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내 살던 버버리(벙어리)는 그대로 살고 있습니까?”
“글쎄, 결혼해서 딸을 낳았는데 벌써 고등학교에 다닌다고 하고, 아들도 하나 낳았다고 하던데 아마 세 살쯤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버버리 어머니도 여전히 살아있고.”
“하던 일도 여전히 그 일을 하고 있구요?”
“그렇지. 지금은 여러가지 일을 하고 있는 모양이더라. 함석으로 채양을 만들기도 하고 샷슈 일도 해서 살기 편하게 되었다고 그러더라. 그런데 왜 버버리 얘기는 갑자기 꺼내는 거니?”
“고향을 생각할 때면 늘상 머리 속에 떠오르는 아름다운 분이예요. 내 기억에 여러모로 좋은 인상을 떠올려 주는 분이거든요.”
일전에 어머님께 전화드렸을 때에 서로 나눈 이야기 가운데 일부이다. 버버리는 나의 고향 마을 부근에 살면서 튀밥을 튀겨 주는 것을 본업으로 삼고 있던 사람이다. 버버리는 그 일뿐만 아니라 땜쟁이 일까지도 솜씨있게 할 수 있는 재능꾼이었다. 그를 ‘튀밥쟁이’나 ‘땜쟁이’로 부르지 않고 그저 ‘버버리’라고 불렀던 것은 그가 말을 못하는 장애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때만 하더라도 시골 마을에서는 군것질감이 전혀 없었고 일용품도 쉽게 구입할 수 없었으므로 버버리의 방문은 동네 어린이들은 물론 아주머니들에게까지 매우 반가운 일이었다. 그는 일정한 주기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면서 튀밥을 튀겨주거나 낡은 그릇 따위를 손질해 주는 허드렛일을 하면서 홀어머니와 함께 소박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던 버버리도 내가 어렸을 때 이미 서른살이 넘었으므로 지금은 오십대 후반이 되었을 것이다.
버버리의얼굴에는 언제나 미소가 있었다. 늘 웃고 있는 복스러운 얼굴에서 마을 사람들은 친근감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 같은 어린애들은 까닭없이 버버리를 무서워하기도 했지만, 그가 우리들에게 무섭게 대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떡국대나 옥수수를 튀겨 먹을거리를 제공해 주는 고마운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얼굴은 추하고 귀신 같지만 마음은 맑은 물과 같다고 알려진 문절공文節公 주열朱悅에 견줄 수 있는 인물이었다.
버버리가 내 기억에 인상적으로 남게 된 데에는 그의 어머니가 가지고 있던 분위기 탓도 있을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한때 우리 아버지의 어린 시절을 돌봐주신 인연으로 우리집과 각별한 친분을 맺고 있었는데 그의 어머니는 성미나 외모가 워낙 깔끔한 분이었기 때문에, 벙어리 외아들과 외롭게 살고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정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내가 여기서 버버리 일가를 사뭇 장황하게 소개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태어날 때부터 장애인이었으며 가난하기 그지없는 환경 속에서 자라났다는 것이 그의 행동을 어떻게 구속하였는지를 생각해 보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창조적이고 아름다운 것으로 가꾸기 위하여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였다. 그는 자신이 선천적으로 벙어리 업을 타고 났고, 후천적으로 논 한 뙈기도 가지지 못한 튀밥쟁이며 땜쟁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직 근면함과 검소함으로 자신의 생업을 해 나갔다.
불교인들은 대체로 자신의 현재 상황과 행위를 과거의 업과 관련하여 회고하여 반성하곤 한다. 더 나아가서는 개과불린改過不吝하는 자세를 미덕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이것은 과거의 행위에 대한 반성이 솔직해지고 깊어질수록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감탄과 도덕률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에서 관례화된 태도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원력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평안이나 행복 같은 모든 문제가 자신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철저하게 이해한 바탕에서 현재를 규정짓고자 한다. 회고적인 반성의 대상으로 떠오른 과거의 행위는 적어도 현재의 처지와 행동을 합리화하는 데에 어떤 형태로든 이용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과거의 여러 사실들은 자신의 현재 사고와 행위를 합리화하기 보다는, 이것들을 바르게 가다듬고 현재의 자신을 가다듬는 토대가 되어야만 유용하다는 결론을 잠정적으로 내릴 수 있다.
한편, 이와는 달리 과거의 행위가 현재를 규정짓는 역경계로 나타날 때도 있음을 알아두어야 한다. 이럴때 행위를 유발시키는 동기는 과거의 어리석은 행동이나 약점, 편견, 악감정, 불의의 감정, 완고함 따위라고 볼 수 있다.자기 마음 속에서 시작된 과거와 현재 사이의 싸움의 결과가 갈등과 대립과 분열을 조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이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였더라도 현재의 행위가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난을 면할 길이 없다.
프랑스 속담에 “방문하였을 때 환영 받지 못한 사람은 떠날 때 환영받는다”는 말이 있다. 이는 모든 사물이나 현상은 보는 사람의 태도나 처지에 따라서 이분법적인 양면성을 갖게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회고적인 반성이 인간의 행위를 얼마나 창조적으로 나타나게 하는가 하는 문제는 개개인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다. 자신이 갖고 있는 현재의 모든 사실들이 과거의 특수한 개별 현상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태도에 따라서 차이가 생기기 때문이다.
현재 속에 봉인되어 있는 과거의 많은 사실들이 현재를 살아가는 삶의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다. 법구경法句經에서는 과거의 업에 따라 소극적인 자세로 행동하기보다는 자기가 있는 처지에서 적극적인 자세로 살아갈 것을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남의 잘못을 보지 말고
행하고 행하지 아니하는 것을 보지 말고
오직 항상 자기를 돌보아
법도에 맞나 안 맞나 살펴보라
不務觀彼
作興不作
常自省身
知正不正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정의의 문제나 질서, 균형, 온건의 문제에 대한 기대심리는 회고적 반성 속에서는 자칫하면 다른 사람을 증오하고 해치는 것으로 왜곡될 수 있다. 푸석돌에서 불난다는 말처럼 자신의 환경과 굴레가 아무리 어렵고 또 자신을 구속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극복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자세를 버버리의 삶 속에서 읽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