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곡麟谷 대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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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향기 - 시명
1992년 06월 124호
새잎들이 수런수런 피어나는 싱그러운 오월의 숲에서는 산새들이 온종일 노래하고 산꽃들은 맑은 영혼처럼 여기저기 피어있다.
오월의 숲길을 걷노라면 나의 스승 경봉화상께서 고졸한 준필準筆로 자주 쓰던 ‘산화소야조가山花笑野鳥歌’라는 글구가 얼핏 떠오른다.
산꽃들은 하나같이 청소淸消하다. 그 해맑은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얼룩진 삶의 흔적은커녕 일상사의 자질구레한 한 점 이야기조차 용납하지 않은 채 입적해 버린 선승들의 맑은 영혼을 대하는 것 같아 발걸음마저 조심스러워 진다.
구름처럼 물처럼 영혼의 자유만을 추구했던 출격장부出格丈夫들에게 후대에 남길 만한 이야기가 무엇 때문에 필요하며, 이산 저산으로 떠돌며 이름을 숨기고 살아가길 원했던 그들에게 어찌 자취가 남아 있기를 바랄 것인가. 구름과 물이 어디 그 흔적을 남기던가.
인곡선사의 행장을 정리하면서, 선사에게서 삶의 편모나 흔적 같은 군더더기를 애써 찾으려는 나의 생각이 얼마나 부질없고 속된 것인가 하는 생각이 언뜻 떠올랐다.
스님은 일생 동안 전형적인 수좌의 삶만을 고고하게 지켜왔으므로 일체 세속적인 언사가 필요없거니와, 한동안 무망함속에 있다가 겨우 속되고 무딘 붓으로 그 편모의 테두리만을 그리게 됨을 용서하시길 바랄 뿐이다.
인곡선사는 전라남도 영광에서 1895년 2월 15일 밀양 박씨 효숙과 어머니 송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한 아들이 출가함에 구족九族이 천상에 태어난다’는 옛 조사의 법문을 들은 부모님의 돈독한 불심에 의하여 선사가 나이 열두 살 되던 때에 전라북도 백암사에서 금성錦城화상에게 득도하였다.
열일곱 살에 승문에 들어 스무살에 금해金海율사에게 구족계를 받고 나서 대서원을 발하고자 팔공산 금당 탑전에서 백일 용맹 정진을 하다가 어느날 꿈에 가사를 한 벌 얻어 입어 보니 본분납자로서 도 닦는 모습이 엄연한지라, 선사 스스로 부처님의 일대시교가 세상을 구제하는 가르침이기는 하나 최상의 가르침은 실참실구實參實究하는 참선에 있음을 각찰覺察하고 표연히 운수행각을 떠나 예산 보덕선원 보월寶月화상 회상에 수선 안거하니,이로써 선승의 첫걸음을 걸었다.
그 뒤 남녘과 북방의 제방선원에서 스승을 찾아다니며 도를 닦았는데 금강산 마하연선원에서 만공화상과 오대산 상원사에 주석하던 한암선사와 수월, 혜월선사 등 당대 선지식을 두루 친견하는 등 각고의 정진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이듬해 그 당시 도봉산에 주석하던 용성선사를 찾아가 만났더니 용성선사께서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 하거늘, 스님은 한쪽 주먹을 내밀면서 대답하기를 “이와 같은 물건이 이와 같이 왔나이다” 하였더니, 용성선사께서는 크게 웃으며 “그렇고 그렇도다” 하고 인가하였다.
그 뒤 용성선사께서 계로써 이르기를
인심포천지 仁心抱天地
현곡우명명 玄谷又明明
조화종사기 造化從斯起
긍고불생멸 亘古不生滅
어진 마음이 천지를 안으니
검은 골짜기가 밝고 또 밝도다.
조화가 이를 따라 일어나니
옛부터 생멸하는 것이 아니도다.
