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중심으로 온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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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박연진
1992년 05월 123호
우리집 마당에는 땅에 뿌리를 내린 나무가 한 그루도 없다. 고만고만한 화분에 족신을 신은 발처럼 뱅뱅 뿌리를 돌려대며 자라는 화초들만 있을 뿐이다. 지금은 돌아가신 외삼촌이 십오륙 년 전쯤에 키가 조그마한 앵두나무, 모과나무 그리고 감나무를 심어 주신 덕에 우리 집 마당은 가장 먼저 봄 냄새를 맡는 기특한 공간이었다. 추운 겨울날 분홍빛, 붉은빛으로 버그러지는 동백꽃을 보면서는 봄날에 연분홍빛으로 아찔하게 피는 앵두꽃을 떠올리며 겨울을 잊곤 했다.
이내 삼월 중순이면 메마른 가지 위에 붉은빛 봉오리가 아이들 열꽃마냥 뽀르르 빈틈없이 돋아난다. 이제나 저제나 하다가 어느 날 ‘툭’하고 한꺼번에 일어나는 앵두꽃은 참으로 고왔는데... 서로를 부비면서 피어나는 새끼손톱만한 앵두 꽃잎들은 언제나 그득히 빛나는 봄 그 자체였다.
어쨌거나 나는 지금 거리에서, 밤톨 같은 묘지의 잘 깎여진 잔디에서, 그리고 색색의 봄을 피우는 나무들에서 봄을 느끼며 ‘그래 봄이구나’하고 되뇌인다. 힘차게 뻗은 녹색나무들, 그 사이로 물감 번지듯 주르르 흐르는 우리집 앵두꽃을 닮은 벚꽃을 보면서 더욱 봄을 느낀다. 참 아름답지? 참 많이도 피었고 잘도 커 나아가는구나. 일본의 꽃, 벚꽃은.
미묘한 혼란이 봄 햇살에 산란스럽게 부서진다. 무궁화는 제껴두고라도 나비같이 꽃술을 봉긋대는 진홍빛 잔달래와 훅 불면 날아갈 듯이 노랗게 샐죽대는 개나리가 벗꽃보다 자그마한 키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동네 꼬마녀석들처럼 꼭 끌어안고 싶을만큼 예쁘고 순수하지만 한편으로는 속이 상하고 마음도 영 편치가 않다.
하지만 처음부터 슬픔이니 기쁨이니 하는 따위의 감정은 ‘나’를 남과 경계지어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생겨난다고 한다. 연분홍빛 꿈으로 현란하게 드리운 벗꽃 그늘 아래서 얼굴이 희끔해지도록 봄에 흠뻑 취했다가는 그 꽃이 일본의 꽃임을 문득 기억해내고는 애써 외면하려는 의식이 부자연스럽고 어리석은 듯도 하다. 자연은 국적을 얻으려는 몸짓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나무들은 단지 열심히 자양분을 빨아올려 봄이 되면 자신에 맞는 꽃을 피울 줄 알며 또 때가 되면 작은 힘에도 몸을 떨구어 기꺼이 빈 몸이 되는 삶의 중심을 든든히 지킬 줄 아는 지혜로운 존재이다. 무심하게 웃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유심有心하게 인식하는 것은 뿌리 깊은 중생의 고약한 버릇인 듯 하다.
‘일체의 상相을 여의면 즉 여래를 볼 수 있다’는 말씀이 금강경에 나오는데 그 말씀은 중생이 상相을 여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사실과 그럴수록 상相을 여의기 위해 필사적으로 계속 정진해야 함을 말씀하신 듯하다.
