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은 백양사 강원의 강사이다. 새로이 지은 화엄전에서 오전이면 예닐곱 분의 학인스님들을 지도한다. 비록 숫자는 적으나 가르치는 이와 배우는 이는 열의와 성실성으로 끈끈하게 맺어 있다.
백양사에 오면서부터 기도와 함께 시작한 이 강사의 일에 흡족해 하는 스님은 그동안의 경험에 비추어 강원과 승가대학의 문제를 이렇게 집어내었다.
“강원에 억지로 승가대학을 만들려하고 중앙 승가대학을 예비고사에 준하려는 일은 무리야. 국가 제도의 기준에 맞추지 않아야 좀더 많은 스님네들이 중앙 승가대를 다닐 수 있지. 그리고 동국대는 일반 포교나 현대학문에 힘쓸 이들이 다니며, 강원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참되게 수행하는 곳으로 활용해야 돼. 무리한 일을 무리하게 해내면 모순이 빚어질 밖에…”
스님은 불교 교단의 제도적 밑바침이나 인식이 제대로 되어있지 못한 상황에서는 하루 아침에 교육제도가 변화한다고 하여 달라지는 것은 혼란스러움 뿐이라고 강조한다.
교학을 하는 때문인지, 우리나라 스님가운데 혜권스님의 사미계 계사스님이셨던 현 동국대 총장 지관스님을 귀감으로 삼고 있다. 이는 지관스님이 전혀 잡됨이 없이 오로지 한길로 학문의 길을 이루어오신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혜권스님은 강의를 잘 하고픈 게 큰 바램이다.
“받아들이는 것은 학승들의 소화능력이고, 강사의 역할은 부처님법에 어긋나지 않는 강의를 하는 걸세. 불경의 번역은 훌륭한 스님들이 해내야 된다네. 그릇된 번역은 불교의 생명을 끊는 셈이 되고 말거든!”
짤막한 이 말마디 속에 스님이 뜻하고 있는 커다란 포부가 숨겨 있다.
우주를 향해 발돋움하는 현대인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감동시키는 이야기는 어쩌면 현대의 물질문명이나 치열한 두뇌경쟁과는 거리가 먼, 조금은 미련하고 모자란듯 여겨지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혜권스님을 아는 스님들의 말을 빌자면, 출가 이후 십수년을 변함없이 허드렛일을 도맡아 한 스님이라고 한다. 사실 나이로 쉰하나라면 이제 청소따위의 일은 접어둘만하다는 게 우리네의 생각이다. 그러나 스님의 일과는 하루 어김없이 청소로부터 시작된다. 스님이 빗자루를 들고 법당에 들어서는 시각은 새벽 두시. 그 시간이면 일어나 뜰도 쓸고 변소도 청소한다. 화장실 청소는 백양사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고나서 얼마간 관리소측에서 맡아한 적이 있으나 ‘절 일은 절에서 하는 게 더 나음을 잘 아시는 스님은 다시 화장실의 걸레를 손에 잡았다.
“내 비밀을 알아버렸으니 우습게 했구먼”하며 스님은 얼굴을 붉히신다. 남 모르게 하는 스님의 이 수행은, 작은 일은 대충 넘기려는 스님들에게는 훌륭한 자극이 될 것이다. 전에는 항시 이 일을 밤 늦은 시각에 해왔으나 저녁시간을 공부하는 시간으로 돌려 놓고부터는 잠 덜자고 새벽에 시작하였다.
“호미 들고 밭일 하는데 누군가 와서 묻더구먼. 그 일, 언제까지 할거냐구. 그래서 평생토록 하겠노라 답했지. 그럴 생각이거든. 난 특별한 게 없는 사람이여. 이렇게 쉽게 시작해서 오늘까지 왔네.”
스님은 점심공양을 마치면 운동삼아 손수 스님의 옷을 빨래한다. 공부하는 이가 각자 공부하듯 빨래 또한 내 일이 아니냐며 반문하는 스님에게서 선이 고운 스님의 외양과는 달리, 현대인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우직함을 발견할 수 있어 더없이 반가왔다.
스님이 되기로 마음먹은 것은 서른다섯의 나이였다. 해인사로 출가한 늦깎이로서 같은 학인 스님들과의 나이 차이로 인해 함께 어울리기엔 서로가 어려움이 많았으리라는 건 보지 않아도 알겠다.
당시 스님은 보는 이에게마다 구십도가 넘도록 정중한 인사를 하였다. 또한 열댓 살의 스님네들에게도 깍듯이 존대하였다. 그러고 보니 남다르게 바른 예법을 귀히 여겨오신 듯 싶다. 속가에서 나이먹도록 익혀온 건 모조리 쓸데없다는 생각에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며 ‘하심하는 마음’으로 매사를 그렇게 살아왔다. 그랬더니 늦깎이로서 흔히 겪는 어려움도 특별히 느껴보지 않고 지내왔다.
편한 마음으로 어렵잖게 살아온 지난 세월이라며 스스로가 낙천적 성격인 듯 들려 주신 이야기 속에서 지난 시절 동안 참수행인이 되고자 기울인 뼈를 깎는 노력이 대략 어떠했겠는지 짐작 된다.
