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니 저기가 어딘가? 불이야, 불!”
“불이라니, 불이 어디서 났는가?”
“영묘사(靈廟寺) 쪽입니다.”
“영묘사라니? 어서 가보자. 영묘사가 어떤 절인데 불이 난단 말인가?”
“불이야, 불이야!”
영묘사는 선덕여왕 4년(635), 양지 (良知) 스님을 비롯한 온 서라벌 백성들이 힘을 모아 지은 절이다.
“허둥대지만 말고 어서 물을 날라라.”
“불을 꺼라.”
“빨리 비키시오. 그 쪽이 무너지겠소.”
“누가 부처님을 모셔내와야 할 텐데…”
영묘사에 불이 났다는 보고는 왕에게까지 갔다. 그렇지 않아도 치솟아오르는 불길과 연기에 놀란 선덕여왕이 신하를 막 보냈을 때였다.
“왕이시여, 영묘사에 불이 났습니다.”
“아니, 어찌해서 불이 났단 말이더냐? 오늘 낮에도 내가 가서 부처님께 향불 공양을 올리지 않았더냐? 내 정성이 부족해서란 말인가? 정치가 밝지 못하여 부처님이 경계하심이란 말인가?”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영묘사의 불은 지귀 (志鬼)라는 자의 마음불〔心火〕이 그 원인이 되어 난 것이라 하옵니다.”
“무엇이? 그런 일이 어찌…. 알았으니 물러가라.”
여왕의 용안으로 그늘 한 자락이 잠시 스친다.
‘아 내가 저를 위해서 더 무엇을 어찌한단 말인가. 제 진정을 알아주고, 그래서 일부러 영묘사까지 가서 그 마음을 달래주었거늘…. 그 어지러운 가슴의 불이 오히려 내 팔찌로 해서 더 치솟아 타고 말다니…. 그를 어찌 내가 다스리리. 서라벌의 지혜, 국법의 불길이 그를 어찌 다스리리. 옴 삼다라 가댝 사바하…’
2
‘이 목마름은 언제쯤 끝난단 말인가. 타오르는 이 간절함은 어찌 잠재우는가. 이 피마름이여! 차라리 그 불길로 나를 태워 한 줌의 재가 되게 하라. 그리고 서라벌 네거리에서 뭇 사람들의 비웃음받으며 발바닥에 짓밟히게나 하라.’
수척한 두 어깨에 머리를 묻은 활리역(活里驛)의 천민 지귀. 불공드리러 가는 선덕여왕을 먼발치에서 보게 된 뒤부터 하루가 다르게 그는 야위어만 갔다. 한 번 스쳐간 그 자태, 그 그림자를 가슴에서 지우려고 오늘도 몸부림쳐 보건만 그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불길이 갈수록 온 몸을 휩싸고 돈다.
‘여왕을 사모하는 것이 왜 죄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내가 바라는 것, 내가 가지고자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질않은가. 오직 그를 향한 마음 하나뿐. 그런데 왜 이것이 죄란 말인가’
“지귀야, 너 또 그러고 앉았구나. 뭐라도 좀 먹고 기운차려 나무라도 한 짐 해야지. 이래선 사람 사는 집 같지도 않구나.”
“죄송해요, 어머니. 못난 놈을 용서하십시오. 애쓰고는 있지만 저도 제 마음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에그, 전생에 지은 죄가 많은 게야. 언감생심이지, 지존한 여왕을 마음에 담다니…. 그러다 소문이라도 날 양이면 비명횡사하기 십상이지.”
“걱정마십시오, 어머니. 저는 다만 아주 먼 곳에서나마 행차하시는 그 모습을 한 번 법고 싶을 뿐 그 이상의 욕심은 추호도 없읍니다. 누구보다도 제 자신의 천한 신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마음마저도 죄가 된다면 그건 어찌하겠읍니까. 설혹 이 절실한 마음이 죄가 되어 목베임을 당한다한들 무슨 여한이 있겠읍니까? 저 같은 목숨 천을 모은들, 만을 모은들 지극히 귀하고 아름다우신 그분을 어찌 감히 기웃거릴 수나 있겠읍니까?”
“쯔쯧, 불상한 것!”
3
“지귀야, 넌 목숨이 도대체 몇이나 되길래 그런 얼토당토 않는 꿈을 다꾸냐? 사람이 주제를 알아야지. 네가 감히 왕의 지아비가 되겠다고?”
“아니 이 녀석! 너 그런 소리 한 번만 더 했다가는 살아남지 못할 게야.”
“왜 그렇게 펄쩍 뛰고 그러냐? 벌써 소문이 온 동네에 파다한데. 어쩌면 이미 궁궐까지 들어갔는지도 모르지. 활리역의 천하디 천한 총각놈이 여왕을 짝사랑하여 상사병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말이야.”
