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학적 입장에서 본 한국 불교의 번역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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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전재성
1992년 06월 124호
번역이란 언어를 매개로 하는 작업이다. 언어는 그곳에서 대화 상대자에 대한 이해와 사건에 대한 의사 소통이 실현되는 중심이다. 번역은 이러한 언어적 조건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한다. 특히 동질적인 언어 사이의 대화가 아닌 이질적인 언어사이의 대화를 전제로 하는 번역이나 통역은 언어 과정에 대한 풍부한 해석을 요구한다. 번역이 대화와 마찬가지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은, 번역할 때 번역의 대상이 일상 세계 속에 살아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번역해야 함을 뜻한다. 번역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뜻을 왜곡하지 않고 잘 전달해야 하지만, 번역은 새로운 수용 언어 세계에서 수행되므로 그 의미 전달을 새로운 형식으로 해야 한다. 따라서 모든 번역은 해명이며, 번역가에게 주어진 단어에 부여하는 해석의 수행 또는 완성이다. 번역은 명증적인 것의 미개를 통하여 정교하게 이루어져야 하며, 그 과정에서 언어성에 대한 자각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러나 거기에도 한계는 있다. 언어의 정교한 시설이 대화에서 정상적인 사태가 아닌 것처럼 번역에서도 이질적 언어에 대한 우리의 활동은 정상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번역에 의존하는 것은 상대방이나 독자에 대한 자발적인 금치산 선고와 다름 없는 것이다. 번역이 필요한 곳에는 원전어의 정신과 번역어의 정신 사이에 결코 극복할 수 없는 틈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이러한 경우에 의사 소통은 공통적인 의사 소통의 세계에서 실제로 만날 수 있는 번역가들 사이에만 일어난다. 그러나 언어에 대한 이해는 오히려 삶의 과정이며 그에 대한 해석학적 문제는 언어 숙달의 문제가 아니라 언어 매개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며, 언어 숙달은 그 전제 조건일 뿐이다. 번역의 성실성은 이러한 언어에 대한 기능적 수행뿐만 아니라 언어가 지시하는 사건에 대한 해명이나 해석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불확실한 결정 앞에 놓이게 된다. 우리가 원전에서 어떤 중요한 문맥을 끄집어내려 하면, 우리는 동일한 원전의 다른 부분을 물러서게 하거나 억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해석이라는 과정의 첫 난점이다. 이런 조건에서 번역하는 사람은 자명하지 않은 것을 공표해서는 안되겠지만, 원전에서조차 실제로 모호한 겨우에는 해석학적 한계 상황이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럴 경우에는 지양될 수 없는 간격을 지닌 대화에서 타협이나 협상이 있듯이, 번역가는 충분한 숙고를 통해 상대방, 즉 원전 저작자의 입장으로 돌아가서 해결을 찾을 수도 있다. 이것은, 대화할 때 자신의 주장을 견지하면서 상대방의 주장도 받아들일 때 통일적인 의사 교환이 가능한 것처럼, 번역가가 자신의 모국어에 대한 권리를 지키면서 이질적인 언어를 자신에게 쓸모있게 받아들일 때 가능하다. 번역의 한계상황에서도 사건은 언어로부터 격리되어서는 안 된다. 사건을 언어로 옮기는 번역가만이 가장 진실하게 묘사할 수 있는 것이다. 번역과 해석의 상황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앞의 글은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 가운데 번역에 관한 것을 필자 나름대로 요약한 것이다.