스님은 계를 참되이 지키는 일이 어려웠노라 고백하신다. 초기에는, 고기도 먹고 술도 마셨던 속가생활과의 단절이 쉽지 않아 마음 속에서조차 계를 철저히 지키려고 애썼다고 하였다.
어느날인가 해인사에서 심부름을 다녀오는 길에 신도가 장난스레 권하는 물 한 잔을 넙죽 마셨더니 그게 소주였다. 곁의 스님들이 주계를 파했으니 큰일이라고 놀려댄 일이 있었다며 스님은 허허로이 웃으신다.
백양사 주변의 넓은 잔디밭에는 일요일이면 고기 구워먹는 인파로 가득해 대웅전 부처님 앞에까지 고기굽는 연기가 날아오곤 하는데, 고기 냄새는 역겹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지나는 길에 막걸리 냄새를 맡으면 옛날 시골의 잔치집 생각에 즐거움이 되살아난다며, 차라리 고기 굽는 냄새보다는 막걸리 내음으로 가득 차면 좋겠다고하시는 말씀에서 정겨움이 느껴온다.
스님은 부모님과 함께 만공스님이 불공을 들여 낳은 자식이라 부모님의 끔찍한 사랑 속에서 성장하였다. 법학에 관심이 많아 십 년이 넘도록 고시공부를 하였다. 고향의 산언덕에 초막을 짓고 입시준비를 하던 동생과 함께 밤을 지새며 공부하곤 하였다. 요새도 가끔, 석양이 물든 하늘을 바라보며 동생과 함께 노래부르던 기억이 난다. 이 장면은 추억을 되살릴 때마다 가장 선명하고 아름답게 떠오르는 한편의 그림이란다.
그 동생이 출가하는 스님에게 ‘스님이 되려거들랑 기왕이면 서산대사나 사명대사 같은 이가 되어달라’고 당부했다 한다.
국민학교 때의 음악점수가 언제나 백점이었고, 국어책 읽는 솜씨가 속도감이 있어 종칠 즈음이면 언제나 일어나 빨리 읽곤 했다는 과거의 경력때문인지 스님은 염불도, 독경도 썩잘한다고 소문났다.
백양사의 신도는 주로 광주에서 온다. 광주에서 백양사까지는 버스로 한 시간 이십 분 남짓한 거리이다. 초하루, 초여드레, 보름, 관음재일 등의 법회 때 스님은 축원뿐 아니라 법문으로 불교설화를 쉽게 들려준다. 그래서 보살님들에게 제일로 인기있는 스니이다. 스님 법문의 핵심은 ‘인욕’과 ‘보시’다. 그러한 연유로 인욕과 보시를 강조한 금강경을 수지독송한다.
신도들의 정치의식이 높아 가끔 그들로부터 배우는 적도 있다. 그러나 다른 지방에 비해 미약한 불교세를 회복키 위해서는 우선 신도들이 신심부터 돈독히 가져야 함을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스님의 방문은 몸을 반쯤 숙이고서야 들어가는 여닫이 쪽문이다. 연탄 아궁이가 곁에 있어서 문을 드나들 적마다 연탄가스가 코를 찌른다.
스님의 방은 아무리 보아도 교학자의 방 같지가 않다. 앉아서도 손이 닿을 작은 책꽂이와 앉은뱅이 책상이 놓인 방안은 한 사람이 겨우 누울 만큼의 크기이다. 커피포트며, 중국차며, 좋은 보료며, 스님네들의 방에서 흔히들 쉽게 찾을 수 있는 용품이 보이지 않는 자그마한 방에서 이 방 주인의 소탈한 성품이 읽어졌다.
스님은 흥미진진한 요즘의 시국때문에 신문을 매일 읽는다. 신문 덕에 산속에서도 세상 일을 훤히 꿰어볼 줄은 아나, 지면이 많아 신문을 읽으려면 한시간씩 걸리고 세상을 너무 잘 알게 되는 것 같아서 당분간은 옛날처럼 다시 접어둘 생각이다. 그러나 스님은 신문의 내용 중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강의 때에 적절하게 비유하거나 전달하고 있다.
올림픽 이야기가 나오자, 스님은 아무리 이 땅이 스포츠에서 세계강대국으로 부상하였더라도 정신적으로 강한 나라가 되려면 불타의 자비심을 실천하는 길 밖에 없다고 이르셨다.
“이 실천은 작고 작은 일부터 뭇 중생을 위해 유익한 바가 무엇인지를 찾아행하는 것이지. 최선을 다하는 실천만이 인격을 최대한으로 향상시켜 주거든.”
해인사에서 생활한 삼 년 말고는 쭉 백양사에서 살아왔다. 백양사는 국립공원 사찰임에도 규모가 크지 않아 스님의 성품과 꼭 들어맞는다. 경내에서 곧장 바라보이는 깎아지른 듯한 백암산의 학봉은 혜권스님이 백양사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벗이다.
오늘 이야기는 즐거웠으나 빨래할 시간을 놓쳤다며 서둘러 대웅전으로 향하는 스님은 기도시간마저 빼앗기지는 않으시려는 듯하다. 대웅전을 향해 걷던 스님은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에 떠있는 학봉을 본다. 아마도 기도하러 들어가기 전 맑은 정기를 품어안고 서원을 다지려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