하시고 인곡당麟谷堂이라 법호를 내리니 스님께서는 용성선사의 법제자가 되었다.
스님의 세수 서른 살에 출가 본사인 백암사에 돌아가니 대중들이 백양사 운문선원 조실로 추대하였으므로 스님은 그때부터 납자를 제접하였는데 그 뒤 통도사 등 여러 곳에서 조실로 머물면서 선지식으로서 풍모를 보여주었다.
1945년 이후 해인사 가야총림에 주석하면서 효봉선사와 더불어 시방의 납자를 제접하였는데, 풍편으로 전하는 그 당시 일화들 가운데 몇 가지를 소개할까 한다.
선사께서는 언제나 납자들에게 무자無字화두를 가르쳤는데 어느 날 문인 성주스님이 선사를 찾아가 만났더니 선사는 자상하게 혜가대사의 단비의 연기에 대하여 간곡하게 말씀하면서 도를 구하는 지극한 신심에 대하여 책발策發하고 나서 이렇게 말씀하였다.
“세간에서는 부모가 자식에게 논밭이나 재물 따위의 유산을 물려주기도 하지만 나는 아무런 가진 것이 없으니 너에게 물려줄 것이 없구나.”
“스님 원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어찌 출가사문이 되어 호의 호식하기를 원하여 은사스님께 재산 얻기를 바라겠습니까.”
“네 생각이 그렇다면 본분납자의 마음이니 내가 너에게 무자답無字沓을 선사하겠노라. 무자답이야말로 세간 전답에 비하면 천지 차이로 귀하고 소중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주고 받고 하는 논과 밭, 그리고 재산들은 하루아침의 티끌과 같아서 결국 죽을 때에는 하나도 네 것이 못 되지만 옛조사 조주스님이 물려주신 무자답은 영원히 네 것이 될 것이니라. 그뿐만 아니고 이 무자화두는 천하 납자들이 안심입명의 양식을 얻어 간 무자답이니 너는 이 무자화두로써 조사관문을 뚫어 마침내 성불하도록 하라”고 분부하였다.
이 ‘무자답’이란 말은 한동안 해인사에 선원 지대방의 한담으로 입에 오르내리는 이야깃거리였다.
스님께서 퇴설당에서 주석하고 계실 때 어느 날 성주스님이 스님께 찾아와 뵙고 공부에 재미가 없고 진취가 없음을 한탄하자 선사께서는 성주스님에게 “성주수좌! 공부에서 재미를 구하면 안 되느니라. 재미를 구하면 참다운 재미가 못 되는 것이니라”하고 경책하시고 나서 “너 맛있는 음식을 먹어 보았지. 예를 들어 말하면, 냉수와 설탕물을 비교하면 설탕물이 맛있을 것이고 메밥과 찰밥을 비교하면 찰밥이 훨씬 맛있을 것이다. 그러나 맛좋은 설탕물이나 찰밥은 몇 번만 거듭 먹으면 싫증이 나고 몸에도 해로울 것이다. 하지만 메밥과 냉수는 별다른 맛이 없으면서도 날마다, 아니 한평생 먹어도 늘 맛있고 몸에도 이익이 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참선 공부에 맛을 취하고 재미를 구한다면 그것은 옳은 맛과 재미가 못 되는 것이니라. 재미가 없는 것으로 재미를 취하려고 하면 그 재미가 다할 때가 있거니와 재미가 없는 것으로 재미를 삼으면 그 재미가 다함이 없는 것이다.”
선사께서 용성선사의 법제자가 된 뒤 서울 대각사에 잠시 머물러 있다가 만주 용정 대각교당에 가 계실 때였다.
선사는 이때 젊은 시절이었으므로 젊은 도인으로 널리 알려졌다. 하루는 수많은 사부대중이 모인 가운데 젊은 도인에게 설법을 청하였다.
