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출가 햇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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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문리 일기 - 현진
1992년 05월 123호
계단戒壇이 마련된 설법전. 큰절에서 중노릇하는 법을 익힌 행자님들이 출격장부出格丈夫가 되는 날이다. 몇 달을 후원채에서 살았던 이들이라서 대개가 낯익은 얼굴들이다. 승복을 입은 모양새가 조금 서툰 점도 그런대로 풋풋해 보이고 또 우행牛行하는 발걸음 마다 발심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듯 느껴져 좋다. 행자 시절에는 무슨 일이든 앞뒤 안가리고 내 집안 일처럼 이것저것 허드렛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또 이때는 중노릇 배우는 맛으로 신심이 절로 생기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행자 때 지은 공덕으로 평생 중노릇한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행자 생활만 몇 년째 해온 도반이 내 주변에 여럿 있다. 몸을 돌보지 않고 신심과 원력으로 생활하는 게 행자실 분위기인 만큼 도반들은 어려운 대중시봉을 자꾸 고집했던 것이다. 출가하려고 이제 막 발심한 행자님의 모습은 지금까지의 내 중노릇을 돌아보게 했고, 눈빛이 형형한 노스님네 수행 햇수는 내 공부를 또 얼마나 부끄럽게 만들었던가. 더군다나 오늘 수계하는 햇스님들의 파르라한 삭발자국은 내 가슴을 뜨금하게 하는 채찍으로 다가왔다. 실참실수實參實修없는 그동안의 일상을 일깨워 주었기 때문일까. 나도 모르게 의식이 끝날 때까지 까칠한 내머리를 줄곧 만진 게 우습기도 하다. 꽃과 향을 불전에 올리고 어제 저녁 콩알 크기만큼 말아 두었던 마른 쑥도 내놓았다. 나중에 연비할 때 쓸 참이다. 내가 인례引禮를 맡아 수계식을 도우는 것도 처음이다. 그래서 혹시 실수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틀린 부분을 어른스님이 지적해 주는 무안을 당할까 봐서 그렇다. 길게 목탁을 세 번 내리면서 삼보三寶에 귀의하는 큰절을 올리는 것이 첫 순서다. 의식 대부분을 범창梵唱으로 하게 된다. 계단을 세우신 자장, 진표 양대 율사의 증명함으로 범석사왕천룡팔부梵釋四王天龍八部가 호계하는 엄숙한 자리. 계사戒師스님이 법단에서 걸림없이 허공을 나는 학과 같고 청정하기가 구름없는 하늘에 밝은 달과 같다고 출가의 당위성을 일러주시는 말씀이 새롭게 와 닿았다. 출가한 뒤에는 예의가 세법世法과 달라 군왕이나 부모에게 절하지 않는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법기法器를 길러준 부모의 은혜에 세 번 절하는 게 무척 당당해 보였다.
“같이 사랑하며 오래 산다 하여도 때가 되면 반드시 헤어지나니 이렇게 무상은 잠깐임을 알았으니 저는 이제 해탈을 구하나이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이 출가하여 부왕께 전한 게송이다. 왜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는지를 똑똑히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스님네의 수계식에 부모와 친지들이 참석하여 불문에 드는 아들을 진정으로 축하해 주지 못하는 우리네 인습이 아쉽다. 아직도 우리 부모들 가운데는 출가를 무슨 인생의 포기나 현실도피쯤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세간에서 바라보는 안타까움의 눈물이 승화되어 기쁨의 눈물을 흘릴 정도의 그런 신심있는 부모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이윽고 체발剃髮순서. 큰그릇에 떠 놓은 물로 머리를 축이고 삭발하는 시늉만 한다. 미리 머리를 자그고 행자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머리카락은 무명초無明草요, 칼은 그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는 금강보검으로 세연世緣을 없애는 행위. 부처님은 이렇게 찬탄하시고 있다. “장하다 대장부여, 능히 세상의 무상함을 알았구나.” “세속의 진흙에서 나왔으니 참으로 용기있는 일.” 이렇게 몸과 마음이 다 출가한 것을 일러 호심출가好心出家라 한다. 세 속의 명리名利에 이끌리지 않고 인정에 끄달림이 없어야 진정한 사문沙門이라는 이야기다. “옴 살바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모든 죄업을 드러내 참회하는 소리가 어찌나 장엄한지 나도 한참을 따라 외쳤다. 걷어올린 팔뚝에 놓인 쑥뭉치에서 연烟이 오르고 곧 살점이 타들어간다. 따끔하는 정도의 아픔이다.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정신이 아니면 수행도정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음을 연비를 통해 조금쯤 알았을지 모르겠다. 깎은 머리에서 출가분사를, 그리고 선명한 연비자국에서 지계청정을 점검하라고 일러주시는 스님의 말씀. 연비 자국이 아물지 않은 그들보다 내게 더 절실한 물음인 것 같아 귓볼이 절로 뜨거워 왔다. 계사스님은 사미로서 지켜야 할 열 가지 계율을 일일이 문답하신다. “지키겠느냐 말겠느냐.” “지키겠습니다.” 한 구절씩 새기면서 나도 또 한번 출가했다. 불살생이 첫째 계율임은 모두가 아는 사실. 그리고 두번째가 불투도, 세번째는 불음행이다. 넷째가 불망언으로서 거짓말에도 네 가지가 있다. 옳은 것을 그르다 하고 그른 것을 옳다 하는 것, 허망한 말 그리고 비단결같이 늘어 놓는 말, 또 욕으로 사람을 꾸짖는 일도 포함되고 이간질하는 말도 역시 거짓말에 속한다는 것은 승속을 막론하고 알아 두어야 할 상식이 될 것 같다. 다섯째는 불음주로 술 한 번 먹는데 서른 여섯 가지 허물이 생긴다고 경계하고 있다. 몸에 분粉 바르지 말라는 게 여섯째 계율. 일곱째는 가무歌舞를 즐기지 말라는 말씀이다. 요즘엔 찬불가도 부르고 포교를 위해 아이들과 춤도 추게 된다. 이는 방편과 그릇 빠져드는 것을 똑똑하게 구별하는 뜻이고 높고 큰 평상에 앉지 말라 하신 여덟째 계율 역시 검소하게 생활할 것을 당부하는 생활지침. 아홉째는 때 아닌 때에 먹지 말라는 말씀. 예나 지금이나 식탐食貪이 공부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사미沙彌의 마지막 계율은 목숨이 다하도록 보물을 지니지 말라는 것이다. 이제 평생 지녀야 할 가사를 걸침으로써 수계의식은 거의 끝나는 셈이다. 아직 비구라고는 할 수 없는 예비 승려. 오하五夏의 법랍을 채워야 구족계를 수지하고 대중처소에서 정진하게 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가사 걸친 훤칠한 용모가 수행자의 참모습같아 넉넉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삼천계 가득 금으로 탑을 짓더라도
한 아들 출가하기를 권하는 일에
그 공덕이 미칠 바가 아니다.
이렇게 출가의 공덕을 찬탄했다. 몇 분 스님이 탄생하신 우리 설법전 뜨락엔 목련이 햇살에 마냥 벌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