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인간불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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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김경진
1992년 05월 123호
수 왕조에서 당 왕조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발전은 아주 급속하였다. 그러나 “안사의 난(安史之亂)” 뒤에는 내전이 빈번하여 부역이 날마다 가중되었으며, 많은 백성들은 사원을 국가 강제 노동을 회피하는 장소로 여겼다. 당나라 중엽부터 사원은 균전제가 파괴되는 틈을 이용하여 자기의 장원莊園을 대대적으로 확대하였고 많은 노예를 사들여 가중하게 일을 시켰다. 또 사원은 지방 귀족 세력과 결탁하여 국가 세무를 도피하고 고리대를 놓고 많은 수리 설치를 차지하는 따위로 여러 방면에서 폭리를 얻었다. 이러한 정황은 경제 문제에서 중앙정부와의 갈등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그래서 당 경종敬宗, 당 문종文宗 이래 중앙정부는 점점 불교에 대해 불만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 무종(唐武宗, 841~846년 제위)때에 와서는 마침내 제삼차 멸불사건이 일어났다.
제삼차 멸불사건은 회창會昌 이년부터 회창 오년(842~845년) 사이에 진행되었는데, 그 때 무종은 영을 내려 사원을 헐어버리고 승려들을 지정한 기일 안에 환속시켰다. 사료에 따르면 그 때 헐어 버린 사원 가운데 큰 것이 사천육백 개나 되고 작은 것이 사만 개나 되며, 환속시킨 승려가 이십육만 명, 해방시킨 노예가 십오만 명에 이르며, 양전良田을 회수한 것이 몇 천만경이나 된다고 한다. 그와 더불어 불상과 불경을 대량으로 불살라 버렸다. 그렇지만 그때 지방 세력이 때때로 중앙정부의 법령을 잘 따르지 않음으로써 정령이 전국 각지에서 실행되지 못하였던 덕분에, 이 멸불사건은 주로 장안長安 일대에만 국한되었고 변두리 지역에서는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 게다가 기간도 짧아서 무종이 죽은 뒤에 불교는 서서히 회복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제삼차 멸불사건에서 불에 타고 훼손된 불경이 꽤 많았기 때문에 그 뒤의 불교 발전에 지장이 컸던 것은 사실이다. 특히 화엄경, 법화경 계통의 승려들이 쓴 문장이 그때에 많이 산실되었다.(천태종, 현수종같은 교파에 큰 영향을 끼쳐 갈수록 쇠약해졌으며 다시는 진흥할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당무종의 멸불사건 뒤로 불교는 쉽사리 원기를 회복하지 못하였으며 사원과 승려들에 대한 중앙정부의 관리도 비교적 엄격하였다. 이러한 정황은 오대五代 전기까지 계속되었다. 후양後梁, 후당後唐, 후진後晋 세 왕조에 이르러서도 사원 건설을 엄격히 금하였으며 출가하여 사사로이 도첩圖牒을 받을 수도 없게 하였다.
그러다가 후진 시절부터 법령이 비교적 완화되어 승려들이 점차 많아졌는데, 이것이 또 다시 국가의 세금 제도와 병역 제도 실행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리하여 후주의 세종世宗 이년(서기955년)에 또 다시 멸불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이 바로 제사차 불난이다. 주 세종은 나라에서 지정한 것을 빼고는 사원을 모두 폐지시켰고, 사사로이 도첩을 발급하는 일을 금지시켰으며, 출가할 때에는 반드시 엄격한 경전 시험을 거쳐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그리고 그 무렵에 유행하던, 몸을 태우고 손가락을 태우는 것과 같은 몸을 훼손하는 행위를 금지시켰다. 이 조치로 전국에서 폐지된 사원이 절반이 넘었다. 한편으로는 민간에서 보존하고 있던 동질불상을 몰수하여 그것으로 동전을 주조함으로써 국가 경제를 발전시켰다. 이 법난을 거치면서 불교 자체는 얼마쯤 정돈되었다. 이 법난의 특성을 보면 앞에서 말한 세 차례의 법난과는 큰 차이점이 있는데, 이 법난이 남방 각지에서는 일어나지 않고 북방에서만 일어났다는 것이 그 하나이다. 주 세종이 죽고 나서 조광윤趙匡胤이 북송北宋왕조를 세우면서 곧바로 불교를 부흥시켰다.