이 때 수많은 대중들은 모두 두 손을 모으고 선사의 모습을 우러러보며 무슨 설법을 하시나 하고 이목을 기울이고 숨소리를 죽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선사는 법상 위에서 주장자를 짚고 앉은 채 아무런 말씀이 없었다. 그리하여 선사와 대중들은 법당에서 한 시간 이상 고요 속에 잠기었다. 선사께서는 끝내 한 말씀도 남기지 않으시고 그냥 하단하였다.
그때 용성선사가 찬하기를 이것이 참 설법이며,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근본 진리이며, 이것이 역대 조사의 안목이니 삼세 제불과 역대 조사 그리고 법계 함영이 안심입명하는 곳이라고 찬탄을 거듭하였다. 또 선사께서 해인총림에서 설법하실 때였다. 법상에 오른 뒤 잠시 눈을 지긋이 감고 계시다가 이윽고 다시 뜨시어 이미 준비된 찻잔을 들고 “이 차 한잔이 옛날 조주스님의 차와 그 모습이 어떠하오?” 하며 청중들을 둘러보니 청중들은 묵묵부답이었다.
선사께서 다시 말을 이으시되 “옛날의 조주도 이 한잔의 찻물에 신명을 잃었고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의 조사님이 동시에 이 한잔의 찻물에 신명을 빼앗겼나니 오늘 이 대중은 어떻게 신명을 구출하겠는가?”
춘천백일섬문광 春天白日閃門光
산하대지마위진 山河大地磨爲塵
푸른 하늘 밝은 날에 전광이 반짝이니
산하 대지가 무너져 티끌이 되도다.
선사께서 예순일곱 살 되던 하안거 중에 미질微疾을 보시더니 7월 14일에 문도들을 둘러보시며 “내 이제 세상을 떠나리라. 내말을 듣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때 시중을 들고 있던 묵산 포공 등 여러 문도들이 모여 눈물을 머금고 염불하니 스님께서 “내 염불은 내가 하고 있으며 내 갈 길은 내가 다알고 있으니 그렇게 울거나 염불하지 말라.” 뜻밖에도 이 말씀을 들은 문도들은 염불을 중지하고 “스님, 스님이 돌아가시면 사십구재를 지낼까요” 하고 물으니 “자네들 마음대로 하게. 나는 괜찮네. 그리고 공부하는 수좌들에게 방해가 될 테니까 누구에게도 알리지 마라” 하였다. 그때 포공스님이 “스님, 내일이 칠월 보름 백중 해제날이오니 내일 가십시오” 하자 스님께서 “이날이 그날이고 그날이 이날이니 그런 삿된 생각을 하지 말라“ 하였다. 다시 포공스님이 ”스님, 스님의 경계는 그렇지만 미혹한 중생들이야 좋은 날이 좋지 않습니까, 스님...“ 하고 간청하므로 스님께서 혀를 차시며 ”자네들이 하도 그러니 그러면 내일 가기로 하지“ 하였다. 이 말씀이 온 산중에 전해지자 당시 주지 자운스님께서 ”스님의 맑은 눈망울을 보니 앞으로도 한달 이전에는 돌아가지 않을 것 같으니 오히려 스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 좋겠소. 괜히 그 말씀을 믿었다가 그대로 되지 않으면 망신스럽지 않을까 저으기 걱정되니 이 말을 일체 내지 마소“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몇몇문도들은 다시 자기 처소로 돌아가 버렸다.
그때 시봉하던 제자들은 하루를 더 넘기지 못할까 하고 마음졸였으나 그 밤을 지나 15일 오전 8시경에 선사는 영가스님의 증도가를 몇 구절 친히 읊으시며 제자들에게 외우고 새겨 보도록 이르신 다음 조용히 열반에 드셨다.
그때는 1961년 7월 15일이며 세수는 예순일곱 살이고 법랍은 쉰네 살로 그 비가 일주문 남쪽에 있으며 제자로는 혜암선사를 비롯하여 여러 분의 스님이 청정 수행 가풍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