“아니, 저, 저 녀석이!”
그랬다. 지귀에 대한 소문은 동네 우물가에서, 지겟군들의 나뭇짐 사이에서, 사람들이 모여앉은 정자나무 그늘에서, 섬지어 골목길의 꼬마들 틈에서조차 피어오르다 무성해져서 마침내 선덕여왕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일찍이 슬기롭기로 이름난 여왕은 곰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한참만에,
“사흘 뒤 영묘사에 불공드리러 갈 것인즉, 이를 널리 소문나도록 하라.”
참으로 자애로운 결심이었다. 마침내 왕의 행차 예정은 지귀에게도 전해지게 되었다.
‘부처님! 참으로 고맙습니다. 당신의 자비로우신 베푸시입니다. 이 한 몸 오롯이 사루어 공양한들 어찌 그 크신 은혜에 미칠 수 있겠읍니까? 묶이고 묶인 이 몸과 마음은 먼빛으로나마 그분을 한 번 뵙는 것으로 풀리고 또 씻길 것입니다. 이제 마침내 그분을 뵙게 되었읍니다. 정말로 맑아져 당신께로 가고자 합니다.’
초췌하고 창백한 안색이었지만 어느 때보다 광채 띤 그의 두 눈에 결연한 의지가 서린다.
“어머님. 출가하여 부처님의 법을 배우고자 합니다.”
“아니, 갑자기 그건 또 무슨 말이냐? 오늘 영묘사에 왕께서 행차하신다니 이제 네 소원을 풀게 되질 않았느냐. 그런데 이 무슨 날벼락 같은 말이야?”
“알고 있읍니다, 어머니. 다 부처님의 가피력이지요. 가는 길에 영묘사에도 들를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멀리서 한 번 뵙는 것으로 이 어지러운 마음의 불기둥을 모두 잠재울 것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담담해져서 부처님께 귀의할 것입니다. 더 이상 이렇게 몸과 마음이 시달리며 살 수는 없으니까요.”
영묘사 법당 앞 탑(塔) 아래에 기대어 앉은 지귀의 귀에는 법당에서 불공 올리는 여왕의 목탁소리만이 울려퍼진다.
“또르르 똑, 또르르 똑…”
참으로 오랜만에 지귀의 입가에는 평온한 미소가 번진다. 오래도록 애타는 갈망으로 지친 그의 심신은 어느새 목탁소리를 따라 깊은 잠속으로 혼곤히 빠져들고 만다.
“이 자가 그 불경한 소문의 장본인 지귀라는 천민입니다. 마마.”
여왕이 예불을 마치고 법당을 나오자 그녀를 모시던 한 신하가, 여전히 죽음같은 잠에 가라앉아 있는 지귀를 가리킨다. 한참을 내려다보던 여왕은 가만히 황금팔찌를 풀어서 살포시 그의 가슴 위에 올려 놓는다.
그렇게 여왕이 지나간 줄도 모르고 깊이 깊이 잠든 그를 깨운 것은 기울어가는 산그늘이었다.
그리고 영묘사 탑전으로부터 불길이 치솟기 시작한 것은 잠시 후의 일이었다.
4
“엊그제 무엇 때문에 영묘사에 불이 났었대?”
“이 사람, 어둡긴 …. 그 지귀란 놈 있잖아 여왕을 사모하는 그놈 마음의 불이 그렇게 영묘사를 태운 거라네.”
“아닐세. 그 타고 있는 가슴에 정작 불씨를 던진 건 오히려….”
“그게 무슨 말인가? 불씨를 던졌다니?”
“글쩨, 여왕쩨서 그 황금팔찌를 그자에게 벗어주지만 않았어도 불은 안났을 거란 말일세. 그러니까 팔찌가 불씨인 셈이 아닌가?”
“이 사람, 큰일 날 소릴! 그게 어찌 팔찌 탓이란 말인가? 분수 모르고 꿈꾸던 놈이 여왕을 뵐 수 있는 그 절호의 기회에 잠들어 있었던 것이 한(限)이 되어 그 마음불이 탑과 절을 태운 게지.”
“아무래도 아니야. 출가하겠다는 결심으로 제 어미한테 하직인사까지 하고 떠난 자의 마음인데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아무래도 여왕의 그 황금팔찌가 차고 단단하지만은 않았던 게지.”
“아니, 이 사람이! 어디 그런 소릴함부로? 어질고 총명한 왕을 감히….”
“그만들 두게. 이러다 정말 큰일 나겠네. 그런데 그 큰 화재에도 금당과 좌우의 경루, 남쪽 복도는 그을리지도 않았다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