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효봉(曉峰)선사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가람의 향기 - 시명 1992년 04월 122호
효봉선사의 생애에 대해서는 승가 안에서뿐만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편이다. 일반인들에게는 \'판사\'라는 별칭으로, 선사들에게는 \'절구통수좌\'라는 별칭으로 효봉선사의 면모는 현대 고승 가운데에서도 가장 친근하게 이야기되어 왔다. 특히 법정스님이 쓴 효봉선사의 일대기는 그 문장의 유려함과 자상함으로 하여 지금도 많이 읽히고 있다. 그러므로 효봉선사의 행장은 그 편을 읽는 것이 가장 도움이 될 것이다.
효봉선사는 일반적으로 송광사의 고승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선사께서 송광사에 오랫동안 주석하셨고 아직도 선사의 문도들이 그 곳에서 안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난에 효봉선사를 모시는 것에 대하여 신중히 생각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효봉선사께서 해인사에 가야총림을 개설하고 방장으로 추대되어 주석하시면서 한국 현대불교사에 참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에, 여기에 다시 무디고 진부한 붓을 적기로 하였다.
효봉선사께서 해인사에 주석하신 시기는 해방 다음해인 1946년 겨울부터 1950년 여름까지의 가야총림 시대로 일제 불교에 억눌린 한국불교가 새로운 활로를 찾던 시기이며, 실질적으로 가야총림을 통하여 현대불교사를 이끌고 갈 중요한 인물들이 배출됨으로써 한국불교의 새로운 장을 여는 역할 을 다하였던 것이다.
효봉선사는 1888년 5월 28일 평안남도 양덕군 상용면 안성리에서 수안 이씨 병역을 아버지로, 김씨를 어머니로 하여 다섯 형제 가운데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스님의 아명은 찬형澯亨이었다.
선사는 어릴 때부터 남달리 영특해서 이웃에 신동으로 알려져 있었다. 나이 열두살까지 선비였던 할아버지에게 사서삼경 등의 한학을 수학하였는데 열네살 때에는 평양감사가 연례적으로 베푸는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기도 하였다. 그 뒤 개화의 흐름에 따라 평양고보를 거쳐 일본 와세다 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였으며, 귀국하여 1913년부터 순조롭게 열해 동안 서울과 함흥의 지방법원에서 그리고 평양의 고등법원에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판사직에 종사하였다.
그러던 중 1923년에 동족의 사형 집행과 관련하여 인간적인 번민과 자책으로 방황하였는데, 이 방황과 고뇌의 시기에 전국을 방황하면서 새로운 인생관으로 삶의 전환을 꾀하여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6년에 금강산 신계사神溪寺, 보운암普雲庵에서 석두石頭화상을 은사로 삭발 득도하여 출가를 단행하였다.
선사는 그 뒤로 제방으로 다니시면서 선지식을 친견하는 한편 장좌불와長坐不臥 오후불식午後不食하며 오직 외길로 각고 정진하였다. 그때에 눕지 않고 한번 앉으면 움직이지 않고 정진한다 하여 선사께서 얻은 별명이 \'절구통수좌\'였다.
그러나 정진에 큰 진척이 없자 대중처소를 떠나 한층 더 가행정진을 하기 위해 스스로 금강산 법기암法起庵 뒷편에 토굴을 짓고 문을 닫아걸고 용맹정진을 거듭하였다. 선사에게는 이제 깨우치지 못하면 죽으리라는 단호한 결심뿐이었다. 그러던 1931년 여름에 선사는 스스로 막았던 토굴벽을 무너뜨리고 나왔다. 얼마나 오랫동안 앉아서 지냈던지 걸음을 제대로 옮기지 못했다.
이는 참으로 일년 반 만의 일로, 이제 선사는 한낱 범승이 아니었다. 선사는 스스로 깨친 바 심경인 오도송悟道頌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타는 불속 거미집엔 고기가 차 달이네
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알랴
흰구름은 서쪽으로
달은 동쪽으로
오도한 뒤에 선사는 대자유인답게 행운유수行雲流水의 발길을 남쪽으로 돌려 설악산 봉정, 오대산의 상원사, 정선의 정암사, 덕승산의 정혜사 같은 이름있는 선도량을 찾으며, 제방의 선지식을 만나 법담을 나누기도 하고 후학들에게는 납자본분衲者本分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면서 예비 선지식의 풍모를 발휘하였다.
1937년, 선사 나이 쉰살이 되던 해에 운수의 발길은 순천 송광사에 이르게 되었다. 조계산 송광사사에서 선사께서 그 뒤로 십년 동안 머물면서 후학을 지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는데, 그곳에서 대종사의 법계를 받았다.
해방이 되자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모든 것이 새로운 질서 속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의 소용돌이는 불교 안팎에서 새로운 질서를 요청하기도 하고 스스로도 새로운 변화를 향하여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1948년에 전국의 의식있는 수좌들이 힘을 모아 해인사에 가야총림을 개설하고 그 초대 방장에 효봉선사를 추대했다.
선사는 여기에서 본격적으로 도제 양성에 힘쓰는 한편 현대의 한국불교를 이끌고 갈 인재 양성과 곧 일어날 정화운동의 바탕을 이루는 계기를 만들어 갔던 것이다. 그때 방함록을 살펴보면 청담, 자운, 구산, 영암, 지월, 지효, 월산, 월하, 도견, 일각, 일타, 보성과 같은 오늘날의 종단 큰스님들이 여기에 동참하고 있었던 것이다.
육이오의 동족 상잔이 터져 총림이 와해되자 스님은 1951년 여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통영 용화사 도솔암에서 안거하였다. 그 뒤에 전쟁이 끝나자 1954년부터 정화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자, 선사는 산을 떠나 서울 안국동 선학원에 머물면서 어지러운 종단을 수습하기 위해 1955년에는 정화 뒤의 초대 종회의장을 역임하였고, 1957년에는 총무원장으로 재직하였는데, 1956년에는 네팔에서 열린 세계불교도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58년에는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되었으며 1962년에는 또 다시 통합 종단의 종정으로 추대되는 등 중망衆望을 한몸에 받았다.
선사께서는 1958년에 팔공산 동화사의 조실로 있으면서 점점 허약해지더니, 규칙적인 대중 생활과 조실 자리마저 버리고 1968년 5월에는 밀양 표충사 서래각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그 해 10월 15일 오전 10시에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입적에 들었다. 그때 선사의 세수는 일흔 아홉, 법랍은 마흔 둘이었으며 선사의 열반송은 다음과 같다.
내가 말한 모든 법은
그저 다 군더더기
오늘 일을 묻는가
달이 일천개 강에 비치니라
효봉선사야말로 현대를 살아가는 수행자의 표상으로서 추앙되어 마땅한 분이며, 영원한 \'절구통수좌\'로서 한국불교 수행자의 참다운 귀감이 되는 분이다. 선사의 행적을 기리는 비가 송광사와 표충사, 미래사에 각각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