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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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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비의 소리 - 원택 1992년 06월 124호
밤 아홉시.
“스님, 큰일났습니다. 터서리에 산불이 크게 났습니다. 큰일났습니다.”
막 취침을 알리는 종소리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다급한 목소리로 가야산 자락에 산불이 크게 났다는 전갈이 전해졌습니다.
강원 입승스님께 대중 동원을 부탁하여 허둥지둥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이미 그곳에서는 농감 스님과 산감, 가야면장과 의용소방대 등 부락 주민들이 진화 작업을 펴고 있었지만, 워낙 불길이 거세다 보니 산불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리며 애를 태우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때 백여 명의 해인사 승가대학 스님들이 손에 낫이나 곡괭이, 삽, 쇠스랑 들을 들고 현장에 도착하여 삼삼 오오 조를 짜서, 기세좋게 타오르는 불길을 잡으러 산으로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밤 열두 시.
불길은 멈출 줄 모르고 온 산을 집어 삼킬 듯 넘실거리며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저렇게 기세좋게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혹시나 대중스님들에게 무슨 일이나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과 방정맞은 생각이 떠나지 않아서 마음이 초조하였습니다.
세벽 세 시.
가야산을 다 태울 듯 기세좋게 타오르던 불길이 차츰 잡히니 갑자기 주변이 어두워졌습니다. 최소 인원만 남고 하산하는데, 주위가 어두워지니 어딘가 어딘지 분간이 되지 않아 불 끄고 하산하는 길이 오히려 고생길이 되었습니다. 산기슭에 피운 모닥불에 비치는 스님들의 모습은 참 볼 만했습니다. 굴뚝을 금방 청소하고 나온 사람처럼 너나없이 얼굴이 검정 투성이며, 손등이나 팔뚝은 군데군데 긁히고 옷은 찢어져 있어 무슨 전쟁터에 나가 특수 작전이라도 하고 돌아온 몰골이었습니다. 다행히도 크게 다친 사람 없이 무사히 해인사로 돌아오니 새벽 네 시가 넘었습니다. 대중스님들이 밤새도록 고생해 준 덕분으로 그렇게 기세등등하던 불길을 잡았다고 생각하니 불보살님과 대중스님들에게 무어라 고마움을 표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대중스님들의 고생을 목격하면서 저는 어떤 상념을 떠올렸습니다.
‘아하, 그렇구나! 오늘밤 우리 대중스님들이 가야산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 몸 돌볼 새 없이 물불 가리지 않고 불을 껐듯이 우리 선조들도 그렇게 가야산을 지켜왔고 앞으로도 후배들이 이 가야산을 지켜 갈 것이다. 이렇게 불길 속에서 가야산을 지키려 했던 스님들의 이런 열정이 해인사를 오늘까지 지켜 왔구나.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가야산과 해인사를 어떤 재난에서도 지켜 내야 한다는 스님들의 간절한 마음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새삼 대중스님들께 고마운 마음뿐입니다. 우리는 국력의 흥망성쇠에 따라 외침을 많이 받아왔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몽고의 침략은 삼국 시대나 고려 시대의 웬만한 유적을 제멋대로 만들었으니 황룡사 구층탑, 금당 장육굴상도 그때 사라져 갔습니다. 그 뒤로 조선조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원들이 불태워지고 파괴되었습니까? 그리고 육이오 때에는 그나마 난리를 피해 남았거나 임란 뒤에 복구된 사원들이 전쟁의 불길 속에서 얼마나 많이 사라져 버렸습니까? 그 가운데서도 빨치산을 토벌하느라고 타 버린 가람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때로는 문짝만 태워도 될 일을 군 작전의 편의를 위해 산간의 절들을 불태워 버렸던 것입니다.
군 작전상 오대산 상원사를 불태우려는 것을 “나부터 먼저 불태우고 상원사를 불질러라”고 소리치며 버티신 하남 큰스님의 법력에 인솔 장교는 상원사 법당 문짝만 뜯어 태우고 갔다는 일화나, 해인사 폭격을 명령받았으나 그 작전 임무 수행을 회피한 김영환 대령의 일화는 우리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오늘도 상원사의 문수동자를 친견할 수 있고 해인사에서 팔만대장경판을 참배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제 남북 통일을 눈앞에 두고 국민 소득 일만 불을 입에 올리는 시점에서 조계종단에서는 육이오 전사 기록들을 면밀히 조사하여 아군에 의하여 작전상 편의에 따라 불태워진 사찰들을 조사하여 그 복원을 정부에 주장해야할 것입니다.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산문을 지켜 왔던 선조들의 얼을 이어받아 우리는 다시 금강산에, 지리산에, 태백산에 옛 영화를 재현해야 할 것입니다. 해인사를 참배하는 여러분들께서는 가야산과 해인사를 역사 속에서 지키며 묵묵히 정진하는 산중 대중스님들에게 정중히 고마운 마음을 보내주었으면 합니다. 우리 다 함께 가야산을, 해인사를 자손 만대로 지켜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