올바른 번역의 척도는 참으로 번역의 해석학적 성실성을 얼마나 요구하느냐에 달려 있다. 한국에서의 번역 출판의 문화는 특히 이러한 해석학적 성실성에 비추어 볼 때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물론 이러한 사정은 출판 문화를 뒷받침하는 경제적 및 학문적인 토대의 견실성과 긴밀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특히 학문 분야를 언급한다면 한국의 모든 인문 사회과학이 봉착하고 있는 기초학문의 토대의 결여와 학문의 낙후성에 기인한다. 아울러 불교학도 그 한 분야로서 불교 출판 문화를 결정하는 요인으로 그와 같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고전의 번역에서는 이러한 번역의 성실성은 그것이 뒷받침하는 경제적 지원의 결여와 전문 인력의 부족, 국민적 무관심속에서 엄청난 시련을 겪고 있다. 불교계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성전의 번역 곧 역경은 사부대중의 무관심, 역경 교육의 부재, 불교학계의 구태의연함 들이 겹쳐서 한글대장경이 일부 국역되고 나서 십여 년 동안 역경이 중단되고 있고 그나마 번역된 것도 많은 부분이 해석학적 한계 상황에 봉착해 있다. 말하자면 문헌학적 또는 해석학적인 방법론이 배제된, 임의적이고 원전에 입각하지 않은 일본어로 중역함으로써 학문적 성실성을 기대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물론 이런 상황은 불교학계만이 당면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모든 고전 번역에서 문제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고전번역에서뿐만 아니라 일반 서적 번역에서도 그러한 사정은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최근 이십여 년 동안 경제 발전과 더불어 출판계도 상당한 성장을 거듭해 가면서 주로 많은 서적들이 번역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국내게 보급되었다.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열악한 출판계의 상황을 감안한다면 대단한 성공을 이룩해 내었으나, 번역의 성실성이란 문제를 살펴볼 때에는 최근에 문제가 된 거품 경제의 환경만큼이나 열악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떤 책이든 번역의 한계 상황에서 그것을 성실히 해명해 나간 책은 매우 드물며, 타협이나 협상에 의한 해명조차 명확히 밝히지 않고 오히려 원전어의 의미를 왜곡시키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일례로 모 유명출판사의 베스트셀러였고 유명학 학자가 번역한 어떤 책은 원서가 독일어인데 영어에서 중역한 것으로 원어 spekvlieren을 ‘투기하다‘ 라는 뜻으로 번역해야 하는데 ’사유하다‘ 로 해석하여 문맥 전체를 왜곡시키고 있다. 자신이 초래할 수 있는 이러한 한계 상황 때문에 서양보다는 문화적 감각과 언어적 감각에서 좀 더 친화성을 지닌 일본 번역서를 통한 중역이 선호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출판사는 값싼 노동력 때문에 토씨만 바꿔 번역하는 일본어를 통한 중역을 부채질하고 있어 번역의 성실성은 이중으로 위협받고 있다. 이런 번역의 상황에서 한국 독자들은 일본적 사유앞에 자발적인 금치산 선고자로서 비참하게 남아 있는 실정이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불교계의 출판 문화에서 두드러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최근 쏟아져 나오는 불교계 서적의 90퍼센트 이상이 일본 불교 입문서나 일서를 통한 중역이며, 거기에는 역자의 성실성을 반영하는 논평이나 역자주가 결여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불교 관련 단어의 음사에는 아무런 학문적 기준이나 원칙이 없이 일본식 발음을 따르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불교용어의 일본식 명명에 대한 아무런 비판적 성찰이 없이 모사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리고 역자의 한계 상황에 봉착해서는 끝까지 성실성을 지켜 내기보다는 번역을 왜곡시키거나 누락시키는 일이 흔하다.
최근에 일부에서 점차 번역되기 시작하는 영문으로 된 불교 서적의 보기를 들어보면, 그것들이 대부분 범어나 서장어, 중국어 등의 원전에 기반을 두고 있으면서도 그것의 번역에서는 서양 철학에 바탕을 두고 이미 형성된 영어의 번역 용어가 사용됨으로써 일본어에서 번역된 한문식의 불교 서적과 날카롭게 맞서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기독교 계통의 번역서들은 이러한 의미에서 서양 철학적 사유 앞에 한국인 독자에게 금치산 선고를 내리는 것과 다름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자들은 갈 길 몰라 헤매고 있다.독자들의 끝없는 방황의 언저리에는 번역 자체의 성실성의 결여가 놓여 있다.
번역은 해석이며, 해석은 일상적인 우리 삶의 한 과정이라고 할 때, 번역은 우리의 일상적 삶이 뿌리내리고 있는 그 정서를 반영함으로써만 증대될 수 있는 것이다. 번역가가 모국어에 대한 권리를 확신에 차서 주장하면서 이질적 언어를 자신에 수용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번역의 성실성에 토대가 구축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아마도 세종대왕부터 나오기 시작한 불경 언해본이 후대의 언문 소설처럼 계속 번역되어 나왔더라면, 일상 언어 속에서 그 번역의 성실성이 성장해 갔을 것이다. 한편 학문적으로 더욱 더 원칙적인 언어인 범어나 서장어에 대한 탐구도 병행되었을 것이며, 관세음보살도 하느님이나 하나님으로 번역되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민족 정서는 불교 속에서 더욱 풍부해졌을 것이고, 모든 외래 문명도 그 이름 아래 동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고, 번역도 풍부한 해석학적 결실을 맺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나아가서는 지금의 기독교의 역할을 불교가 도맡을 수 있는 토대를 구축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