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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과 청정 국토의 성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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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학담 1999년 06월 208호
역사의 오염과 파국을 넘어
불교는 인간이 의지해 사는 세계를 의보依報라 하고 삶 주체를 정보正報라 한다. 의보인 세계를 환경이라 할 때에는 삶 주체들의 삶의 필요조건을 채워 주고 생활여건이 되어 주는 대상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또 자연이란 말은 인간의 삶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하늘 땅의 스스로 그러한 도(天地自然之道)’에서 나온 말이다.
자연 세계를 인간 이성의 쓸거리로 파악하여 끊임없이 파먹고 깨부수고 착취해 온 인류의 공업共業에 대해 자연은 인간 삶 자체의 뒤틀림과 대파국으로 되 갚아 응답한다. 자연 세계의 파국에는 삶의 조건인 환경의 파괴에 대한 위기의식과 함께 환경을 관리하고 이용해 온 과학기술에 대한 맹신과 기술문명의 진보에 따른 환상적인 희망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위기 의식과 환상적 희망은 다시 서구의 시간관에서 세기말 징후인 종말에 대한 두려움과 새 천년의 희망으로 서로 뒤얽혀 나타난다. 그러나, 불교에서 보면, 낡은 것의 사라짐과 새것의 도래라는 기독교 교리는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에 떨어진 오염된 견해(見漫)일 뿐이다. 오히려 가고 오고 생기고 사라지는 역사운동 속에서 한 법도 실로 오는 바도 사라지는 바도 없음을 알 때, 견해의 오염을 넘어, 위기의 한복판에서 그 위기를 해소하고 인류의 희망과 행복을 주체적으로 보듬는 보디사트바의 바라밀행이 드러날 것이다.
법화경은 보디사트바의 설법의 때와 실천의 처소는 늘 말법末法의 때, 크게 악한 세상(大惡世)으로 상정한다. 굶주림과 질병이 넘치고 환경파괴가 인류의 재앙을 예고하는 오늘은 보디사트바에게 크게 악한 세상이다.
법화경에서 크게 악한 세상은 다섯가지가 흐린 때(五濁惡世)이니, 다섯가지 흐림이란 환경이 파괴되고 자원이 고갈되어 배고픔과 병이 넘치며 쓸 거리와 먹을 거리 때문에 싸움이 그치지 않는 역사의 오염(劫濁), 온갖 잘못된 세계관이 인간을 지배하는 견해의 오염(見濁), 중생의 삶이 질곡에 갇혀 버린 중생의 오염(樂生濁), 삶들의 생명 활동이 자유롭게 자기를 실현하지 못하는 목숨의 오염(命濁) 들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오탁악세의 교설은 다만 절망과 파국을 일깨우는 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본디 깨쳐 있음(本覺)과 물질의 본디 열려 있음(慣相)에 서서 희망의 역사를 만들어 갈 창조의 계기로 돌이킨다.
보디사트바는 중생을 슬피 여겨 스스로의 깨끗한 업보를 버리고 악한 세상에 태어나 고난과 질곡의 세상을 안락과 평화의 세상으로 만들어 간다. 그에게 시간은 결코 필연의 굴레가 아니니 자연의 파국과 역사의 오염은 오히려 희망과 구원의 계기인 것이다.

연기법, 인간과 자연의 참된 화해
서구에서 이성은, 소박하게 정의하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개념적 사고 능력이라 하겠지만, 독일 관념 철학에 이르러 인간의 인식 능력 전체, 절대이성 세계이성으로까지 넓혀졌다. 절대이성은 인간의 인식 능력을 넘어 우주의 원리가 되고 역사운동의 포괄자로 해석되지만, 이런 세계이성의 관념도 인간 사유 능력의 보편화이며 신격화이다. 또 인간을 제 모습처럼 만들고 엿새 만에 세계를 만든 뒤 이렛날 휴식을 취했다는 기독교의 신도 세계를 지배하고 관리하는 인간성의 극대화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성 중심, 인간 중심의 사고는 인류 역사 진보의 동력이 되고 과학 기술문명 발전의 추진력이 되었다. 인간의 인식 능력이라는 이성의 관념이 우주이성으로 확장되는 과정은 바로 서구의 가치관을 온 인류의 가치로 보편화시키는 과정과도 상응한다. 사회주의 철학에서 생산력이라는 개념도 도구적 이성의 한 모습이다. 오늘날의 파국적인 상황은 이처럼 자연세계를 자기 것으로 욕구하고 이용해 온 서구적 이성의 무분별 한 자기 확장과 자기 욕구충족의 역사적 업보이다.
