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나무 여인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창작동화 - 정진채
1992년 06월 124호
그것은 사월의 끝 무렵에 생긴 일이었다.
산록의 향기에 이끌려 가야산 계곡을 타고 나는 한동안 산노루처럼 마음이 들떠 있었다. 한참 동안 계곡을 오르자, 문득 내 앞에 연보랏빛의 고운 한복을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아, 처음 보는 미인이다! 언제 이 곳에 와 있었을까?’ 하고 내가 생각할 때였다.
“꽃대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여인이 아미를 들어 옥구슬 같은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나는 너무나 뜻밖이라 눈을 크게 뜨고 뛰는 가슴을 쓰다듬으며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무어라 대답을 해야겠는데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여인은 그런 내 모습을 잠시 웃는 얼굴로 바라보더니 등을 돌려 골짜기 위로 걷기 시작했다.
연보라의 옷자락에서 신비로우리만치 고운 향기가 풍겨왔다.
순간, 나는 향기에 취하여 스르르 눈을 내리 감았다.
무어라 말하기 어려운 이상한 감흥이 일어나 쉽게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참으로 묘한 기분이었다.
더욱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내가 눈을 감은 채 그 여인을 따라 걷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간다는 생각이 들어 일부러 걸음을 멈추어 보려고 애를 써 보았으나 헛수고였다.
귓결에 바람이 일렁이고, 감은 눈앞엔 녹색의 둥근 무늬들이 얕게 혹은 진하게 명멸했다.
그것은 분명 신록의 그림자였다.
얼마나 그렇게 걸었을까?
엘리베이터가 멈추어 설 때처럼 약간 어지러운 기분이 들어 눈을 떴다.
그때였다.
“사람 냄새가 나는구나. 누가 사람을 데리고 왔더란 말이냐?”
퀴퀴하게 그리고 쉬어빠진 명색만의 목소리였다.
참으로 소름이 끼칠 정도의 기분 나쁜 목소리였다. 나는 듣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그래,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방금 소리가 난 쪽을 살펴보았다.
적갈색의 검은 바탕에 검은 띠 모양의 반점이 나 있는 능구렁이가 작은 이빨을 드러내고, 참나무 뿌리 쪽에 도사리고 있었다.
“꽃아가씨님이 데려왔지. 귀한 손님이래. 넌 썩 물러나! 찌찌찍.”
흰색과 검은 회색을 띤 등이 굽은 작은 새 동고비가 말했다.
그러고는 나무 줄기를 붙들고 기어다니면서, “내 똥을 찍어 코에 발라 보세요. 사람 냄새가 없어진답니다. 쪽쪼르륵” 하는 것이었다.
별 주문이 다 있다고 생각하면서 우선 동고비의 말대로 해 보았다.
앞장서 걷던 여인이 그때 내게 윙크를 보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도무지 어디엘 가는지 알 수가 없잖아?’
나는 기회가 닿으면 여인에게 물어볼 결심이었지만 여인의 모습을 볼 때면 그런 생각은 조금도 나지 않았다. 사람 냄새가 나면 갈 수 없는 곳이라면 어디란 말인가?
‘도깨비 나라?’
‘귀신 나라?’
‘짐승 나라?“
내 머리 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그것은 여인의 모습을 안 볼 때 생기는 의문일 뿐이었다.
“자아,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한 가지 부탁을 드리지요. 여기서는 어떤 모습을 보더라도 놀라거나 소리를 지르지 말아주세요. 약속을 해 주실 수 있지요?” 하고 연보라빛 옷을 입은 여인이 조용히 말했다.
“.....”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꺼덕였다.
“좋아요. 궁금한 점이 있으면 저에게 물어도 좋습니다. 아시겠지요?”
그 여인의 목소리는 곱고 부드러웠다.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결처럼.
그리고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고 그것은 분명히 잠깐 동안이었다.
