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言語라는 말
傷舍論 제1에는 “語는 色陰에 속하고, 名은 行陰에 속한다”라는 해설이 나온다. 언어는 물리적 작용이요, 개념은 심적 작용〔心所法〕임을 가리는 것으로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언어와는 상당히 다르다. 언어가 색음 곧 물질에 포함된다는 생각은 오랜 교학적 전통에 근거한다. 그냥 소리〔聲〕라 하면 물리적인 소리 전체를 지칭하게 되지만, 언어라 하면 “인간이 무엇인가 의사 표현을 위해 내는 소리”를 뜻하게 된다. 이는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언어-일상적 언어 language이건 학문적 언어 speech이건-와는 매우 구별되는 개념이다. 어쩌면 이 개념은 현대언어학의 음성학 phonetics과 음운론 phonology 에 해당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언어가 가르침을 성립하는 근거가 된다”라는 표현도 소리〔言語〕와 개념〔名〕과 의미〔義〕를 구별하며, 소리의 의사 전달 능력(語業)을 빌어 여기에 의미를 담아서(增語) 의사소통을 한다. 곧 가르침이 성립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 글의 제목에 달아 놓은 言語라는 표현은 편의상 현대적인 의미를 의식해서 사용한 것이지 전통적인 용례를 따른 것은 아니다. 다만 “문자화된 책 속에 담겨있는 글귀들과 이의 해석을 통해서 어떻게 가르침의 통로를 열어 갈 수 있는가”라는 뜻을 포괄적으로 “言語를 통해”라고 표현한 것 뿐이다. 실제로 漢譯經論을 읽을 때 이같은 개념상의 혼란은 상당한 장애가 된다. 理性이나 知識 따위의 개념은 reason이나 knowledge등과 쉽게 연관되지만 敎學的인 의미는 전혀 다르다.
“무릇 上聖께서 인간을 살펴 가르침을 베푸시니 그 말씀〔言〕은 허투루 늘어놓은 것은 아니다.”(淸涼의 三聖圓融觀 序)라는 귀절과 “말이 다하고 생각이 끊겼다”
또는 “본래 말과 생각을 떠났다”(答順宗心要法門)라는 귀절이 보여주는 언어에 대한 태도는 현대인의 선입견에서는 모순되어 보이지만 그들의 용법상에서는 별 어려움 없이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나) 敎學의 체계와 경문의 해석
法藏賢首는 華嚴經旨歸에서 화엄경의 가르침의 내용이 갖는 의미〔經義〕와 가르침이 설하고자 하는 목적〔經意〕 그리고 가르침이 주는 이익〔經益〕을 상술하고, 이들이 얽히는 관계〔經圓〕를 설명한다. 이러한 체계적인 설명은 경전 속에 나타나는 구체적인 문구를 해석하는 데 불가결한 전제가 된다. 예컨대, “헤아릴 수도 없는 金剛圍山들, 그 모두를 털끝 하나에 담을 수 있네.
지극히 큰 것이 작은 모앙을 가질 수 있다는 것, 보살은 이를 알고자 처음으로 발심했네.”(60華嚴 제 8권 보살십주품)
큰 산 덩어리를 털끝 하나에 담을 수 있다는, 큰 물건이 동시에 작을 수도 있다는, 이같은 게송을 어떻게 해석하고 설명할 수 있겠는가. 法藏은 이를 “연회장세계 안에서는 하나하나의 티끌 속에서 일체의 세계를 본다.”(舍那品)
“모든 부처님들은 작은 티끌 하나하나에 일체의 세계를 나타내 보이시어…중생을 교화하시니 일찍이 멈춘 적이 없었다. 작은 티끌은 크지 않고 세계는 작지않으니, 法界에 안주함을 확실히 알겠다.” (출현품)는 귀절과 연결시켜, 事法界와 理法界의 無礙한 관계 속에서 “고정된 형상은 없다”는 의도를 밝히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그의 法界觀은 經義에서 밝힌 事法十對, 理趣十無礙의 논증없이는 설명할 수 없으며, 위의 게송은 독특한 法界觀없이는 해석할 수 없다. 게다가, 이 모든 전제들은 十種의 經益으로 가시화했을 때만이 사실로 입증될 수 있을 뿐이다. 요컨데, 義, 意, 益 등으로 얽혀진 체계 없이는 “큰 산덩이가 티끌 속에 안주하는” 道理를 해석할 아무런 방편도 없다는 것이다.
