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쓸 것인가
이번 호부터 소개하기로 한 ‘남방불교사(南方佛敎史)’란, 엄격히 말하면, ‘스리랑까 및 동남아시아에서의 상좌부불교사(上座部佛敎史)’ 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불멸(佛滅)후의 제 2차 전인도 불교대회를 통하여 비로소 그 윤곽이 뚜렷해진 본상좌부(本上座部)의 종맥(宗服)이 인도 대륙 밖의 그 주변 국가로 전파된 뒤로 소위 오늘날의 남방불교권을 형성하기에 이르기까지의 주요 사실(史實)을 기술하고자 하는 것이 본고가 의도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고의 성격은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와 스리랑까와의 상좌부불교 교섭사에 촛점을 둔, 다분히 통사적 (通史的)인 서술형식올 취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이 연재의 특성으로 보아 본격적인 역사 기술은 무리일 것으로 생각되며, 또한 제한된 지면 탓으로 상좌부불교 국가 각 나라의 독립된 불교사를 따로이 취급하기도 곤란하거니와 그렇게 되면 자칫 서술의 유기적인 흐름이 끊어질 수밖에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인도 대륙의 상좌부불교가 대륙을 벗어난 다른 나라에서 가장 먼저 뿌리를 내린 곳은 다름 아닌, 오늘날의 스리랑까(Sri Lanka)이다. 이는 기원전 3세기 무렵의 일이었다. 그 뒤 상좌부불교는 버마와 타이 등지로 널리 퍼져나갔으며, 이윽고 동남아시아의 전역에 걸쳐 그만의 독특한 불교문화권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스리랑까가 세계 각국으로부터 상좌부불교의 종주국으로 주목받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최초의 상좌부불교 전파지가 스리랑까가 아니었다면 과연 상좌부불교는 오늘날 이처럼 세계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을까?
스리랑까가 가진, 섬이라는 입지조건에서 비롯된 외세로부터의 안정-그러나 이는 항해술이 발달한 유럽의 해양 강국에 의한 16세기 초부터 20세기 중반에 걸친 기나긴 식민지 시대 이전의 행운(?)에 지나지 않지만-및 그 특유의 열광적인 신앙심, 단결력, 그리고 배타심 덕분에, 오늘날의 상좌부불교는 이만큼 번영을 누릴 수 있었으며. 또한 초기불교의 원형을 거의 온전하게 간직할 수 있었다는 필자의 견해에 이의를 제기할 이는 없으리라고 본다.
전불교시대의 스리랑까
가) 사회상
랑까(Lanka)-스리랑까의 옛이름 -에 정착한 초기의 아리안족(Aryans)은 인도 대륙에 남아 있는 친족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해 나갔다. 따라서 대륙에서 일어나는 정치, 사회, 경제 및 종교의 변화는 세일론인들의 일상적인 삶에 곧바로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뒤에 남부인도의 탐욕스러운 군주로부터 고통을 당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세일론에 대한 대륙 인도의 태도는 자식에 대한 어버이의 그것처럼 자상하고 호의적이었다.
전불교기(前佛敎期)의 세일론 사회는 통치계급인 왕족을 제외하고 크게 두 계급으로 나뉘어 있었다. 승려계급과 세속인이 바로 그것이다. 세속인은 다시 네 계급으로 나뉜다. 무사계급인 끄샤뜨리야(ksattiya), 유식한 범승(梵僧)들로 이루어진 브라흐만(brahmanas), 농부와 목동들이 속한 바이샤(vaisya), 그리고 온갖 천한 일로 생계를 이어가는 짠달라(candalas)가 바로 그것이다.
초기의 정착자들은 대부분 농업과 목축업에 종사했다. 또한 사냥도 그에 버금가는 중요한 생업이었다. 정글을 배경으로 취락을 형성하고 있던 당시의 세일론인들로서는 사냥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유익하고 효율적인 생계수단이었는지도 모른다. 심지어는 전문사낭꾼들을 위한 주거시설이 국가에 의해 정글 속에 건설되기도 했으며, 그 수호신인 브야드하데바(Vyadha-deva)는 온갖 위험으로부터 이들을 보호해 주었다.
기술과 산업의 발달은 별로 보잘것이 없었다. 초기의 정착자들이 주로 새로운 정착촌의 개발에만 온통 힘을 기울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드후라(Madhura)의 왕이 파견한 ‘열여덟 가지의 직종을 가진 일천여 가구’의 이주민들에 의해 뒷날 세일론의 산업은 크게 발달했으며, 아울러 인구도 증가하였다.
