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역 불서의 국역에 대한 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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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박태섭
1992년 06월 124호
Ⅰ
‘말(語)은 날아가고 써진 것(書)은 남는다’ 는 말이 있다. 글은 목소리보다도 멀리 가고 더 오랫동안 이 세상에 남는다. 글 쓰는 사람은 오래 살고자 하며, 죽어서도 친구를 만나고 싶어한다. 그러나 글 쓰는 사람들이 모두 오래 살아남지는 못한다. 오히려, 죽어서 자기의 죽음을 원수들 사이에 내팽겨쳐 버리고 죽는 사람들도 있다.
번역은 명저의 번역이어야만 한다. 남들의 좋은 생각을 번역해서 알려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 더욱이 자기에게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 남의 좋은 생각을 대신해서 빛내 주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번역하는 사람은 원작자를 인격적으로 느끼고 대접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번역자는 원작자를 학대하는 사람이 될 쁀더러 독자는 어지러움을 느끼게 된다. 처음부터 존경받을 만하지 못한 사람의 책이라면 왜 번역하려 하며, 번역해서 무엇에 쓰겠다는 말인가. 원작자가 이미 타계한 사람이라면, 번역자는 조심스러운 마음가짐으로 해야 할 것이다. 이미 번역하기로 마음먹은 책이 있다면 번역자는 일단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그러나 번역은 쉽지 않다. 세상에 어디 쉬운 일이 있을까마는 ‘번역자는 반역자’ 라던가. 번역할 때에 아무리 두운과 각운을 잘 맞춘다고 해도 번역자는 반역자가 되기가 쉽다. 반역을 해서 성공한다면 새 왕조의 개창자가 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혹시라도 결과적으로 반역자의 누명을 쓰게 되더라도, 번역자는 결코 반역자가 되려고 마음먹지 말아야 한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혼자서 일을 하는 것이 낫다. ‘번역하기’는 ‘봉사하기’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해야만 한다.
Ⅱ
이 나라 불가의 관심은 오로지 선禪에 있어서 사람들은 선풍禪風만 불어주기를 바란다. 소망은 언젠가 이루어지리라. 그러나 그러면서도 가끔 영어에 대하여 관심을 보이는 ‘말할 줄 아는’ 선불교인들도 있다. 선의 조종祖宗은 어느 땅에 있으며 선풍을 진작할 영어책은 어디에 있는가. 선과 영어는 본디 관계가 없었다. 옛날에 영어를 몰라서 한소식을 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던 선사는 없었다. 선에 대해서 도움될 영어책을 찾는 것은 처음부터 쓸데없는 짓이다. 선은 본디 말의 도움을 받을 것이 없다.
육조 혜능선사는 금강경 독경 소리에 오도했다고 한다. 책은 글자는 고사하고 그것이 엿 바꿔 먹을 종이뭉치로만 보이는 사람에게도 그 힘은 크게 미친다. 그러나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는 말을 앞에 놓고 보면, ‘마음’이라는 글자도 ‘마음’이라는 소리도 모두 ‘마음’이 아니다. 그리고 보면 ‘육조단경’ 부터가 필요 없는 책이었다. 모름지기 수선자修禪者는 마음 본체만을 찾아들어가면 그뿐이다. 그것이 교외별전敎外別傳이 아닌가. 그 때 선사들의 말이 모두 허튼소리였음을 우리는 새삼 깨닫는다. 그리고 이런 말도 허튼 소리임에 틀림없다.
오늘날 영어가 지난 수백 년 지나면서 확보한 세계어로서의 위치가 앞으로도 오래도록 유지되리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런 만큼 영어는 세계 여러 나라의 불교도들이 의사 소통하는 공동의 매개체가 될 것이며, 실제로 지금도 그렇게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자리를 빌어 한국 불교계에 조언한다면, 우선 영어로 쓰인 테라바다 불교계 학자들의 서적부터 조심스럽게 번역하는 것이 선불교 전통의 한국 불교를 위해서 좋으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 불교계의 학문적 성과들을 비판적으로 섭렵하면서 한국적 불교상을 정리하는 일에 매진하는 것이 좋겠다. 무모한 번역은 오히려 학문적 발전을 가로막는 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겠다.
영어의 문화적 배경은 오로지 영국에 있는 것만은 아니고, 그것의 바탕은 사실 라틴에 있다. 씨저는 기원전 54년의 제이차 침공에서 영국을 정복했는데, 이 때부터 라틴 문화가 영국에 전해지기 시작했다. 라틴어는 산스크리트어와 조상이 같은 말이고 또 서로 피가 통하는 형제 관계에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한문보다도 영어로 생각해야 불교가 더 잘 이해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한편, 중국어는 산스크리트어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으면서도 중국 불교는 인도 불교와 오랜 교분을 쌓았다. 비록 거리는 멀었지만, 중국 불교인들은 인도 불교로부터 중국 불교로 이어진 혈맥을 주장했다. 반대로 아직까지 유럽의 불교학자가 혈맥의 정통성을 주장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불교에 대한 영문 서적들은 대단히 많다. 불교를 책으로 알고 싶다면, 이제 한문책을 뒤적거릴 필요도 없다. 기왕 책으로 읽을 것이라면, 차라리 한문책보다 영어책이 훨씬 정확하고 이해하기 쉽다.
