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여름결제를 하게 되었습니다. 결제는 늘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결제를 시작하면서 바로 삭발을 하고 목욕을 합니다. 마음이 느슨해지려는 보름 뒤에 또 삭발과 목욕을 합니다. 삭발과 목욕이 단순히 보름마다 이루어지는 일상적인 일이 아나라 이 역시 수행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어느 스님은 새벽에 눈을 뜨기만 하면 맨머리를 만져 보면서 “아! 내가 출가수행자이구나”라고 하면서 스스로를 확언하고는 마음을 다잡곤 했습니다.
목욕탕에서 이름 없는 한 선지식은 이런 법문을 우리에게 남기고 있습니다.
“이 몸은 본디부터 비린내 누린내 나는 것이 임시로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라. 가죽과 털, 진액과 가름기가 끊임없이 생기는 것이니 설사 바닷물이 다하도록 평생 씻어도, 나귀 해가 올 때까지 씻어도 깨끗해질 줄 모른다. 몸에서 일어나는 때는 그래도 잘 씻겨 나가지만 마음은 욕심경계를 따라가서 더더욱 물드는구나. 발상하구나. 근본을 잊은 사람들이여 ! 한갖 피부만 씻을 뿐 마음은 씻지 않는구나. 물통 가득 넘치는 더운 물, 큰 그릇으로 떠내어 낭비를 일삼는데도 시주자들은 복에 돌아올 것만 기다리고 있구나. 다음 생에 자기가 태어날 곳을 모른다면 설사 복이 수미산과 같다고 할지라도 그 자리에서 다 녹아 없어져 버림을 보게 될 것이다.”
이 법문에서 보듯 우리는 목욕을 할 때조차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옛날 한 비구가 목욕을 하면서 장난치고 웃고 하다가 정념正念을 잊어버려 뒷날 끓는 불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고인들은 목욕탕에서도 마음을 잡아매어 관觀하게 하고는 늘 다음과 같은 발원문을 외우게 하였습니다.
“내 이제 육신을 씻으며 발원합니다. 중생의 몸과 마음의 때가 없어져서 안팎으로 빛나고 깨끗하게 해 주십시오.”
오늘 산승이 결제일을 맞이하여 발타파라跋陀婆羅와 그의 도반 열여섯 명이 동시에 깨친 수인삼매 법문을 할까 합니다. 한 명이 아니라 무려 열여섯 명이 함께 목욕탕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개사수인開士水因’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능엄회상에서 발타파라와 그 도반 열여섯 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에다가 정례하고 부처님께 사뢰었습니다.
“저희들은 처음 위음왕불威音王佛께 법을 듣고 출가하였사오며, 스님들이 목욕할 때에 차례에 따라 욕실에 들어갔다가 문득 수인水因을 깨달으니 진진을 씻음도 아니요, 체體를 씻음도 아니며 중간에서 안연安然하여 무소유를 얻게 되었으나, 숙습宿習이 없어지지 아니하였으며, 내지 금시에 부처님을 따라 출가하여 무학無學의 도를 얻게 되었으며, 저 부처님께서 나를 발타바라라고 이름하시오매, 묘妙한 촉觸이 선명宣明하여 초지위初地位를 이루었나이다. 부처님께서 원통圓通을 물으시니 저의 증득한 바로는 촉인觸因이 으뜸이 되겠나이다”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위음왕불은 공겁空劫 때에 맨 처음 성불한 부처님입니다. 진塵을 씻음도 아니요 체體를 씻음도 아니라는 말은 신근身根으로 색진色盡 곧 물질에 합하여 그 중간에서 물아 차고 뜨겁고 거칠고 부드러움의 촉觸이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이 촉은 어떻게 나타나는 것입니까? 만일 진구塵垢를 씻어 생긴다면 진塵은 무정물無情物인데 어떻게 촉觸을 나타낼 수 있습니까? 만일 승의근勝義根의 각체覺體를 씻으므로 생긴다면 각체는 불로 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중간에서 안연安然한다는 말은 중간은 진塵과 체體의 중간이요, 안연은 깨달아서 자재自在한 모양이요, 무소유를 얻었다는 것은 촉진觸塵이 내처來處가 없다는 말인 것입니다.
