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이웃을 위하는 불사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죽비의 소리 - 여연 1988년 11월 81호
희천유해(戱天遊海). 하늘을 희롱하고 바다를 유희작작 노닐며 대자유 자재한 생을 살았던 중국의 사상가. 장자의 남화경 소요유편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급히 돈이 필요하여 친구집에 빌리러 갔는데 그의 친구는 “네 이웃집에 돈 받을 일이 있다. 그래서 그 돈을 받으면 반드시 자네를 빌려 줌세’’라고 선심쓰듯 말했다. 장자는 웃으며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 줬다. “방금 내가 자네 집에 오는데 뒤에서 누가 ‘장주님, 장주님’ 하고 불러 뒤돌아 보았더니 수레바퀴 자국으로 패인 웅덩이에서 금붕어 새끼 몇 마리가 하는 말이 ‘지금 이 진창의 물이 메마르고 탁해서 목말라 죽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모금의 물이라도 좀 마셨으면 한다고 하여, 나는 금붕어에게 동해 바다의 맑은 물을 끌어줄 테니 며칠만 기다리며 참고 있으라고 했다. 그랬더니 금붕어는 화를 내면서 장주님이 동해 바다의 물을 이리로 가져오기 전에 우리들은 이미 건어포 시장에 놓여지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금붕어를 비유한 장주의 해학 속에는 그의 슬픈 마음이 서려 있다. 금붕어가 바라는 것은 동해 바다의 그 많은 물이 아니고 몇 방울의 물이듯 우리 중생들의 절실한 관심사는 이천년대의 복지사회나 화려한 꿈의 동산이 아니고, 당장 오늘과 내일을 어떻게 하면 힘들지 않게 사느냐하는 것이다.

세상〔三界〕은 불타는 집이라 했던가. 뜨거운 태양의 열이 수레바퀴 자국 속의 웅덩이 물을 메마르게 하는데, 우리 불교는 상구보리 하회중생, 끝없는 세월의 금맥을 캐고 있다. 거대한 서원의 겁 속에서 천길 바다 속 제비집을 주으려 하고 있다. 언제 청산에 달리는 토끼의 뿔을 찾아 달팽이 집을 지을 것인가.
중생의 고통이 구체적인 민족의 현실과 사회의 모순에서 비롯됨을 명확히 밝히지 못하거나, 이를 해결하려는 실천적인 노력이 없다면 어찌 하화중생하겠는가. 중생의 고통에 대한 깨달음과 이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없이는 우리 불교는 골동품이 되어 역사의 박물관 그 진열장에서 이끼 낀 문화재로 남을 것이다. 아니 지금도 우리 불교는 단순한 관광지로 또는 문화재로 화석화되어가고 있다. 우리가 함께 가야 할 중생이 신음하고, 사회가 병들어 앓고 있는데 너와 나, 역사와 사회가 둘이 아니고 하나라고 공염불만하고 있다. 중생이 불타고 목말라 하는데 그 병의 원인이 무엇인지 진단도 처방도 못 내리는 사이에 돌팔이 의사짓이나 하는 것이 보살들의 현실이다. 또한 우리 보살들은 고작 집 몇 칸 짓는 일, 기왓장 몇 개 옮기는 일로 많은 세월을 흘려보내고 있다. 물론 중생이 머무는 집이 낡았으면 온당 고쳐야 하고 기거하기에 좁으면 넓혀야 하는 것이겠지만, 지금 우리집안이 좁고 낡아서 못 사는 처지는 아니잖은가.

내가 능히 중생들의 고통을 구할 수 있다면 지옥의 고통이라도 기꺼이 받으리니, 이런 까닭에 나는 항상 지옥 가운데 머무르며 세상 사람들과 함께 하느니라.

열반경 속의 보살은 이렇게 불사를 짓고 있다. 이 세상이 불타는 집이고 지옥이라면 우리들은 짓던 집조차 포기하고 불부터 꺼야만 하리라. 고(苦)로 가득찬 인간세계, 곧, 계급의 불평등과 비인간화의 질곡에서 해방으로 나아가게 하는 실천 의지, 그리고 타인과 내가 평등한 관계라는 일체감을 바탕으로 서로의 것을 나누는 상호의존적 관계와 그런 공동체의식이 절실하다. 그러므로 지배와 종속의 사슬로 얽힌 메마른 사회에서 소유의 인간 관계를 극복해내는 보살의 불사를 지어야한다. 지금의 사회에서 팽배해 있는 소외와 모순과 폭력과 비윤리 같은 구조적으로 심화된 이러한 고통의 불을 끄려는 보살의 서원이야말로 대작 불사를 짓는 일일 것이다.
세상이 불타는데, 사람 사는 집을 지어서 수천의 불상을 쌓고 인등을 켠들 그 빛이 밝아지겠는가.
온산에 낙엽이 지고 빈 들녘에는 북풍이 부는데, 어찌 겨울이 줍지 않으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