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고해苦海라 하지만 누구나 어렵고 힘들 때가 있다. 그런 역경의 시간에 불자들은 부처님 앞에서 삼천 배를 하면 소원을 이룬다고 하여 혼신의 힘을 다하기도 한다. 오늘은 나와 삼천 배에 얽힌 사연을 말할까 한다.
사람들은 나를 보며 평탄하게 살아 왔으려니 생각한다. 이른바 명문 대학을 나와 엠비시 명 앵커, 청와대 기자단장, 국회의원, 방송광고공사 사장, 총리 비서실장, 원내총무 등, 이런 이력을 보고 그렇게 짐작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게도 누구나 겪는 고통의 시간이 있었으며, 성장기에는 초등학교 교사로 봉직하던 부친의 적은 월급으로 칠 남매가 살려니 남들이 겪는 어려움을 모두 겪었다. 그러니 한 개인의 삶은 늘 웃음으로만 채워질 수 없다. 거기에는 눈물과 땀, 아픔이 있기 마련이고 가끔은 청량제 같은 기쁨이 있었기에 그 힘든 세월을 이겨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년 4월이 16대 총선이니까 선거가 한 일 년쯤 남았다. 92년에 14대 총선을 일 년 앞둔 때, 바로 지금과 비슷한 시기에 나는 온갖 고통과 번민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13대 총선에서 떨어진 데에다, 갑작스런 3당 합당으로 지구당까지 빼앗겼기에 의지할 데도 없고 심사가 어지럽기 그지 없었다.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인 선거에서 떨어졌을 때의 그 고통, 그것이 얼마나 큰지는 당사자가 아니면 헤아리기 어렵다. 오죽하면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져도 원숭이지만, 국회의원은 선거에서 지면 사람도 아니다”는 말이 나왔을까.
사실 그 동안 나는 패배를 모르고 살아 왔다. 학교 공부에서든 사회 이력에서든 패배보다는 성공의 길을 달려 온 축에 든다. 그러니 선거 패배의 후유증은 남보다 몇 배 더 크게 다가왔고, 설상가상으로 지구당까지 빼앗긴 데다 당의 공천은 생각도 할 수도 없는 궁벽한 처지였다. 솔직히 일 년밖에 남지 않은 다음 선거에서도 자신이 없었다. 패배주의와 의욕 감퇴가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그런 나를 보다 못한 아내가 어디서 들었는지 불자로서의 모든 번뇌를 극복하고 성심과 소원을 이룬다는 삼천배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처음에는 완강하게 반대하던 나도, 아내의 거듭되는 성화에 못 이겨, 어느 날 날이 채 밝지 않은 새벽에 아내와 친척 한 사람과 함께 해인사로 향했다.
그 때 해인사 백련암에는 성철 큰스님이 계셨는데, 하도 만나려는 불자가 많은지라 삼천 배를 한 뒤에야 겨우 만남이 허락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야 성철 큰스님을 만나려고 그 곳에 간 것은 아니었지만, 아내는 이왕이면 백련암을 권유하였다. 삼천 배, 그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를 아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종손이라서 평소에 절은 많이 해 보았으나 부처님 앞에서 구도하는 수도승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자기를 비우고, 욕심을 버리고 삼천 배의 첫발을 내디녔을 때 그것은 차라리 무모함에 가까웠다.
아침도 제대로 못 먹고 수건 한 장만 두르고 백련암에 올랐다. 신분도 밝히지 않고 백련암의 부처님 앞에서 나는 절박한 심정으로, 참으로 정성을 다해 한배한배 절을 해 나갔다. 두 시간쯤 흘렀을까, 다리는 벌써부터 저려 오고 땅은 머리에서 어깨로 젖어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왕 시작한 것 이니 하는 마음과, 어렵고 힘든 때였기에 마음의 위안을 받고 싶다는 생각, 그리고 여인네들도 한다는 삼천 배를 내가 못할소냐 싶은 오기까지 겹쳐 힘들어도 한배한배 절을 해 나갔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점심을 훨씬 지나 있었고, 절에 오기 전과 달리 전쟁하듯 절을 하는 나를 보고, 아내는 공양도 하지 못하고 내 옆에서 묵묵히 같이 절을 할뿐이었다.
