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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비竹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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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가의 얼과 멋 - 여연 1992년 05월 123호
죽비竹篦는 절집안에서 쓰이는 법구法具로서 목탁만큼은 널리 쓰이지는 않지만 그 못지않게 소중한 승가의 얼을 담고 있다. 대중처소에서, 특히 선방이나 강당에서 참으로 중요한 규범을 정하는 물건이기에 더 그렇다.
보통 죽비는 대나무의 마디를 자른 것이나 대추나무나 아그 배나무로 만드는데, 지름이 1촌 5푼쯤 되는 소재를 가지고 길이의 3분의 2쯤은 가운데를 타서 등 쪽으로 갈라지게 하고 그 나머지는 그대로 두어 손잡이를 만든다. 그 자루에 흔히 여러 가지 문양을 조각하기도 하고, 동백기름이나 호도 기름을 몸체에 골고루 발라 은은한 윤기를 낸다.
이것을 쓰는 법은 자루를 바른 손에 쥐고 갈라진 쪽을 왼쪽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는데, 이 소리로써 대중들이 앉고 서는 것에서부터 공양하고 또 법을 청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일상의 승행을 지도하는 것이다.
한편, 장군죽비라고 불리는 길이가 꽤 긴 죽비가 있다. 이것은 끝이 잘 휘어지도록 낭창낭창하게 일자로 만드는데, 좌선할 때에 졸음을 경책하는 법구로 쓰인다.
겹벚꽃이 관음전의 큰 돌우물에 붉은 눈이 되어 펄펄 날리던 나른한 봄날 오후, 졸음의 혼침에 빠져 흐느적거리고 있을 때, 딱-딱-, 정적을 깨는 찰중 스님의 죽비 소리에 수마의 그림자는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고 선하품을 하던 강당의 학인 시절에는 왜 그렇게 그 죽비 소리가 싫었는지.
승가에서는 지금도 변함없이 용맹정진 때에는 긴 장군죽비가 몇십개씩 부러져 나가는데, 아마도 그 경책으로 부러진 죽비 덕분에 우리네 생의 미로迷路에서 그 안개 같은 혼침을 걷고서 청아한 우주의 길을 열어 보려는 승가의 풍토가 연연히 이어지는 것이리라.
하얀 민머리의 백호를 치고 풀 잘 먹인 빳빳한 광목옷 꺼내 입고는 초하루와 보름에 조실 큰스님의 법문을 들으려고 법당에 운집한 스님네, 유난히 빛나던 눈빛들의 환희, 잠시 입선立禪의 고요가 흐르고 이윽고 들려오는 유나스님의 죽비소리...
어쩌면 여기에서 들리는 이 죽비 소리야말로 천상의 정수리로부터 쏟아지는 절대의 맑음, 그 빛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