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의 인물열전(人物列傳)-원경왕사(元景王師) 낙진(樂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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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향기 - 시명
1988년 11월 81호
원경왕사 낙진과 해인사와의 인연은 참으로 묘하다.
고려불교사(高麗佛敎史)의 시대적인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알려 주는 몇 안되는 금석문(金石文)의 하나인 원경왕사비(元景王師碑)가 해인사의 경내에 지금까지 남아 있다. 왕사가 생존했을 때 해인사에 머물렀는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역사적 자료가 없으므로 알 길이 없지만, 이렇게 비(碑)가 해인사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해인사의 인물열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가야산 반야사(般若寺)가 가야산 안에 있던 사원이었고 또한 유추해 보면 대각국사가 이 자의(李資義) 일당에게 밀려나 해인사에 칩거했던 때에도 국사와 함께 제종교장총록(諸宗敎藏總綠)의 간행을 도왔을 것이므로, 왕사가 해인사와 관계가 전혀 없었다고는 보기가 어렵다.
왕사는 의천과 함께 그 당시 화엄종 계통의 국사(國師)였던 경덕국사 난원(爛圓, 999-1066)의 제자였으며, 의천보다는 세수가 7세 연상이었지만 서로 좋은 도반과 사형사제(師兄師弟)로서 또한 평생 지기(知己)로서 고려불교를 이끌어 갔다. 또한 대각국사가 입송(入宋)했을 때에도 함께 송나라에 동행하는 등 마치 그림자처럼 대각국사의 일을 도왔다. 영통사에 있는 대각국사의 비(碑)에는 낙진이 마치 대각국사의 제자인 듯 되어 있으나 사실 대각국사와는 사형사제간이었으며 오히려 스승을 겸한 사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스승 경덕국사가 의천이 출가한 뒤 곧 입적해서, 연상이었던 왕사는 학문적인 면에서 대각국사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왕사의 생몰(生沒) 연대에 대해서는 대체로 두 가지 설(說)이 있으나, 「한국금석문」에는 1048년에 경기도 이천(利川)에서 출생하였고 속성은 신씨(申民)로 되어 있다. 왕사는 일찍이 화엄의 종찰이었던 귀법사(歸法寺)에 출가하였고, 만년에 이르러서는 봉선사, 담화사(曇華寺), 불국사, 법수사(法水寺) 귀법사 등지에서 주지를 역임하였다. 그가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것은 모두 대각국사와 연관된 일로서, 의천이 열심히 벌여 놓은 여러 가지 사업을 마무리하는 작업을 계속하였다. 송나라에서 돌아온 뒤 의천이 여러 나라에서 수집한 경•율•론을 모아 대장경을 간행하던 사업을, 그가 1101년에 입적한 뒤에도 계속해서 마무리하는 역할을 담당한 것은 그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노력과 온갖 정성이 담긴 「제종교장총록」은 그 목록만 남아있을 뿐이며 1090년 이후에 찬술한 속장경들은 그 편린조차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이보다 앞서 1092년부터 1099년 사이에 간행된 속장경의 주석서인 소초(疏抄)만 단편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리고 중국의 역대 고승들과 신라 고려시대 고승들의 행적을 담은 석원사림(釋苑詞林)이란 책을 의천의 유•업(遺業)으로 완성하였는데, 모두 250권이나 되는 방대한 책 가운데에서 불과 191권에서 195권까지의 5권만이 서울대학교 도서관 고서 목록에 남아 있을 뿐이다. 인물 중심사적인 잡문(雜文)이기는 하지만, 이 책이 남아 있다면, 중국불교와 고려불교의 역사적인 면에서 매우 중요하고도 방대한 자료가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흔히 대각국사 저작으로 알려져 있는 이 「석원사림」은, 실은 왕사가 제가 각순(覺純)과 함께 편집하여 1108년에 마무리지었음이 다의 비문에 나타나 있으며, 또한 대각국사가 입적한 뒤로 8년이 지나서야 완성된 점으로 보더라도, 대각국사의 저작이 아니고 원경왕사의 저작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을 완성한 해인 1108년 이후 원경왕사는 중요한 몇 사찰의 주지를 맡기도 했는데, 그 만년에 해당하는 이 몇 년 동안을 사실상 왕사의 절정시기로 볼 수 있다. 또한 예종(睿宗) 9년인 1114년 3월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여 담진(曇眞)을 국사로, 낙진을 왕사로 삼았음을 고려사(高麗史)에는 전하고 있다.
위의 자료에는, 왕사가 된 것이 입적 전의 만년에 해당하는 시기이며 그 이후에는 상징적인 왕사로서의 역할 이외에는 별다른 업적이 보이지 않는다. 이러함 점으로 보아서 그의 활약과 활동은, 대체로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대각국사가 활발하게 벌였던 사업의 마무리에 충실하게 내조(內助)하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평가될 뿐이며 사상적인 면에서는 특기할 만한 점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미 대각국사가 균여의 화엄사상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던 것과 같은 시각을 왕사도 가지고 있었을 것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천태종이 성립된 이후로 화엄종의 세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의 제자 가운데서 그를 이어 왕사나 국사가 된 사람이 없었던 점도 그만큼 화엄종이 침체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처럼 무신정권 이후 선종 중심으로 불교사가 흘러간 것에 대해서 사회사적인 의미로도 파악할 수 있지만 특히 의천 이후의 화엄사상이 지나치게 학문 중심적이며 이론적이었기 때문에 민중적인 토양을 잃었다는 데에서도 그 침체의 원인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뒤로 화엄사상의 맥락은 균여사상에 일대 수정을 가했으며 시대적으로도 가까운 의천이나 낙진의 문도에게서 찾을 수 있기보다는 오히려 균여사상의 계승을 주장한 수기(守其)스님이나 실천적인 관음신앙을 강조한 의상대사를 흠모했던 체원(體元)스님에게서 찾을 수 있다. 이는 그동안 지하에서 흐르고 있던 민간 신앙적이며 신비주의적인 균여의 사상으로 복고함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일반적으로 12세기 후반에 일어난 무신(武臣)의 난(亂)은 고려시대를 정치사적인 의미에서도 큰 획을 그었지만 그와 동시에 고려사회를 지배했던 불교사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이미 선종(禪宗)은 신라말과 고려초에 걸쳐 문벌사회가 붕괴되고 지방세력이 대두되었던 무신정권 시대에서 주도적인 종파로 부상하였다. 그리고 점차로 꺼져가는 문벌의 세력과 함께 했던 화엄종의 부침이 교종 특히 화엄종의 변방사찰이었던 해인사의 흥망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화엄종의 역할을 살펴보는 일은 퍽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