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사 오현스님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호계삼소 - 박원자
1992년 06월 124호
어린 시절 시조시를 열심히 외웠던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다. 구름에 가려진 달이나 창호지에 머물러 있는 햇살처럼 은근하고 여운이 길었던 시조시. 그 시조시가 주는 그윽한 정취는 오랜 세월 동안 우리 정서의 밑바탕을 흘러온 듯싶다. 시인을 일컬어 ‘삶의 높이의 척도’라 했던가. 문명, 그밖의 어느 것에도 물들지 않는 본질의 생명을 지녔기에 그러한 찬사가 붙여졌으리라. 우리가 현실에 오염되지 않은 시인을 그리워하는 것은 원초 모습 그대로의 고향을 그리는 향수에 다름아닐 것이다. 그러한 그리움을 가지고 낙산사엘 갔다. 그곳엔 시조시를 쓰고 있는 시인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동해의 짙푸른 물결을 뒤로하고 있는 낙산사엔 산사에서 느낄 수 있는 정적말고도 출렁이는 파도소리와 비릿한 바다 내음이 있다. 드넓은 낙산사의 도량엔 관광객들의 잦은 발걸음 소리가 초여름의 윤기나는 햇살 속에 분주해 보였다. 관음기도 도량으로 유명한 낙산사 한쪽에서는 보타전 불사가 한창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삼십이 관음신상을 모시게 되는 불사다. 두해 전 남북통일염원과 국태민안을 기원하고 낙산사 대중화합을 위해 시작된 보타전 불사는 ‘일도삼례’ 즉, 절을 세 번하고 한 번 불상을 깎는 정신이 스며 있다. 그러한 정신으로 일천 개의 관음보살상 한불, 한불을 두자 높이의 나무로 다듬고 깎아 내고 있다. 공사가 한창 진행중인 보타전 지붕 꼭대기에 회색 장삼자락 하나가 동해의 바다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뒷짐을 지고 여기저기 둘러보고 있던 스님 한 분이 크고 탐스러운 돌들을 쌓아 만든 돌담 밖에 모습을 드러냈다. 보타전 불사를 발기해 불사의 모든 일을 주관하고 있는 낙산사의 회주 스님이며, ‘오도송’과도 같은 심도 깊은 시조시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오현스님이었다. 스무해 넘게 백여 편이 넘는 시를 써왔으면서도 스님에겐 그 흔한 시작 노트 하나 없다. 1979년 ‘심우도’란 시집을 한 권 펴냈는데 지금 스님의 수중엔 한 권도 남아 있질 않다. 이리저리 옮겨다닐 때마다 가지고 다니기가 번거롭기도 해서이지만, 스님의 시집은 정작 다른 곳에 있다. 그곳은 다름아닌 스님의 머리속이다. 자신의 작품 백여 편을 거의 외우고 있어 누구라도 제목이나 내용을 이야기할라치면 스님 머릿 속의 시집은 정확히 펼쳐진다. 자신이 쓴 시를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 못하는 것은 좋은 시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게 스님의 지론인데, 다른 사람의 작품도 마음에 드는 것은 스님의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이십대 초반, 금오산 자락의 산중에 초옥을 하나 지어 놓고 머루랑 다래를 따먹으며 토굴 생활을 했었다. 그곳에 문학을 전공한다는 학생 둘이 놀러왔다. 그들은 밤새도록 무슨 얘기인지를 주고 받으며 흥겨워했다. 같은 또래로 보이는 그들에게 스님이 물었다. ‘뭐가 그리 좋습니까?’ 그들은 인생이며 시에 대해 얘기했고 그들이 지었다는 시를 읊어 주었다. 그리고 떠나면서 문학잡지 한 권을 주고 갔다. ‘현대문학’이란 잡지로 기억된다. 스님은 그들이 주고 간 잡지를 뒤적이며 ‘이만하면 나도 쓸 수 있겠다’ 싶어 시 한편을 써 보았다. 그럴 즈음 그 학생들이 다시 왔고 그들에게 시조 한 편을 내밀었다. 그들이 서울로 가지고 간 그 시조가 그 해 동아일보 신춘문예 최종심사에서 당선작과 겨루다가 밀려났다. 그 뒤 청년들이 자주 초옥에 놀러 왔고 그들이 서울로 가지고 간 스님의 시조가 ‘시조문학’에 추천 완료되었다. 그렇게 시조를 썼고 시인이 되었다. 그때가 1968년이었는데 승려 시인으로서 최초의 문단 데뷔였다.
스님의 시는 ‘오도송’같다는 게 주위의 지적이다. 작품의 대종을 이루고 있는 스님의 선시는 우리가 상상의 나래를 펴 포착할 수 있는 인식의 세계를 넘어선 위치, 즉 깨달음 혹은 벗어남을 통해 무념무상의 대자유를 만끽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스님의 작품은 때로 동시에서 얻어지는 맑은 순수에 대이는가 하면, 때로는 언어의 유희라고 비약하여 생각할 수도 있는 난해시로 여겨지기도 하나 이와 같은 불가해는 화두에서 부닥뜨리는 난해와 동일한 위치로 평가받는다. 이밖에도 예리한 감성의 말뚝을 굵직굵직하게 시조에다 박아놓고 감동의 영역으로 몰아넣고 있는 스님의 역량이 인정되어 지난해에는 제4회 현대시조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절에서 있으니 ‘내가 누구인가’ ‘사는 게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문득 형언할 수 없는 것들이 떠오르면 그것을 언어를 빌려 표현한 것, 그것이 나의 시입니다. 성격상 나는 논리적인 것을 싫어해요. 그래서 사람들은 내 작품을 보고 ‘법어 같다’는 얘기를 많이 합니다.”