전통교학자들의 경전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 해석의 전재가 된 체계를 동시에 받아들이는 것이 된다. 문제는 오늘날 그같은 해석들이 적절한 것이며, 그들의 체계가 비판없이 수용할 가치가 있느냐는 데 있다. 전통적인 해석의 체계 외에는 적절한 해석의 방편을 갖고 있지 않은 지금의 시점에서 허튼 소리는 아닐 것 같은 부처님의 말씀을 해석하기 위해 그 교학의 체계들이 전제로 하는 문제들을 실험하는 일은 불가결한 당면과제가 된다.
(다) 敎体라는 말
교체라는 말은 “가르침의 근거”를 뜻한다. 다시 말해, 부처님과 제자들 사이에 벌어졌던 생생한 가르침이 어떻게 수행될 수 있었을까라는 뜻에서의 근거이다.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뒤, 제자들의 기억 속에 전해 오는 가르침의 “단편”들을 모아서 재현한 가르침에 대해 그 신빙성을 의심하는 것은 후세의 제자들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부처님께서 직접 제자들을 상대로 說法하셨을 경우에는 대화문답을 통해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결과가 있었겠지만, 제자들의 기억 속에서 변형, 변질된 경전으로부터 똑같은 가르침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믿기는 어려웠다. 그렇다면, 경전은 도대체 무엇이고, 경전이 담고 있는 가르침은 어떤 것인가. 도대체 어떻게 경전을 읽고 가르침을 생생하게 재현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시도는 과연 실현가능한 것이기는 한가. 이에 따라 佛滅後초기에는 경전 속의 개념이나 명제들이 부처님의 직접적인 말씀〔言語〕에 근거하는 것이어서 이를 통해서도 충분히 똑같은 가르침을 얻을 수 있음을 논증하려 했다.
이렇게 시작한 敎体論의 論證은 하나의 전통이 되어 교학의 역사를 통해 점차 심화되고 복잡하게 전개된다. 화엄현담의 敎体深淺章에서는 교체론의 전통들을 열가지 단계로 점차 심화시켜 가면서 하나의 체계로 묶어 화엄경의 敎体문제로 이끌어 간다. 초기에는 단순히 전달수단의 근거 정도로 여겨지던 이 말이 여기서는 두 가지 의미로 확장되어 쓰인다. 첫째는 구체적으로 현실화된 가르침의 내적 •외적 근거를 문제삼는 것으로, 언어문자로 현실화되어 있는 가르침이 실재했던 부처님의 가르침에 똑같이 기반을 두고 있음을 논증한다. 둘째는 原理的 측면에서 본 가르침의 근거로, 표현수단이나 의미를 넘어서 가르침의 본성과 전달가능성 그리고 제자들의 수용가능성 등을 포괄적으로 문제삼는다.
(라) 교체론이 시사하는 현대적 의의
이 교체장의 끝 부분에 “수없이 많은 차별된 교법은 여래께서 海印의 定 가운데서 한꺼번에 밝게 나툰 것이다,…그러므로, 三昩만이 유일하게(화엄경의) 교체가 된다.…”고 했다.
교체란 가르침이 성립하는 근거이다. 이 근거를 海印三昩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가르침은 해인을 전제하지않으면 성립할 수 없다. 이를 수용하는 사람 또한 해인삼매를 매개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전통적인 화엄교학이 보여주는 경전해석의 입장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부처님의 삼매로부터 장황한 과정을 거쳐 화엄경이라는 책으로 던져진 것을 그들은 다시 삼매에 의지하여 해석하고 재현해내려는 것이다. 삼매만이 유일하게 교체가 된다 함은 삼매를 매개하지 않은 어떤 해석도 그릇된다는 입장을 반영한다. 이처럼 교체가 선결적으로 입증되지 않으면 가르침에 대한 어떠한 해석의 시도도 불가능하다. 이런 전제를 무시하고 구체적 실천덕목-보현행이나 바라밀 따위-만을 강조하는 오늘날의 풍조도 역시 허황된 것이 된다.