내 몸이 중심을 잡고 멈추어서자 약간 현기증이 났다.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아, 끝없이 펼쳐진 등나무의 터널! 등꽃이 연보라빛 꽃대궐을 만들어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운데, 그 꽃 그늘 아래로 사람들이 무더기 무더기 모여있었다.
나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 쪽으로 가 보았다.
그 사람들은 서로 등을 마주 대고 앉았는데 그 표정들이 이상했다.
외롭고, 쓸쓸하고, 그리운 표정들로 보였다. 저렇게 앉아 옆눈 한 번 거들떠 보지 않고 살아가다니!
만약 눈앞에 사람이 나타나면 와락 달겨들어 손을 마주잡고 눈물을 왈칵 쏟을 것만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것은 뜻밖에도 심각하게 들어맞는 생각이었다.
내가 첫번째 등을 돌리고 앉은 사람 앞에 섰을 때였다.
“오!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던 형제여! 그립고 보고싶어 미칠 것 같았소. 이 뼈저린 외로움을 형제여! 짐작이나 하겠소?” 하고 내 손을 덥썩 잡고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나는 물었다.
“당신들은 언제부터 여기 이렇게 등을 돌리고 앉아 있습니까?”
그가 대답했다.
“사십 년은 넘었을꺼요.”
나는 기가 막혔다.
“서로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습니까?”
“등을 돌린 사인데 무슨 할 말이 있겠소?”
“옆에도 사람이 있잖아요?”
내가 딱하다는 투로 물었다.
“정말 딱한 건 당신이오. 우리가 언제 옆눈 한 번 볼 만큼 조용한 적이 있었소? 육십년대? 칠십년대? 팔십년대? 언제 그런 여유가 있었소? 이젠 사십 년을 굳어버린걸...”
나는 할 말을 잊어버렸다.
옆과 등 바로 뒤쪽에 꼭 같은 그리움을 안은 사람들이 한자리에 붙어 살면서도 하나같이 외로운 모습을 보자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여인에게 물었다.
“저 사람들도 삼십 년, 아니 사십 년을 넘도록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 생각이랍니다.”
나는 그 말에 기가 질렸다.
“말이 됩니까? 서로 마주보고 앉으면 될 것 아닙니까, 네에?”
내가 여인에게 따지듯 말했다.
“그렇겠지요. 참으로 간단한 해결 방법이 서로 마주보며 손을 잡는 일이지요. 하지만 저 사람들은 그 오랜 세월을 누가 먼저 돌아앉느냐? 그걸 결정하지 못하고 살아왔답니다.”
여인은 슬픈 얼굴로 대답했다.
“세상에 말도 안 돼요. 누구든 먼저 돌아앉기만 하면 되는 것을... 만약 온 세상 사람들이 이렇다면 이 세상은 지옥입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너무 염려마세요, 손님. 이 세상에 오직 한 군데만 그런 곳이 있을 뿐이니까요.”
여인은 또 다음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가려 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버텨 섰다.
그리고 온몸에서 솟구쳐 오르는 힘을 모아 이렇게 소리를 쳤다.
“돌아앉아! 이 못난 이들아! 남은 평생을 그렇게 못나게 살꺼얏!”
너무나 갑자기, 그리고 그것은 내 자신이 놀랄 정도의 목소리여서 귀청이 떠나갈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 고함소리는 가시가 돋히고 한이 맺힌 그대로 산 메아리가 되어 골짜기를 쩌렁쩌렁 울렸다.
여인은 소스라치게 놀라 얼굴색까지 보랏빛으로 변해 버렸다.
그리곤 겁먹은 얼굴로 사방을 살피면서 황급히 말했다.
“손니임, 약속이 틀리지 않아요?” 하고.
나는 등꽃 아래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사람들이 마주보지 않는 한 절대로 이곳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여인에게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그러자, 어디선가 목탁 소리와 독경 소리가 향기롭게 가슴으로 전해져 왔다.
아아, 그러는 사이에 그 여인은 주렁주렁 끝없이 매달린 등꽃 속으로 빨려들 듯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