온몸은 이미 땀에 젖어 있었고, 그 열기는 한증막을 능가할 정도가 되어 버렸다. 삼천 배를 해야 소원이 이루어 진다는 생각은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악마는 내게 속삭였다. ‘이런 부질없는 짓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건 모두가 절에서 의례적으로 만든 것 아니냐, 이것보다는 지역 사람을 만나는 게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느냐, 더구나 내일 주례도 있는데 이래서야 주례를 제대로 서겠느냐… 빨리 하산해 서 맛있는 점심으로 공복을 달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내가 그 집요한 유혹을 뿌리쳤을 때, 비로소 법당 안의 조그만 대나무 소쿠리가 보였다. 거기에는 작은 당근과 오이가 수북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물을 마시며 절을 하면 갈증과 피곤을 더 느끼므로 절에서 참배객을 위해 마련해 놓은 작은 배려였음을 나중에 알았다. 깔깔한 목과 참배로 지친 육신에 오이 한 조각은 새로운 힘을 불러 왔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주위는 벌써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과도한 참배에 육신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법당에 쓰러지고 말았다.
암자에 계신 보살님들이 그 정성을 이제는 부처님도 얼마주실 거라며 방으로 가서 쉴 것을 권했으나, 남은 천배를 마저 하려다 쓰러지기를 수 차례, 결국주위의 강권에 못 이겨 절의 골방에 누웠다. 아내는 피곤을 잊은 채 걱정스런 표정으로 내 다리를 연신 주물렀고, 내일 주례를 걱정했다.
삼천 배를 못하면 절을 내려가지 않는다는 단호한 나의 태도에 아내는 질린 표정을 하더니, 이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 우리는 삼천 배를 했습니다.”
“아니 이천 배밖에 못 했는데, 어찌 삼천 배를…”
“당신이 이천 배, 제가 삼백 배, 그리고 같이 온 친척이 칠백 배, 우리는 삼천 배를 함께 한 것입니다.”
내 고집으로 결국 다시 법당에 갔지만 천 배는커녕 일 배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틀어져, 결국 ‘함께 한 삼천배’로 만족을 하고는 아내의 부축을 받으며 절을 내려올 수 밖에 없었다.
합장으로 우리와 작별을 고하던 어느 보살님이 말했다.
“제가 보아 왔던 분들 가운데 이렇게 성심껏 지성으로 참배한 사람은 당신이 처음입니다. 성철 큰스님을 뵙게하고 싶지만, 큰스님은 몸이 안 좋아 잠시 서울에 가셨습니다. 이제 얼굴이 많이 평안해지셨습니다. 힘들 때는 해인사를 생각하세요.”
다음날, 일어서지도 못할 것 같은 다리로 기적처럼 주례를 잘 섰다. 다 부처님의 가호이리라.
삼천 배 덕분일까. 일 년 뒤, 14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한 나는 전국 최다 득표로 원내에 다시 진입을 했다. 지성이면 하늘도 움직인다는 말처럼 세상을 정성으로 대하면 사람의 마음도 움직이는 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행복보다는 오히려 불행과 고통속에서 영혼과 육신이 살아 있음을 깨닫는 묘한 존재다. 그 뒤로 괴로움이 닥쳐올 때면 나를 더 성숙시키는 과정으로 받아들이면서 마음의 정화를 얻는다.
아내는 틈만 나면 삼백 배의 보은을 하라고 농을 던지지만, 나는 허언으로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보은과 채무의 대상이 꼭 아내만이 아니라, 이 사회와 나라까지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런 마음으로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오늘도 성심껏 찾는다.
속진俗塵에 시달리는 범부인 탓에 세상살이가 힘들 때가 있다. 어려울 때는 해인사를 떠올리지만 아직 혼자 힘으로 삼천 배를 하지는 못했다. 아, 그 숙제는 어느 때에 풀는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