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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과 깨달음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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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윤여창 1999년 06월 208호
지난 세월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숲을 찾아 나섰다. 그 중에는 인간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산림 속에 숨은 은자도 있을 것이고 삶의 참뜻을 올바로 알려고 찾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숲 속에서 살아가는 많은 생명들과 함께 어울려 사는 동안 삶의 참뜻을 터득하게 되길 기원하면서…
숲속에도 도시와 같이 복잡한세상이 있다. 그러나 숲 속의 삶은 도시의 삶과는 확연히 다르다. 숲 속의 삶이 복잡하다지만 그 속에는 물 흐르듯이 흐르는 자연의 질서가 있다. 그 질서의 정연함에 우리는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숲 속의 나무도 햇빛을 바라는 욕구가 있다. 그래서 하늘을 향하여 다른 나무에 뒤질세라 위로 가지를 뻗고 자란다. 큰 나무 아래에는 작은 나무가 있고 작은 나무 밑에는 여린 풀이 있다. 우주의 공간을 서로 나누어 가지고 스스로 있는 곳에 만족하면서 살아간다.
도시에 사는 우리는 숲속 시민들이 살아가는 모습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숲의 숨소리와 빛깔에서 우리문화의 토양이 그 곳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연으로 생긴 숲과 내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사실도 우리는 숲에서 배운다.
숲은 많은 생명이 사는 터전이다. 숲을 찾아가면 언제나 생명의 숨소리를 듣게 된다. 이른 봄에 피어나는 어린 풀과 나무의 여린 잎에서 생명이 숨쉬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겨울이면 추위를 달래려고 깊은 잠에 든 다람쥐의 굴 속에서도 평화로운 숨소리 가 있음을 우리는 안다.
숲속의 어느 곳에서나 수 없이 많은 인연이 생기고 흩어진다. 숲은 스스로 살아간다. 인간의 간섭이 그 정도를 지나치지 않는 한 숲은 계속하여 스스로의 길을 간다. 숲 속에 얽힌 수많은 인연 이야기를 알아 무슨 공부가 되겠는가 하는 회의가 일지만 그래도 숲은 우리에게 많은 깨달음의 실마리를 가져다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평소에 숲속에서 일어나는 삶과 죽음의 이어짐에 대하여 생각하곤 하였다. 숲 속의 작은 생명체들이 먹고 먹히고, 살고 그리고 죽고 하는 순환의 고리를 쳇바퀴처럼 돌고 또 도는 현상을 보고 삶의 무상함을 깨닫는다. 이숲 속의 삶과 죽음의 순환 질서를 나의 전생과 이생의 흐름과 견주어 생각하곤 한다. 삶과 죽음의 윤회가 다른 무엇보다도 숲 속의 생명에게서 가장 잘 드러나지 싶다.
나의 전생을 알 수는 없지만 나에게는 그것을 상상할 자유가 있다. (이는 망상일 것임에 거의 틀림이 없지만.) 내 전생은 숲 속에 있었으며 나는 아마도 숲속의 나뭇잎에서 삶이 시작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어느 여름날 내 위에 한 마리 나방이 찾아와 인연을 맺더니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름 모를 애벌레의 먹이가 되고 이내 애벌레가 된다. 그리고 어느 날 애벌레가 된 나는 숲 속에 사는 새에게 먹히고 새가 되었다. 어미 새가 된 나는 어느 해 여름 새 알로 다시 태어난다. 새 알은 구렁이에게 먹히고 나는 구렁이가 되었다. 구렁이는 천수를 다하고 죽는다. 그 살이 썩어 다시 흙으로 되돌아간다. 흙은 다시 나무가 되고 나무는 다시 버섯이 되었다. 버섯은 지금 나의 식탁에 올라 다시 내가 된다. 숲과 나의 인연을 이렇게 그려 본다. 윤회의 인연으로 만나 숲과
나는 둘이 아니고 하나임을.
지난 어느 봄날 혼탁한 도시를 뒤로 하고 경상도 문경 땅으로 여행을 떠났다. 새재를 넘어 봉암사를 찾았다. 봉암사에 이르는 계곡은 자연에 닿아 있었다. 흐르는 개울물에 원앙이 두 마리가 사이 좋게 노닐고 있었고, 오래된 나무엔 딱따구리가 앉아 먹이를 찾아 나무를 쪼고 있었다.
계곡 옆 객실에 누운 내 육신 속으로 깊은 잠이 흐른다. 억겁을 두고 흐르는 개울물의 무심한 소리가 의식을 일깨우니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다음 날 아침 계곡을 따라 희양산을 올랐다.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마다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희향산을 오르니 갖가지 상념이 내 안에서 일어난다. 그 상념의 한 자락을 ‘희양산 백운계곡’이라 이름 붙여 읊조려 본다.

천 년을 하루 같이 실아 온 그대와 함께 맘은 새 아침을 맞는다.
오랫동안 못 보던 그대를 오늘에야 다시 보니 감개가 무량하다.
부처님 본래 자리를 어디에 놓고 왔는지 몰라 이곳 저곳 돌아본다.
침류교沈流橋를 넘어서니 이곳이 부처님 자리는 아닐까?
백운계곡白雲溪谷을 따라 희양산을 오른다.
원양이 한 쌍이 계류에 떠 있고 오솔길 가에 피어 오른 타래붓꽃이 벙긋이 웃는다.
화사한 벚꽃을 넘어 장좌불와 선정에 든 그대. 그대의 주인은 어디에 있는가?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은 누가 지은 상인고?
개울가에 고인 물은 개구리를 만들고 물에 홈뻑 젖은 참나무 낙엽 위엔 곰팡이가 피어난다.
세상의 모든 생명 다시 돌아오고 되돌아가는구나.
희양산 백운계곡 속에 부처님의 참모습이 드리운 듯.
오늘에서 내일로 흐르는 개울물은 누굴 향해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가?

희양산의 산기슭에서 진리를 구하는 부처님의 제자들에게서 우리는 숲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 분들이 선정에 들면 희양산의 숲 속 생명들도 함께 선정에 든다. 이마 숲이 선정에 들면 구도자들도 선정에 들리라. 희양산에 중생의 귀의처가 생긴 지도 어언 천 년의 세월이 흘렀다. 통일신라가 쇠퇴하고 지방의 유력자들의 세력이 왕성하여졌을 때 세웠다는 봉암사에는 지금도 그 때 있던 그 나무들이 도량 곳곳에 지킴이처럼 서 있고, 장광설의 계곡물은 세월을 잊은 채 흐르고 있다. 부처님의 참뜻이 그 곳에 영원히 함께 있듯이…
어떤 사람은 ‘그것을 알아 무엇에 쓰려 하는고’ 하며 회의를 가질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나는 진리를 찾아 모든 것을 버리고 숲으로 난 길로 나선 구도자의 용기에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한다. 부디 부처님의 참뜻이 그대 속에 다시 살아나 무한중생의 어리석음을 일깨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