즉 발타바라가 여느 때처럼 욕실에 들어갔다가 흘연히 수인삼매를 깨치고는 “육진六塵도 씻지 않았으며, 몸을 씻지도 않았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말해 보십시오. 무엇을 씻었습니까?
이를 안다면 늘 편안하여 무소유 곧 있는 바 없음을 얻어 천만 가지 그 무엇도 가까이 갈수 없을 것입니다. 이른 바 얻을 바도 없다는 것이니 이는 참다운 반야입니다. 만일 얻은 바 있다면 이는 사이비 반야입니다.
달마스님이 혜가에게 말하였습니다.
“편치 못한 마음을 가져 오너라. 너에게 편안함을 주리라.”
“마음을 찾아 보아도 끝내 찾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납승의 성명性命의 근본이니 결코 허다한 갈등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홀연히 수인삼매를 깨달았다”는 것만 소화시킨다면 자연히 깨칠 수 있을 것입니다.
“육진도 씻지 않았으며 몸도 씻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 경지에서는 말 한 마디 붙일 수가 없는 곳입니다.
“묘촉妙觸 곧 오묘한 감촉이 선명宣明 곧 또렷이 빛나며 초지위初地位를 이루었네”라고 하였는데 선宣이란 밝게 나타남이며 오묘한 감촉이란 밝음입니다. 오묘한 감촉을 깨쳤다면 바로 부처의 지위에 오른 것입니다.
요즈음 납자들은 목욕하기도 하고 물로 씻기도 하면서 이처럼 촉觸하는데 무엇 때문에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까? 이는 모두가 육진 경계의 미혹에 가리고 끈끈한 피부가 뼈에 달라붙은 듯이 집착하기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씻어도 얻은 바 없으며, 물을 만져도 얻은 바 없고 수인삼매 또한 얻은 것이 없습니다. 묘촉妙觸이란 일반적인인 감촉이 아니라 감촉한 사람과 서로 제대로 합해진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덕산스님의 방망이도 제대로 맞기만 한다면 바로 묘촉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유자재 하다면 굳이 목욕하러 들어가는 것에만 한정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한터럭 끝에 보왕의 세계가 출현하고 미세한 티끌 속에서 큰 법륜을 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 곳을 꿰뚫으면 천 곳 만 곳이 일시에 꿰뚫리는 것입니다. 어떤 한 가지라도 관음이 진리로 들어가는 문인 것입니다.
옛 사람은 소라를 듣고서 도를 깨닫기도 하였고, 색色을 보고 마음을 밝히기도 하였습니다. 발타바라 한 사람만이 깨친 것이 아니라 열여섯 보살이 동시에 깨친 것입니다. 그래서 고인들은 함께 닦고 함께 깨쳤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총림에 모여서 목욕을 하고 삭발을 하고서 결제를 하기 위하여 모인 것도 함께 닦아서 함께 성불하자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자막으로 산승이 ‘개사수인開士水因’ 공안에 대하여 한마디 이르고자 합니다.
“마음이 마음을 보지 못하나 기동하기 전에 안목이 갖추어졌고, 물로 물을 씻지 못하나 당장 온 몸에 두루하구나. 그러기에 성품인 물이 진공眞空이요, 성품인 공이 진수眞水이니 청정하고 본연해서 법계에 두루함이라. 하지만 묘촉이 선명하다는 곳이야 어떻게 생각해야 되겠는가? 다른 사람이 더러운 물 뿌리기를 기다리지 말고 차고 더움을 자기가 알아야 하느니라.”
료사납승了事納曾이 소일개消一箇하고
장련상상長連牀上에 전각와展脚臥로다.
몽중夢中에 증설오원통曾設惜圓通하니
향수세래맥면타香水洗來驀面唾하리라.
생사의 일을 마친 납승은 한사람만이 필요하니
길다란 평상 위에 다리를 뻗고 누웠네.
꿈 속에서 원통을 깨쳤다고 말하니
향수를 뿌리다가 낯에 칩을 뱉는 꼴이 되었네 .
불기 2543년 하안거 결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