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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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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서관순 1992년 05월 123호
찔레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저수지 둑을 따라서도 피어 있고 가파른 언덕길 양편에도, 산으로 향하는 그늘진 오솔길에도 피어 있었다. 하얀꽃이었다. 오월 하늘은 뜨거운 열기를 한꺼번에 쏟아붓겠다는 심사인 듯 훅훅거렸다.
열 살을 조금 넘긴 소녀 세 명이 어디론가 열심히 걸어가고 있었다. 나뭇잎을 꺾어 햇볕을 가리기도 하고 조그마한 그늘을 찾아들어 쉬어가기도 했다. 또랑물에 얼굴을 씻기도 했다.
오랜만에 맞이한 공휴일(부처님오신 날)이었지만 재미있는 일이 없었다. 텔레비전이 없으니 만화영화를 볼 수도 없었고 밖에 나가 뛰어노는 것도 더위 때문에 쉽게 지칠 뿐이었다. 한집에 모여 놀던 소녀 중 한 아이가 이웃집 아주머니한테 들은 이야기를 생각해 냈다.
“oo에 절이 하나 있는디 이번 부처님 오신 날에 거그 가서 등을 켜야 쓰것소.”
세 소녀는 그 절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햇볕이 머리 꼭대기에서 비추는데도 절은 보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보자기에 무엇인가 싸 머리에 인 아주머니들이 그들을 앞질러 가곤 했다. 꾸불꾸불 이어지는 팍팍한 도팍길(돌길)은 걸을수록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목이 말랐다.
얼마쯤 걸었을까. 노랫소리 같기도 하고 사람들의 웅성거림 같기도 한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무엇인가를 두드리는 맑은 소리도 함께 묻어 있었다.
발소리를 죽여 가며 담장 너머로 훔쳐본 마당에는 알록달록한 등이 듬성듬성 걸려있었다. 쉼없이 절을 하며 비는 아주머니들도 여럿 있었다. 새로 온사람을 위해 등을 걸기도 했다. 사람이 많은 건 아니었는데 마당이 넓지 않은 탓에 꽉 찬 느낌이었다. 낯익은 얼굴은 아무도 없었다.
조금 높은 곳에 위치한 건물에선 합창을 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건물과 마주한 곳에 있는 담벼락에 여전히 몸을 숨기고 빠끔히 내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큰 절을 하며 무엇인가 염을 하고 있었다. 덕석을 깔고 건물 밖에서 절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다른 사람 앞에 얼굴을 내밀 만큼 숫기를 가지지 못한 아이들이었지만 용기를 내어서 건물 앞까지 갔다. 다행히 절을 하는 데 정신이 팔려 아이들을 쳐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활짝 열린 문 사이로 내비치는 건물 안엔 촛불이 켜 있었다. 여러가지 색깔로 칠해진 그림이 걸려 있었고 벽과 기둥에도 그림이 걸려 있었다. 촛불 사이엔 시커먼 물체(철불이었다)가 하나 있었다. 어깨가 떡 벌어진 건장한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그 물체를 향해 절을 하는 모양이었다.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눈은 반쯤 감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너희들 속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한 소녀는 살아서 고약하기로 소문이 났다던, 안방에 걸린 초상화 속의 할아버지를 생각했다. “네 이년! 여기가 어디라고.” 다문 입술이 열려 그렇게 말할 것만 같았다. 왈칵 무서움증이 들었다. 뒷걸음질 쳐서 밖으로 뛰어나왔다. 넋을 잃고 건물 안을 훑어보던 두 소녀도 놀라서 뒤따라 나왔다.
담벼락에 몸을 기댄 채 한 소녀가 집에 가자고 졸라댔다. 눈엔 눈물이 가득했다. 절에 가자고 처음 제안했던 소녀가 싫다고 했다. 옆집 아짐(아주머니)을 만나면 밥을 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시장기가 돌았다. 담장 너머 마당 한 켠에선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마솥을 내걸고 불을 지피기도 했다. 정확히 분간할 순 없었지만 음식 냄새도 맡을 수 있었다.
절에 가자고 부추킨 소녀가 옆집 아짐을 찾아보겠다며 담장 너머로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찾았냐고 몇 차례 물었지만 소녀는 그때마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함께 찾아볼 요량으로 셋이서 고개를 내밀고 열심히 주변을 더듬고 있는데, “아그들아! 거기서 머하냐(얘들아 거기서 무엇하느냐)?” 하는 소리가 들렸다. 세 소녀는 흠칫 놀라 일제히 뒤를 돌아보았다. 빡빡 깎은 머리에 두루마기같은 옷을 걸친 이상한 사람(?)이었다. 얼핏 보니 빙그레 웃고 있었다. 세 소녀는 대답할 여유를 갖지 못했다. 냅다 도망을 쳤다. 굵직굵직한 돌멩이가 깔린 길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도망쳤다.
한 소녀가 더 이상 뛸 수 없다는 듯이 풀밭에 주저앉고 말았다. 다른 두 소녀도 기다리기라도 한 듯 그 옆에 주저앉아 버렸다.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세 소녀는 단맛이 차오른 찔레나무 순을 꺾어 한아름 안고 그 산사에서 흘러오는 계곡물에 발을 담근 채 연한 찔레나무순 껍질을 조심스럽게 벗겨냈다.
불기 2536년의 부처님 오신 날은 고향 마을 그 암자에서 보냈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