‘나’라는 상相을 여의고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살아온 시간이 ‘나’라는 아상我相을 똘똘 말아올리는 데 다 쓰였던 까닭에 입만 열면 “내 생각에는 어쩌구 저쩌구...” 하며 신나게 말했다. 그러나 똑똑한 ‘나’는 “내 생각에는...” 따위의 여러 말로도 나 자신조차 이해시키지 못한 채 언제나 중심을 잃어버린 느낌을 극복할 수 없었다. 매순간 나에게 진실은 변해갔고 변화에 그때 그때 적응하는 순발력은 가을이면 맥없이 가슴 두드리는 감상적인 소녀의 나약한 정신을 가지게 되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말이다. 대학 사 년 그리고 그 뒤의 모든 시간들이 마치 넋두리처럼 지질하게 흘러갔다. 그 많은 세월 속에서도 특히 가을엔 늘 맥을 못추고 젊음이라는 탄탄한 영혼을 공연히 이리저리 틀어쥐며 어지간히 우왕좌왕했다. 무엇이 그리 벅찼을까? 아마도 ‘나’와 또 하나의 ‘나’와의 괴리, 마치 벗꽃을 애써 외면하려 했던 것 같은 맞아 떨어지지 않는 감정과 이성의 옅은 골이 내 딴에는 커 보였었던 까닭이었겠지 싶다.
그러다가 뜻밖에도 내가 변화의 실마리를 두 손에 꼭꼭 거머쥘 수 있는 소중한 인연이 작년 여름에 찾아왔다. 산만하게 흩어진 삶을 주섬주섬 들었다 놓았다 하는 일이 버릇인 나에게 불교는 새로운 의미로 다가와 서서히 삶에서 중심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변혁(?)의 물결을 끼얹는 듯한 그 일은 충격이었으며 감격이었다.
어떤 사람은 나의 이런 말이 너무 과장된 것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나는 이런 반응에 “글쎄요. 그 이치가 묘하더군요” 하고 답해주는 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말이 없다. 만일 이전에 누군가 나를 붙들고 삶의 중심으로서 불교를 역설했더라면, 나는 종교라는 피안의 세계를 냉소적으로 마주했을 것이다. 예전에 읽었던 ‘데미안’이 지금은 그때와 달리 가슴을 휘젓는 이치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심지어 시간이나 장소 등-에는 때와 인연이 있는 듯하다.
나와 불교와의 인연은 태어나면서부터 였고 대학에 다닐 때도 가을을 좋아했던 것과 같은 이유로 절에 자주 갔었다. 좀더 엄격히 말하자면 절터에 가는 것을 좋아했던 셈이다. 그러나 법문이 있거나 큰 행사가 있는 날에는 되도록 가지 않으려고 했으니 이른바 ‘나이롱 불교도’ 였다고 할 수 있다. ‘나이롱’인 주제에 까다롭게도 많은 조건을 내걸고 불교를 그 조건 안에서만 인정하려고 했다. 믿는 종교 그리고 그 믿음으로 나아가는 종교로서 불교가 아닌 합리적이며 인간 선언을 한 철학적이고 멋있는 종교로서 받아들이려고 하다 보니 엉뚱하게도 무릎 빠지게 절하고 공덕이 된다면 무엇이든 기꺼이 하려는 보살님들에 대해 곱지 않은 마음을 갖게 되었다. 초파일 날 조계사 도량이 연등과 신도님들로 정신 없이 북적거리는데 그 와중에 자신의 이름이 붙어있는 연등을 찾느라 밀고 밀치며 아수라장을 만드는 신남신녀. 조계사 도량 어디에선가 지혜의 등, 광명의 등이 사월 부처님 오신 날을 기리어 스스로 조용히 불을 밝히고 있을 터인데 그것을 찾아서 무엇할 것인가?
그래도 이제는 손에 꼭 잡히지는 않아도 얼마쯤 알 수 있는 느낌이 있다. 불경 한 경구를 쉬 이해할 수 있는 우리 젊은 세대가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것은 바로 정성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 우직스러운 정성, 그래서 때로 답답해 보이기까지 하는 노보살님들의 하늘을 닮은 그정성이 오늘의 불교가 있도록 한 힘이었음을 생각한다.
해인사 수련기간은 불교라는 세계를 향해 문을 활짝 열어준 시간이었다. 진정한 자유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받은 기간이었다. 이제 나는 삶의 중심을 잃지 않고 참 나를 찾는 자유인을 꿈꾸며 조금식 뿌리를 깊이 내리려고 한다.
그렇다. 종교란 놀랍게도 가슴에서 가슴으로 깊게 전달되는 그런 것이다. 한번을 만나도 느낌이 중요하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