전체로 보면, 불교가 이처럼 몇 차례나 되는 불난을 겪은 것은 한화불교 자체의 결함과 관련있다고 생각한다. 중국 남전불교와 장전불교는 힘껏 일하지 말고 놀고 먹으며 기생寄生 생활을 할 것을 주장하였다. 보기를 들면, 고대 남전불교에서 승려들은 날마다 대접을 들고 시주를 받으러 다녔지만 지금에 와서는 이런 행위는 사라져서 날마다 일부 신도들이 사찰까지 음식을 보내주고 있다. 그리고 어떤 사원은 많은 건축과 토지를 차지하고 있어서 가끔 통치자와 갈등을 일으키곤 하였다. 중국 남북조 때부터 당 오대까지 통치자들이 멸불 사건을 일으킨 원인은 그 무렵 심각하던 정치, 경제 문제와 복잡하게 연관되어 있다. 한화불교는 이러한 배경과 원인으로 그 사리事理를 점차로 인식하게 하였다. 귀결하여 보면, 한화불교가 생존하려면 남전불교처럼 국가와 사회의 정황을 외면해서는 절대로 안되며 반드시 중국의 사회 정황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 송대부터 중국의 한화불교는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선종은 농선農禪제도를 실시하여, 한편으로는 승려 생활을 하고 다른한편으로는 농민 생활을 하여 스스로 노동하여 불교를 부양하여 나갔다. 이러한 관습은 지금까지 이어져 와, 한화불교 승려들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노동을 계속하고 있으며 고기를 먹지 않는 등 엄격하고 변함없는 규정을 지키고 있다.
현대의 한화불교는 “국토를 장엄하게 하고 중생을 이롭고 즐겁게 한다(莊嚴國土,利樂有情)”는 행동 구호를 제기하고 있다. 국토를 장엄하게 하는 행동은 국가에 아주 이로운 일이며 중생을 이롭고 즐겁게 하는 것도 사회에 아주 큰 도움을 주는 일이라는 것이다. 지금 중국 불교협회에서는 ‘인간불교人間佛敎’ 라는 것을 제창하고 있다. ‘인간불교’의 내용은 중국 불교가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이 시대 중국의 국가적인 목표와 잘 협조하여 나간다는 것이다.
불교가 이시기의 사회주의와 협조하는 점은 아래 두가지 면에서 볼 수 있다. 첫째로 국가는 정책과 법률에서 불교의 신앙 자유를 존중하고 보호한다. 둘째로 불교도는 국가를 사랑하고 법을 지키며 정부의 영도를 옹호하며 적극적으로 사회주의 물질 문명과 정신 문명의 건설에 복무한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은 첫째로 ‘농선병중農禪幷重, 일일불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의 우수한 전통에서 볼 수 있다. 사회주의 정신 문명의 건설이라는 면에서 보면, 인간 정토를 건설하고 국토를 장엄하게 하고 중생을 이롭게 하고 즐겁게 하는 사상, ‘중생평등’의 주장과 ‘보국가은報國家恩, 보중생은報衆生恩, 보도중생普渡衆生’의 력과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 자정기의自淨其意’의 원칙과 ‘광학다문廣學多聞, 난학능학難學能學, 진일체학盡一切學’의 교도와 ‘자리이타自利利他, 광종복전廣種福田’의 사상과 같은 불교의 주장은 사회주의 문명 건설에서 공민公民은 반드시 이상과 도덕과 문화가 있어야 하고 규율을 지키고 조국과 인민과 노동과 과학과 사회주의를 사랑해야 한다는 요구와 일치한다. 그래서 불교는 가히 사회의 문명 건설을 위해 복무할 수 있는 것이다. 중국 정부는 “일체 사회 건설에 이바지하고 중화를 진흥시키며 조국의 통일에 유리한 적극적인 사상과 정신, 모든 민족의 단결과 사회 진보, 인민의 행복에 이바지하는 적극적인 사상과 정신, 성실한 노동으로써 미만한 생활에 이바지하는 사상과 정신은 마땅히 존중과 보호를 받으며 크게 발양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필자는 여기에서 강조된 세가지 ‘일체’의 사상과 정신은 오늘날의 ‘인간불교’실천에서 반드시 실현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인간불교’를 실천해 나가면서 불교 자체의 소극적인 현상을 극복하고, 불교 자체의 우수한 전통을 계승하고 발양하여 시대의 조류에 적응해 나아가며, 불교도의 언행이 헌법에서 요구하는 규정에 일치해야만 나라의 안정과 단결에 이바지하며 사회문명 발전에 크게 공헌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