 모든 관계를 끊으려는 결심을 하고 진주로 내려갔다. 이혼을 하여 아내에게는 재혼의 기회를 주고, 선사 자신도 고뇌와 번민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에서였다. 이 문제는 뜻밖에도 아내의 이해로 쉽게 해결되었다. 선사의 의견에 무조건 따르겠다는 착한 아내의 말에 스님은 마음의 빚만 잔뜩 걸머진 채 걸어서 가야산으로 향하였다.
법적으로 이혼은 되었지만 번민도 함께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아내는 그의 어머니 곁에서 언제까지나 그를 기다리고 있을 여자였기 때문이다. 사실 그 시대 여인들은 대부분 그런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선사는 해인사 객실에 누웠으나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도를 닦는다는 명분만으로 그들을 불행에 몰아넣고 나 혼자 이렇게 떠나와 버려도 되는 것일까. 이것이야말로 큰 업보가 아닐까. 나야 도를 닦는다는 목적으로 살아간다지만 그들은 속절없이 버림 받은 슬픔을 무엇으로 이겨낸단 말인가.’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나중에는 열이 올라서 입술이 타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부처님과 역대 조사들은 왜 세속을 버렸던가? 결국 그들은 철저한 버림을 통하여 새로운 세계를 얻지 않았던가. 그들에게 버림이란 버림이 아니라 참으로 돌아가기 위한 방편이 아니었던가.’
그는 참으로 세속에 돌아오려는 피나는 구도 정진만이 유일한 길임을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잠들 수 있었다.
그 다음 날 고뇌를 벗어던지고 얼마쯤 차분한 마음으로 해인사를 떠나 대원암으로 돌아왔다. 서울에 오니 젊은 학인들 사이에서 불교정화 중흥운동의 바람이 일고 있었다. 불교 중흥운동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선사는 새로운 사명을 지니고서 다시 여행길에 올랐는데, 이것이 바로 정화운동의 첫발인 셈이다.
선사는 지리산 골짜기를 비롯하여 충청도, 전라도, 강원도의 깊은 산에 자리한 강원을 찾아 나서서 한국불교의 새로운 미래를 역설하기 시작하였다. 선사의 피나는 노력으로 전국 학인대회를 열기에 이르렀지만, 이것은 일경日警의 눈에 항일로 비춰져 곧 해산되었다. 그러나 선사는 그 활동을 통해서 전국의 많은 승려들이 새로운 불교운동을 간절하게 원하고 있음을 알았고 또 훗날 정화운동에 동참할 동지를 만날 수 있었다.
이 모임이 해체되자 선사는 표표히 발걸음을 돌려 만공스님이 선풍을 드날리고 있던 정혜사로 내려갔다. 그러나 일복을 타고난 선사는 곧바로 선원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삼 년이나 소임을 치루었다. 그러고 나서 선사는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으므로 선원으로 밀고 들어갔다.
이제 선사는 낯 씻는 일, 변소에 가는 일, 그리고 먹는 일을 제외하고는 잠시도 자리를 떠나는 일 없이 정진에 몸을 맡겼다. 선사는 부동 자세로 범 같이 앉아서 목마름과 괴로움과 불편함이 잊혀질 때까지 버텼다. 마침내 그 괴로움과 불편함이 사라지고 점점 무념의 경지로 들어갔다. 이제 밥을 먹어도, 대소변을 보아도, 앉거나 서도 화두 일념에 휩싸여 오직 한 생각 ‘무’ 였다.
이윽고 선방의 수좌들 사이에는 선사가 견성했다는 소문이 떠돌았고 만공화상도 선사가 견성했다는 인가를 해주었다. 그러나 선사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 속에 너무나 많은 미혹의 그림자가 꿈틀거리고 있는 것을 느꼈으므로 인가를 사양한 뒤 오대산의 적멸보궁으로 들어가 퇴락해가는 불법의 중흥과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백일기도를 시작하였다.
적멸도량에서 한창 기도하고 있던 어느날 정혜사에서 함께 정진했던 도반이 찾아와 견성의 심경을 나타내는 게송 곧 오도송을 받고 싶다고 간곡하게 부탁하였다. 선사는 그때의 심경을 마지못해 이렇게 토로하였다.
옛부터 모든 불조는 어리석기 그지없으니
어찌 현학의 이치를 제대로 깨우쳤겠는가.
만일 나에게 능한 것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길가의 옛탑이 서쪽으로 기울어졌다 하리.
오대산에서 백일기도를 하고 있던 선사에게 어느 날 편지 한 장이 왔다. 그 편지는 진주의 불교 신도회에서 정혜사로 보낸 것을 다시 정혜사에서 오대산으로 부친 것이었다. 견성하신 도인 스님의 법문을 듣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선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선사 자신에게 너무나 많은 미혹이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진주로 갈 것인지 말 것인지 망설이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다시 정혜사의 만공스님에게서 편지가 날아왔다. 법문을 해주라는 명령이었다.