번역은 수혈과 같다. 모든 피가 아무에게나 수혈될 수 없듯이, 모든 영어책들이 번역될 수는 없을 뿐더러 또 그래야 할 필요도 없다. 명저들이 많이 번역된다고 해서 학문의 터전이 갑자기 개량되는 것은 아니다. 불교학의 학문적 성과들이 국어로 많이 번역되면 한국 불교계에 큰 도움이 되기만 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소박한 동심에 불과하다. ‘번역하기’는 ‘종교 사업’이기 이전에 하나의 ‘문화 사업’으로서, 지식을 향한 수요와 공급의 수준에 따라서 경제학적 법칙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이다. 아무리 우수한 학자의 연구서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조금도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 애써 번역할 필요가 있을까. 그 때에 번역하는 일은 바다속에 들어가서 모래알을 헤아리는 것처럼 쓸데없는 일이 되어버리고 만다. 학문의 발전은 욕심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학문은 지식을 필요로 하는 마음이 있는 곳에서 시작되며 거기에만 있다. 학자에게 ‘사실’은 ‘믿음’보다 앞선다. 만약 ‘믿음’을 위하여 ‘사실’과 ‘사실로부터 발견된 법칙’을 거부하는 ‘학자’가 있다면 그는 그 순가부터 학자가 아니다. 비록 그 믿음에는 약속된 구원이 있더라도 그는 다만 ‘믿는 자’일 뿐이다.
때로 이야기를 들어보면, 외국의 일류급 학자들의 연구서를 번역해내는 일이 마치 식은 죽 먹듯이 쉬운일인 듯 알고있는 사람들이 있다. 전문적인 불교 학자들의 연구서들은 학문적으로 대단히 심오하고 어려운 내용들을 담고 있으며, 그들이 사용하는 세련된 방법론들은 최고 학문의 경지를 보여주는 것들이어서, 학문의 잡적도가 떨어지는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기에는 쉽지 않은 부분이 많다. 한국 불교적인 사고 방식에 투철한 순수 민족주의자들과 애국지사들은 이 장면에서 현기증을 느낄 수밖에 없다. 더욱 중요한 점은, 권위있는 불교학자들의 연구서 대부분이 한국 불교적 믿음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인간학적 탐구로서 학문적 연구 결과들’이라는 사실이다. ‘서양학자들에 의하여 역사적 또는 인간학적, 철학적 학문으로서 연구되고 이해된 불교’와 ‘호국불교론자들의 민족불교’ 사이에서 우리는 무한한 거리감을 느낀다. 종교는 믿음에, 학문은 사실에 바탕을 두어서 서로 뿌리내린 터전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양 학자들의 불교 연구는 한국불교를 위하여 별로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소박한 믿음’에 상처를 주는 해독을 끼칠 수도 있다. 이와 같이 잠정적인 결론을 내려놓고 보면, 우리는 불교학 전문 서적들의 번역이 대부분 쓸데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수요에 닿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은 노력의 낭비일 뿐이다. 더욱 바람직한 일은 선불교사의 한문 고전들을 국어로 잘 번역하는 일이 독립 자활의 길이 아닐까.
Ⅲ
결론을 간략히 정리해 보면, 번역은 문화 사업으로서 수요와 공급의 수준을 맞추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별로 필요하지도 않은 책들을 번역해 보겠다고 욕심을 부려서 조잡한 결과를 만들고 만다면, 나중에 정작 인연이 성숙되었을 때에 올바르게 될 일을 먼저 망쳐버린 꼴이 되고 말 것이다. 그 많은 책들을 다 번역해서 어디에 쌓아 놓으려는가. 모두가 알고 보면 부질없는 것들이요, 휴지조각일 뿐이 아니겠는가. 수만권의 장서를 백짓장처럼 볼 줄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도 좋다.
‘믿음’을 위하여 반드시 지식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지식은 기쁨을 주되 구원을 약속하지는 않는다. 약속된 구원은 오로지 믿음에 있을 뿐이다. ‘지식’인가 아니면 ‘구원’인가 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에 달린 문제다. 대학교의 학문은 ‘구원’을 약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구원의 길을 열어주는 학문이 있다면 그것은 ‘기적’이리라. 불교는 해탈을 위한 종교이므로 어쨌든 불교에 대한 연구는 구원과 관계된다. 그렇게 보면 무분별한 번역은 종교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 필요한 사람은 영어를 공부해서 원서를 독파할 수 있으리라. 가장 선불교적으로 말한다면, 학술 서적의 번역 사업은 굳이 필요하지 않다. 해탈은 책에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선불교를 위한 번역은 크게 필요하지 않다는 결론이 나온다. 학술서적들의 번역은 선불교 전통에 공헌할 중요한 것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러므로 번역은 학문적 필요성이 있을 때 대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