밀양의 상남에서 태어난 스님은 어릴 때부터 밀양 성천사에 드나들며 소꼴도 먹이고 대처승 부인들의 잔심부름을 했다. 비구, 대처승이 한절에 함께 기거하던 정화 이전의 시절이었다. 왠지 그곳의 스님들이 좋아 절에 드나들다가 절물이 들었고, ‘스님이 된다’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 없이 열다섯 살 때 출가를 했다. 동산스님의 도반으로 그 시대의 대단한 강백이었던 성천사 주지스님 배인월스님에게 머리를 깎았다. 천부적으로 남에게 배우는 성격이지를 못해 출가 전 학교와 사회에서는 물론, 출가해 큰스님 밑에 있으면서도 무엇을 배우질 못했다. 출가하면 으레 거치는 강원이나 선방에 있어 본 적도 없다. 열다섯 살 때 헤르만 헷세의 ‘싯다르타’를 읽고 그 소설의 주인공처럼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한 의식이 승려 생활을 하면서도 늘 떠나지 않았고, 스님의 삶에 깊은 영향을 준 것 같다. 처음부터 산중의 학덕 높은 스님보다는 동냥승을 동경했다.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시장이나 공단 혹은 어시장 같은 데에서 동냥을 해다가 얻은 돈도 세어 보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그 언제나 자기로부터 떠나는 탁발승이기를 원했던 것이다. 남에게 배움을 받지 못하는 타고난 성격과 탁발승에 대한 동경으로 한곳에 머무르지를 못하고 속리산, 금오산, 가야산 등을 다니면서 산중 생활을 했다. 스님은 강원이나 선방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누구 밑에서 특별히 공부를 한 적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전의 분류나 맥락을 어느 강원의 강백보다 더 잘 짚어 내고 있다는 것이 스님을 잘 알고 있는 이들의 귀띔이다. “언젠가 오현스님께서 무슨 자료를 좀 뽑아오라고 이르셨어요. 몇날 며칠을 찾아봐도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어 전전긍긍하다가 스님께 찾지 못했다고 여쭈었지요. 그랬더니 그 자리에서 ‘무슨 책, 어디어디’를 찾아보라고 하시더군요. 스님이 일러주신 책에 정확한 자료가 있었음은 물론이지요. 스님은 ‘생이지지生而知之’한 분이 아닌가 생각돼요. 어느 부분이나 모르는 게 없으신 분이니까요.” 스님을 모시고 있는 한 상좌스님의 얘기다. 어느 한곳에 매이길 싫어하고 끝없이 ‘나’로부터 떠나는 탁발승이길 원했던 스님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종단의 명리 쪽에 발을 들여놓았다. 구미의 해인사 주지를 거쳐 총무원 교무국장, 설악산 신흥사 주지를 지냈다. ‘불교신문’에 많은 글을 썼고 ‘법보신문’ 창간에 주역을 맡기도 했다. “도인은 한마음이어야 하는데 나는 항시 양두불이예요. 마음은 탁발승이기를 바랬으면서 몸은 종단의 명리쪽에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경전에도 나타나듯 명리승이 성불에 좀 늦을 뿐 결코 나쁜 것은 아니지요.” 응축된 사고를 운율로 토해내는 시인이어서일까. 스님의 말씀은 너무나 함축적이어서 마치 선문답을 하는 듯했다. “출가하셔서 산중에 홀로 정진하셨던 때의 얘기를 좀 들려주시지요.” “남들처럼 참선이나 용맹정진을 한 게 아니예요. 절 아래 있는 굿당에 무당들이 와서 굿을 하고 나면 그들이 남겨 두고 간 떡이나 과일을 먹는 재미로 살았어요.” 언어 너머에 숨어있는 뜻을 캐내는 일은 듣는 이의 몫이리라. “ ‘시란 경허鏡虛를 만나는 일이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데, 경허는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요.” “경허스님을 일컫는 거지.” 왜 시가 경허스님을 만나는 일과 동격인지 듣고 싶은데 더 이상 말씀이 없다. 그 대답 뒤의 여백 또한 듣는 이의 차지였다. “시집 ‘심우도’가 출간되었을 때 미당 서정주 씨와 쌍벽을 이룬다는 찬사를 받았지요.” “그건 순전히 이근배씨가 쓴 ‘발문’ 덕분이예요. 그이가 내 시집의 발문을 아주 잘 써주었거든.” 실타래를 던져 줄 뿐 결코 그것을 푸는 법이 없다. 한 올, 한 올 실타래를 푸는 작업은 묻는 이에게 맡기는 것이 스님의 독특한 화법임을 인터뷰가 끝날 무렵에야 짐작하였다. 인터뷰 도중 우리는 커다란 원탁이 놓여있는 넓은 방에서 스님이 거처하시는 작은 방으로 장소를 옮겼다. 자그마한 창문으로 초여름의 신록이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왔다. 문밖에선 수학여행중인 학생들의 재잘거림이 쉼없이 들려왔으나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부드러운 훈풍에 휘감겨 사라지곤 했다. 스님은 ‘불교신문’의 편집국장과 주필, 논설위원을 지내던 시절, 당신이 인터뷰했던 기사들을 철해놓은 신문을 꺼냈다. 빛바랜 종이 위에 꼭꼭 박혀진 활자들을 보며 시집 한 권조차 지니고 있지 않은 것과는 퍽 대조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일행 가운데에 누군가가 몇 해 전 어느 잡지에 실렸던 시를 떠올렸다. 매우 인상깊은 시였는데 제목을 잊어버렸다며 기억나는 내용을 조금 이야기하자, 스님에게서 즉각 그 시가 술술 흘러나왔다. 우린 스님이 읊는 그분의 시조에 귀기울이면서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시조가 주는 여운이 책상 위에 출렁이는 한낮의 촛불과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