선사는 하는 수 없이 행장을 차리고 길을 떠났다. 법회가 있던 날 연화사는 진주 출신인 젊은 도인을 보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더구나 불심이 깊기로 유명한 진주의 불자들인지라 선사의 법문을 듣고 환희하는 그들의 모습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법회에 홀연히 어머니가 나타나서 눈물로서 선사의 장삼자락을 잡았다. 선사는 비록 인연을 끊고 떠난 집이지만 어머니의 청을 따라 옛집을 가게 되었다. 그리고 집안의 혈통만은 이어야 한다는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에 따라 선사는 그날 밤 아내와 더불어 불음계를 범했는데, 이로써 그는 일 년 뒤에 딸을 얻었다. 선사의 뜻을 따라 스무 살에 출가한 이 딸이 바로 훗날 비구니계의 원로강백인 묘엄스님이다. 한편 선사는 자신의 파계를 씻으려고 적멸보궁에서 백일 참회기도를 하는 등 그 뒤로 뼈를 깎는 참회를 계속했다.
이제 선사의 정화운동 시절의 활약과 후반부 수행을 살펴보자.
오늘날도 아직도 정화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고 있지만, 아무튼 정화는 조계종이 자기 기능과 역할을 되찾아 조계종사를 새롭게 연 한 사건임에는 틀림없다.
본디 비구는 출가 독신승으로 대처하지 않는 것은 부처님 이후 출가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로서 수천 년 동안 지켜온 전통이었다. 그러나 일제 침략과 더불어 민족 주체성을 말살하려는 식민지 정책의 비호 아래 파계환법자破戒環法者들이 사찰을 장악하고 교단에서 단단히 호령하게 되었다. 그들의 수가 순식간에 늘어난 이때부터 불교가 타락의 늪에서 허우적거리자 1926년 서울 선학원을 중심으로 불교정화가 첫 봉황불을 들었다. 그 뒤 1954년 이 대통령은 담화문에서 ‘처자 있는 승려들은 사찰밖으로 물러가고, 한국 고유의 승풍과 불조의 혜명을 잇기 위해 비구승이 사찰을 수호하라’는 선언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드디어 1954년 6월 20일 서울 선학원에서 원로 비구들이 모여 교단 정화 대책 위원회를 조직하고 8월 20일에는 ‘전국 비구승 대회’를 열어 정화운동의 기본 방침을 결정하였다. 교계 신도의 호응은 물론 사회 일반 여론도 민족종교 부흥의 관점에서 전폭적인 성원을 보내주었다. 이때 총무원장에 선출딘 선사는 정화 완수를 위한 순교단을 조직하였다.
그 다음해 2월 5일에는 정화 실천의 제일보로 태고사에 합법적으로 입주하여 조계사라고 했다. 이때부터 정화운동은 격심한 호법 투쟁 양상을 띠기 시작하여 승가의 본의와 다르게 유혈 충돌까지 발생하였다. 이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아수라장을 방불케 하는 비종교적인 모습과 현상도 많이 일어났다. 그러나 350명 비구승은 끝끝내 굴하지 않고 순교적인 정진을 계속하였다.
선사는 집단 단식을 하고 몰매도 얻어맞아 건강이 많이 악화되었지만 불퇴전의 순교 정신으로 어려운 난관을 극복하였다. 그 뒤 선사는 1956년에 총무원장을 사임하고 1962년에 해인사 주지로 내려가 그곳에 주석하였다.
드디어 1962년 4월에 통합 종단이 성립하여 형식적으로 비구와 대처의 분쟁은 끝났지만 분쟁의 불씨는 잠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66년 선사는 조계종의 종정에 추대되었지만, 문중 의식에 사로잡힌 비구승끼리의 감투 싸움이라는 종단 자체의 분쟁이 시작되어 선사는 종정에 추대된 지 일 년만에 그 자리를 내놓고 장로원장 자리에 취임하였다. 장로원장에 취임한 선사는 종단 일선에서 물러나 삼각산 도선사에서 평생 숙원인 호국참회원 건립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종단 내의 실권다툼과 파벌 싸움이 그치지 않고 날로 심해지자 선사는 “한국 불교는 절만 남고 종지는 사라진 지 오래다. 모두 대오각성하라”고 애타게 호소하였지만 종단은 조금도 깨우치는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순교 정신으로 이룩한 종단이 매번 종권 싸움으로 아수라장이 되자 선사는 69년 여름에 갑자기 자신이 온 정성으로 가꾸어 온 종단을 탈퇴하였다. 그 뒤 선사를 존경하는 전불교도의 간곡한 호소로 선사는 다시 1970년 7월에 일흔 살의 고령으로 총무원장직에 취임하였다. 선사는 고질적인 종권 싸움 와중에서 종단의 안정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다가 1971년 11월 15일 밤 열 시에 삭은 고목처럼 넘어지고 말았다.
선사는 평소에 늘 좌우명처럼 말했듯이, 선사는 ‘한생의 성불을 미루더라도 중생 제도와 안정된 종단’을 얼마나 바랬던가. 자비보살로서 일생을 살았던 선사는 중생 제도를 위해서는 어디든지 몸을 나투었다. 인간적인 정이 많아 고뇌를 누구보다 아프게 감당해야 했던 스님. ‘자비무적’이라는 선사의 말씀을 되새기면서 스님의 염원이었던 중생 제도와 종단 안정이 하루 빨리 이루어지기를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