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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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김정학
1992년 05월 123호
‘부처님 오신 날’을 맞는 감회는 분명 사람마다 큰 차이가 있겠다. 하지만 감회란 것은 언제나 특별한 사건을 중심으로 되살아나기 마련이어서, 웬만한 충격이 없다면 살아가며 풀어지고 쉽게 삭혀진다. 가슴에 오랫동안 남는 것이 없다는 얘기다.
‘부처님 오신 날’은 불가에서 가장 큰 명절이기에, 불자라면 누구나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지낼 것이므로 별로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 자신에게서 ‘부처님 오신 날’은 해마다 큰 부담(?)일 뿐만 아니라 반드시 치루어 내야만 하는 통과의례임을 부인할 수 없다. 특집 프로그램을 제작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다. 시간이 갈수록 잊혀져야 좋을 고생담이 엮어지는 순간이니까 말이다.
듣는 이의 심금을 울려주고 부처님이 이 땅에 나투신 큰 뜻을 어떤 비유를 들어 어떻게 들려줄 것인가 하는 고민에 나는 늘 시달린다. 오히려 장군죽비가 견정혈肩頂血을 내려치는 듯한 충격을 느낀다는 편이 나을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그것이 세상을 살아가며 만나는 갖은 수마睡魔를 조복시키는 것인 줄은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나에게는 지난해 ‘부처님 오신 날’ 특집 프로그램을 준비하면서 경험했던 향기로운 추억이 있다.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괜스레 눈자위가 붉어지기도 하고, 최루가스에 취한 듯 콧물과 눈물을 훔쳐냈으며, 메말라 있던 가슴이 뭉클해졌던 그 향기로운 추억의 내력을 나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지난 한해 동안 내내 이웃들에게 들려주곤 했다.
지난해 초파일에 불교방송 전파에 실렸던 특집 다큐멘터리 ‘자비로 크는 아이들’을 만들면서 나는 사람의 향기에 흠뻑 취했다. 거의 이십 일 동안 서울을 시작으로 원주, 부안, 예천, 광주, 대구, 부산, 대전 등지를 샅샅이 누비면서 부처님의 가피로 살아가는 어린 친구들을 만났다. 그 누구도 기꺼이 하겠다고 나서지 않을 이 세상의 궂은 일을 원력으로 삼은 스님들의 푸른 눈이 오월의 신록과 어울려 내 가슴으로 가득 밀려왔다.
이 나라 방방곡곡 부처님 품안에서 자비로 크는 아이들은 주먹구구로 줄잡아 팔천여 명에 이른다. 더 많았으면 많았지 결코 그보다 적지는 않을 그아이들의 뒷바라지에 스님들은 오늘도 애꿎은 구업口業을 짓고 어려운 절살림에 시달리지만 맘 졸이고 애달파하는 일, 그 모든 것이 중생과 더불어 사는 보살의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부처님 오신 날’
과연 부처님은 어디로 오셨단 말인가. 오색찬란한 연등 불빛으로만 오셔서 대가람의 법당 뜰만 밝히시는 것은 아니리라. 마냥 즐겁기만 한 축제의 시간으로만 다가오신 것도 아니리라. 나는 전국의 ‘절집 아이들’과 그들을 지성으로 키우는 ‘스님아빠’ 들을 만나면서, 가장 깨끗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기다리는 이들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다.
절에서 만든 메주로 아이들을 키우는 원주 영천사 선광스님, 버려진 아이를 자신의 호적에 올려놓아 대식구의 가장노릇에 여념이 없는 해인사 길상암의 명진 스님, 정신박약아 미나의 자애로운 아빠(?)인 비구니 범조 스님, 자신을 위해 피붙이를 버렸던 독한 부모가 다시 찾아와 애써 키운 아이를 말 한마디없이 데리고 가 버릴 때 허탈해 했다는 광주 향림사의 보성스님, 허약한 은정이를 위해 절밥으로는 부족해 개구리 다리를 눈 질끈 감고 삶아 먹였다는 부안 청일암의 혜경스님, 골수암 앓는 원심이를 지성으로 살려낸 예천 연꽃마을 법흥사의 정안 스님, 먹물옷 입고 호텔에서 맞선 보이고 결혼시키고 폐백상에서 딸과 사위에게 절 받으며 울어 버린 대전 법륜사의 길상 스님...
‘부처님 오신 날’을 맞기 위해서 나는 테이프 속의 사연들을 간추리느라고 며칠 밤을 하얗게 샐 수밖에 없었다. 백분이라는 초대형 특집 프로그램으로도 다 담을 수 없는 짙은 향기를 뿜어 내는 얘기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버려진 아이를 애써 얻었다고들 표현하는 스님들의 품속에, 그 아이들이 버려져 자라고, 떠나서는 다시 부처님의 품속으로 돌아온 감동적인 사연을 밤새워 어루만지며, ‘이곳에 부처님이 와 계시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또 단 한번도 애들을 불쌍한 눈으로 바라본 적이 없는 스님이 아이들 때문에 숨죽여 우는 모습을 기억해 냈다.
부처님께서는 초대하지 않았어도 왔다가 허락하지 않아도 떠나는 게 우리 인생이라고 이르셨지만, 어린 나이에 그네처럼 떠다녀야 했던 우리의 어린 벗들은 그동안 무슨 꿈을 꾸고 살아왔을까. 이들에게 연꽃과 같은 세상을 꿈꾸며 자비의 씨앗을 심는 스님들을 맺어 준 어진 이는 누구인가.
자비의 영토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들이 마침내 사라져 빈 방만 남을 그 날을 위해, 오늘도 목청 높여 구업을 짓고, 회초리를 들며, 병이 나면 업고 뛰고, 밤늦게 오는 딸아이 마중을 나가고 조바심 속에 아이의 담임선생을 만나러 학교에 가며, 누군가의 가르침대로 이 일들을 땀흘리며 전력을 다해 끌어안는 스님들을 보면서 ‘부처님 오신 날’의 참뜻을 나는 깨달았다.
올해도 고통스럽게 느껴질 ‘부처님 오신 날’이 다가온다. 하지만, 이제는 사람의 향기를 제대로 맡았던 지난해의 추억으로 해서 나의 향기까지 그 추억 속에 보태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