나) 종교상
불교가 전파되기 전 시대의 스리랑까인들은, 당나라의 구법승 현장(玄奘)의 말을 빌면 ‘온갖 부도덕한 신앙’에 빠져있었다. 그가 말하는 부도덕한 신앙이란 대개 정령숭배(精靈崇拜, animism)에 관계된 일체의 신앙형태를 가리키며, 이는 스리랑까의 고대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비자야(vijaya) 설화 가운데에는 야끄샤(yaksas)와 야끄시니(yaksinis)라는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들에 대한 숭배는 상당히 넓은 지역에 걸쳐 행해졌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오늘날까지도 일부 스라랑까인들 사이에 이어지고 있다. 몇몇 종교연구가들은 그 둘의 정체를, 아리안족이 침입해 들어오기 이전에 섬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의 강력한 우두머리였으리라고 추측한다. 곧, 정착 초기에, 이들이 이끄는 원주민 투사들의 강력한 저항과 그로 인한 고난을 회상하던 아리아인들이 자신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적장을 신격화하여 마침내 신으로 숭배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조상숭배는 고대의 인류사에서 세계 공통의 신앙 형태였다. 이는 고대 스리랑까인들에게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은, 특히, 죽은 이들이 다시 가주신(家主神)으로 환생하여 살아 있는 가족들에게 길흉을 행사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마을에 조그마한 사당을 지어놓고 계속해서 죽은 이들을 공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목신숭배(木神崇拜) 또한 전불교기의 스리랑까에 성행했던 신앙 형태의 하나이다. 숭배의 대상이 되었던 나무는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반얀나무이고 다른 하나는 부채잎야자수였다. 특히 부채잎야자수는 사냥문의 수호신인 브야드하데바의 사당 가까운 곳에 심는 것이 관례였다.
그밖에도 전불교기의 스리랑까에는 니간뜨하(nigathas)라고 하는 자이나(Jaina)교 및 쉬바(Siva)신을 숭배하는 쉬바교 등 많은 종교가 난립해 있었지만, 그 어느 것도 뒤에 들어온 불교만큼 조직적이고 윤리적인 바탕을 갖지는 못했다.
불교의 전래
스리랑까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데바남삐야띠싸(Deva-nampiyatissa)왕이 재위하고 있던 기원전 3세기 경의 일이었다. 그 무렵 아쇼까(Asoka)대왕의 아들인 마힌다(Mahin-da) 비구가 부처님의 유골과 발우, 그리고 불경과 보리수를 가지고 인도로부터 와서 수도인 아누라드하뿌라(Anuradha-pura)에 대사(大寺, Mahavihara)를 건립함으로써 비로소 인도양 위의 외딴 섬나라인 스리랑까에도 불음이 울려퍼지게된 것이다. 불교가 들어오기 전의 스리랑까에는 이렇다할만한 종교 조직이 없었다. 아리안족이 이주해 오면서 함께 들어온 브라흐만교 외에 야끄샤(Yaksas)신앙과 정령숭배, 조상숭배 같은 토속신앙이 국지적으로 혼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불교는 왕실의 비호와 서민충의 열렬한 환영으로 곧 국가종교로 발전하였다.
한편 마힌다에 의해 건립된 대사(大寺)는 스리랑까불교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스리랑까불교사는 무외사(無畏寺, Abhyagirivihava)를 비롯한 다른 종파와 이 대사 사이의 대립과 충돌로 점철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무외사와 대사 양사간의 갈등은 매우 심각했다. 더욱이 역대 왕들이 이들 양 세력 가운데 어느 한 편을 공식적으로 지지하는 일이 되풀이되었기 때문에 그 갈등과 대립은 더욱 가열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 3세기 무렵에 들어와 보하리까띠싸(Vohari-ka-Tissa)왕은 대승불교에 속하는 방등부(方等部, Vetulya-vada)의 유통을 일소함으로써 상좌부불교의 법맥을 새로이 정립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탄압 속에서도 상그하미따(Samghamitta)라는 대승불교의 승려는 이윽고 마하세나(Mahasena, 334~362)왕의 지극한 총애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그때까지 왕의 신임을 받던 대사의 승려들은 남부 스리랑까의 로하나(Rohana) 및 말라이(Malay) 구릉지로 본거지를 옮겨갈 수밖에 없었으며, 대사의 주요 건물들은 왕의 군대에 의해 차례로 파괴되었다.
5세기 초에 스리랑까를 다녀온 법현(法顯)은 그때 무외사의 대중은 오천여 명을 헤아리는데 대사에는 그보다 훨씬 더 적은 삼천여 명의 대중이 기거하고 있었다고 뒷날 회고하였다. 이것은 그때 대사에 비해 무외사의 세력이 훨씬 더 왕성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대사가 약세에 있었다는 법현의 기록에는 많은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을 또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대사 승려들의 학문적인 명성을 전해 들은 인도의 위대한 불교 주석가인 붓드하고오샤(Buddhaghosa)가 대사에 머무르면서 친히 삼장(三藏)에 대한 스리랑까 고유의 주석을 다시 빠알리어로 옮기는 대역사(大役事)를 진행한 때가 바로 마하나마(Mahanama, 409~431)왕의 재위시였다는 사실은, 법현의 기록에 대해 비판적인 의문을 제기하게 하는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아닐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