자연을 이용하고 소유하려는 이성중심의 세계관에 반해, 동양의 도가적 세계관은 ‘험이 없이 스스로 그러한 천지의 도(無爲自然之道)’를 인간 생명의 원천으로, 모든 실천적인 규범(德)의 뿌리로 본다. 도는 스스로는 생성하지 않되 세계 운동의 생성을 생성이게 하는 자, 모든 만물의 규정을 규정짓는 무규정의 크나큰 것(大物)으로 표현되며, 하늘과 땅, 빛과 그늘, 밝음과 어둠의 두 측면을 싸안되 하늘 땅의 대립을 능동적으로 일으키는 자로 정의된다.
자연 세계를 도구적 이성의 대상으로 보는 서구의 세계관에서는 자연 세계의 자발성이 사물화되고, 자연을 인간이 돌아갈 생명의 모태로 보는 동양의 세계관에서는 세계를 인간적인 세계로 건설하고 장엄하는 인간의 자유의지 설명되지 않는다. 불교의 연기론은 양자의 치우침을 넘어 세계의 자립성을 살리되 세계의 실체성을 깨뜨리며, 인간의 자유의지를 드높이되 인간을 세계화 한다. 인간의 삶 활동인 육식六識은 자아와 세계의 산물이되 또한 자아와 세계를 능동적으로 산출하는 생명력이다. 자아(六根)-활동(六
識)-세계(六境)는 모두 있되 있음 아닌 있음으로 주어지니, 마음에서 마음을 떠나는 자(於念無念)가 세계를 마음인 세계로 세우는 자며, 모습에서 모습을 떠나는 자(於相無相)가 마음을 세계인 마음으로 바로 보는 자다. 보디사트바는 세계를 마음인 세계로 정립하되 마음을 취하지 않고 마음을 세계인 마음으로 정립하되 세계를 취하지 않으니 그에게 마음의 해탈은 곧 중생 해탈이며 청정 국토의 실현이다.
물질은 물질인 물질이 아니라 물질 아닌 물질이다. 물질의 있음을 있음으로 보는 곳에 물질에 대한 탐착과 물질의 고갈에 대한 두려움이 생긴다. 물질을 물질 아닌 물질로 보는 곳에서 물질에 대한 탐욕스러운 지배가 끝나고, 물질의 다함 없는 공능을 영겁토록 굴려 쓸 것이다.
물질을 물질 아닌 물질로 볼 때 물질은 여래장인 물질로 드러나니 이 뜻을 팔천송반야경은 ‘물질이 한량없으므로 반야가 한량없다’하며, 수능엄경은 ‘여래장 가운데 성품이 물질인 참된 공과 성품이 공한 참된 물질이 청정하게 본디 그러하여 법계에 두루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환경정화불사의 보살행자는 물질과 내가 둘 없는 외짝눈(-隻眼)을 활짝 열어 오늘날 물질 파괴의 위기 속에서 다함 없는 생명의 활로를 찾아가야 할 것이다.

깨달음과 청정국토의 성취
마음과 물질이 공하므로 마음이 세계인 마음이며 세계가 마음인 세계라면, 마음의 해탈은 세계의 해탈이며 중생의 해탈이다. 이미 마음이 여기 있고 세계가 저기 있는 것이 아니면, 마음에서 마음 떠나고 마음 없음에서 마음 없음마저 꿰뚫는 선의 인식은 곧 마음과 세계의 실체성에 머무름 없되 세계를 인간화하고 인간을 세계화하는 창조적 활동(無住妙行)으로 돌이켜진다.
있음과 없음, 마음과 세계에 머무름 없는 창조적인 행을 경은 때로 육바라밀이라 하고 보현행이라 하니, 바라밀행자는 인간이성의 독재와 사물 운동의 신비화를 함께 넘어서셔 자기 실현을 역사 해탈, 청정 국토 성취와 하나로 이루어 나간다. 중생의 물든 삶 활동, 곧, 탐진치가 인간의 역사를 삼계의 예토로 규정한다면 보살의 바라밀행은 예토의 역사를 기쁨 넘치는 정토의 세계로 구현한다.
아미타 국토의 장엄하고 찬란한 물질 세계의 모습은 결코 타방 세계의 초월이 아니라 물질의 모습 아닌 참모습의 공덕이 온전히 실현된 모습이며, 법장비구의 48대원은 초월적 인격의 신비한 일이 아니라 주어진 현실 조건에서 오염된 역사와 말법의 대피국을 해탈과 열반으로 전변시키려는 보디사트바의 바라밀행이다. 그렇다면 바라밀행으로 드러나지 못하는 선의 인식과 역사참여행이야말로 오탁악세에 물든 견해의 모습이라 할 것이니, 어찌 주관관념론의 영지靈知와 절대관념론의 한마음(-心)으로 선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을 땅에 파묻을 것인가.
‘어떤 것이 옛 부처 마음인가를 묻는 학자의 물음에 ‘담장과 기왓장’이라 답한 남양 혜충 선사의 공안을 환경 장염불사의 보살행자들은 눈을 들어 살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