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공, 무학스님과 더불어 여말 선초의 삼대화상으로 일컬어지는 나옹스님은 그 호방한 선풍과 드넓은 교화력으로 유명하다.
원나라와 고려국을 두루 편력하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선풍을 휘날리며 위로는 황제에서부터 아래로는 천민에 이르기까지 감화력을 뻗치지 않은 곳이 없다.
특히 인도선의 밀지를 전수한 지공화상에게서 처음 인가를 받고 임제종의 법손인 평산처림平山處林선사의 법을 잇는 등 호방한 선 세계를 열어 갔다.
스님은 고려 사회의 일반적 풍토와 같이 어려서부터 출가하기를 원했으나 부모의 불허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나이 이십에 이르러 친구의 죽음을 보고 충격을 받아 죽음의 의미를 이웃에 물었으나 시원스럽게 대답해 주는 이가 없었다.
출가를 결심하고 제방을 편력하다 양주 회암사에 이르러 주야로 장좌불좌의 고행정진을 시작한 뒤 사 년 동안의 정진을 통하여 깨달음을 증득하였다. 그 뒤 중국에 건너가 명안종사를 찾아 도를 묻고자 하여 충목왕 삼년(서기1347년)에 고려를 떠나 연경의 법원사에 가서 지공화상을 참배하였다.
지공화상이 “선에는 당안이 없고 법은 밖이 없건만 뜰 앞의 잣나무는 사람의 정을 아누나. 청량대 위에 청량한 햇살 동자가 헤아린 모래는 동자가 알리라” 하니, 나옹화상이 이에 답해 “들어감에 당이 없고 나감에 밖에 없어 진진찰찰이 선불장이요 뜰 앞의 잣나무가 다시 분명하니 오늘이 첫여름 4월 5일 이로다” 하였다.
그 뒤 임제종의 평산처림 선사를 참배하고 중국의 각지를 주유하며 기이한 체험과 넓은 감화를 준다. 다시 공민왕 칠년 귀국하여 신광사에 주석하게된다.
공민와에 의하여 왕사로 추존되어 송광사에서 주석하다 서기 1376년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니 세수 오십칠이었다.
저서로 ‘나옹집’이 있으며 그의 ‘자심삼보설自心三寶說’은 자신의 독특한 선풍의 면모를 보게 한다.
또 우리가 지금 조석으로 염하는 장엄 염불의 한자락이 나옹스님의 유작임은 매우 뜻 깊어 보인다.
아미타불재하방 阿彌陀佛在何方
착득심두절막망 着得心頭切莫忘
염도염궁무염처 念到念窮無念處
육문상방자금광 六門常放紫金光
아미타불은 어디에 있는가
마음 가운데 붙들어 잊지 말지니
생각하고 생각해 생각이 다하면
여섯문으로 항상 광명을 발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