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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통算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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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가의 얼과 멋 - 편집실 1992년 08월 126호
지금도 우리들 일상 생활에서 무슨 일을 꾀하다가 그르치면, 곧잘 산통 깨져 버렸다고 말한다. 이렇게 산통이라는 것은 우리들 삶의 현장에서 가깝게 쓰여 왔다.
산통은 대나무 한 마디를 잘라서 성냥개비 크기의 나무살이 들어가고 나올 만한 구멍을 낸 대나무 통이다. 유가儒家의 전통이 내려온 서당에서도 학동들이 글을 외워서 스승에게 바칠 때 스승이 순번을 하나하나 지정하지 않고 산통 속에 들어 있는 숫자로 정했던 것이다. 강당의 학인이나 서당의 학동 수만큼 나무살을 만들어 숫자를 하나하나 써서 이 산통에 넣고 봉했다가 그것을 쓸 때 흔들어 뽑아 낸다.
오늘날 전통 승가 강당에서는 부처님 일대 시교를 공부하는데, 팔만대장경 가운데서 가장 난해하고 깊은 부처님 사상, 곧 화엄경, 원각경, 금강경 같은 경전을 배우는 대교과大敎科라는 반이 있다. 이곳에서 공부하며 서로 토론할 때 순번을 정하여 중강을 뽑고 또 다시 그것들을 논강하여 의견 일치를 모아 다음날 강사 스님에게 그 전날 논강한 것을 외우는 스님을 정하는데 이 산통의 산 가지를 뽑아서 쓴다.
강당의 먹물옷 입던 학인 시절에는 자기가 논강에 뽑힐까봐 불안해 하곤 한다. 그래서 한 장난기 많은 학인이 반장 몰래 그 산통에서 자기 순번의 나무살을 꺼내어 감춰 놓고는 남들은 애써 강의 준비를 할 때 혼자서 놀다가 나중에 그 사실이 알려져 된통 망신당하고 대중스님네를 웃게 하는 일도 가끔 있었다.
아무튼 우리 승가의 전통으로 내려오는 이 산통은 아마 우리 불가의 지혜 종사를 기르는 데 한 몫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산통만 없으면 정말 느긋하게 소나무 숲을 거닐며 상념을 물안개처럼 피워 볼 텐데 하며 원망하던 그 학인 시절이 그리워진다.


자료 제공. 온양민속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