아뭏튼 화엄교학자들은 이같은 전제 위에서 삼매와 문자를 연결하는 해석의 체계를 구축한다. 곧 가르침은 오직 삼매를 통해서만 수행될 수 있기 때문에 문자에서 해인삼매로 유도해가는 구체적인 해석의 방편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체계를 무시한, 부분적이고 임의로운 해석은 배격하기 마련이다.
앞으로 계속 살필 내용이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그 방편의 한 두 부분을 인용해 보겠다.
說法이 성립하는 三重의 能所관계
부처님(말하는 사람)
위에서는 말하는 사람이 소리의 전달능력을 빌어 의미를 담아 보내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부처님의 의도는 소리나 개념 따위의 특성에 따라 변질된다. 攝大乘論에서는 말하는 사람의 意識上에서 의미가 行相으로 바뀌고, 名句文등을 增上綠으로하여 說해지면, 듣는 사람은 자신의 意識上에서 이를 影像으로 포착하여 의미를 재현한다고 했다. (無性攝論제4) 그러므로 언어상에 나타난 의미만을 가지고 부처님의 진의를 짐작할 수는 없다. 그 전달과정과 한계를 밝혀 말하는 사람의 心中으로 나아가야 한다.
말하는 사람
眞如를 緣함
無分別智
後得者 大悲
說法
듣는 사람
正法
後得智
根本智
眞如에 冥合
이는 교체장의 일곱째 부분을 요약한 것인데, 경전의 성립이나 그 해석이 단순히 이해의 문제가 아님을 보여 준다. 경험이나 인식의 배후에 작용하는 지혜들을 통해 진여에 합함으로써 비로소 해석은 완료한다. 이런 입장에서는 확실히 가르침이 “情慮의 끝을 멀리 초월했고, 名言의 표현을 훨씬 벗어났다”라고 할 수있겠다. 그렇다면 眞如나 海印 따위와는 무관한 우리들에게 경전을 통해 가르침으로 나아가는 통로는 봉쇄되어 있는 것일까. 화엄교학의 교체론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殊勝한 言語, 意識의 한계를 넘어선 淨識의 智慧와의 상관성, 삼매에로 유도해가는 방편들, 分齊나 綱要를 활용하는 독특한 분석방법, 이들을 관계지우는 방면 등등은 언어문자가 지닌 한계를 넘어 “가르침의 통로”를 여는 하나의 전형을 제시하고 있다.
이 글은 화엄현담의 敎体論을 쫓아가며, 그 교체론이 시사하는 “경전을 통해 가르침을 수행하는 방편”을 하나의 모범적 표본-그 표본이 옳으며, 유일한 길이라는 뜻은 아니다-으로 밝혀 보려는 것이다. 여기서 지척하고 있는 言語文句, 의식, 지혜, 삼매, 수행 따위의 구체적인 상관관계는 경전을 단순히 축자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는 범위를 넘어 시간적, 공간적 삶 전체를 포괄하는 문제로 확장시키고 있다는 점에서만도 독특한 가치가 있다. 불교계에서 변화를 부르짖는 목소리가 커가는 만큼, 경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야 한다는 요구도 커지고 있다. 그러나, 경전들의 해석이 단순히 “딱딱한 한문”을 해석하는 언어상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역사와 문화와 의식과 실천 등의 복잡한 연관 속에서 이뤄져야 할 것이라면, 옳건 그르건 또는 쉽건 어렵건 간에 이같은 전통적 해석 체계들을 넘어서 우리에게 맞는 해석의 방편들을 소유하지 않고는 경전을 결코 “가르침이 수행되는 통로”로 삼을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