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도는 돈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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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불교 - 일지
1992년 04월 122호
냉소주의와 상호불신
오늘날 인간의 다양한 정신활동이 보여주는 특징의 하나는 국지적인 영역이나 분야의 한정을 넘어서, 인류의 미래를 전망하고 개척하려는 노력이 다각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직 우리에게 생소한 감은 있지만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영역은 이미 글로벌 모델링(The Global Modeling)에 입각한 가치와 이념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십일세기가 목전에 다가온 오늘날 고립된 학문이나 종교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불교 또한 이미 동양인들만의 것이 아니라 인류가 공유해야 할 지혜의 자산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급변하는 현대, 날로 다원화되는 사회구조하에서 우리의 한국불교는 오늘 무엇인가? 이 시점에서 현대 한국불교의 현실과 전망을 생각해 본다는 것은 조금도 행복한 일이 아니다. 어떠한 창조적인 가변성도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리는 특이한 정체 구조를 갖고 있는 우리 불교 교단, 냉소주의와 상호 불신의 승가는 선배들이 온전히 보존, 계승하지도 못한 채 발육부진에 걸려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몇 안 되는 종권승려들의 얽히고 설킨 암투로 일그러진 교단의 현실만을 탓하거나 제도의 불합리, 모순만을 탓하고 주저앉아 있어서는 안 된다. 침체와 모순만을 탓하거나 방임하는 그 자신도 모르게 곧 그 침체와 모순의 구조에 압살되어 버리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침체된 불교의 현실과 위상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더 이상 때를 놓치기 전에 우리 불교의 전망과 대안을 진지하게 확인하고, 극복해야 할 시련과 모순을 각 개인의 주체적인 문제로 심화시켜서 풀어가는 불교인의 자세를 거듭 견지하는 것이다.
승가의 기능과 책무
이 글은 현재 우리 교계가 당면하고 있는 교단 정상화의 문제를 논의하지 않는다. 앞으로 누가 종단의 행정 조직을 맡든지 종권의 운영이 승가 본래의 공의共議제도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종권을 둘러싼 몇몇 세력은 승가대중, 전체 불교 모습과 더욱 유리된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기존의 종권세력은 비등하는 승가대중, 불교도들의 양심과 의식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작은 제방은 도도하게 밀려오는 큰 물결을 막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누가 총무원장이나 종회의원이나 주지가 되는지를 따지고 제도 개혁을 논의할 것이 아니라. 현대 산업사회의 불교와 승가는 각 개인이 회복해야 할 고유의 기능과 책무를 먼저 점검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종단 제도의 자의적 운영과 종권을 둘러싼 세력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부분적인 모순과 침체는 승가 대중, 불교도 각자의 건실한 불교 의식의 실현과 한국 사회에서 불교가 점유하는 문화 역량의 활성화에 의해서 돌파될 것이다. 몇 가지 문제를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한다.
지금 우리 사회의 학계, 문화계의 핵심에서 새롭게 나타나고 있는 하나의 흐름이 있다. 그것은 현대 상품주의 문명과 공해, 급증하는 범죄와 빈부격차에서 야기되는 비인간화 현상, 반反생명적인 현상을 근본적으로 반성하고 극복하려는 운동으로서, 매우 불교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운동이다. 이러한 현상이나 운동은 주로 생명의 본질에 대한 이해, 환경보존, 신과학운동, 탈이데올로기 이후의 후기산업사회가 선택해야 할 인간관 탐구 분야에서 진행되고 있으며 수많은 저서와 논문, 문화의 제현상 즉 출판, 영화, 연극, 미술, 음악에 관련된 소그룹들의 진보적인 활동이 그 성과를 반영한다. 아직 생소할 뿐더러 논란의 여지가 많겠지만 우리는 이 조류가 자기 탐구의 행법行法으로서의 불교, 폭력과 억압이 없는 삶을 목표로 선언하고 있는 불교, 보다 심층적인 인간 이해의 체계로서 불교가 갖는 사상적 탄력에 주목하고 있으며 불교적 패러다임을 대량으로 흡수하고 있기 때문에 일단 하나의 유사불교운동類似佛敎運動이라고 파악할 필요가 있다. 기존의 불교 교단, 사상, 수행 체계를 체體의 불교라고 한다면 이 운동은 체의 불교를 좀더 확장하기 위한 용用의 불교인 것이다. 그 무엇이든 새로운 가치 출현의 밑바탕에는 이 체와 용이 서로 운동하면서 발전하는 이법理法이 놓여 있다. 그렇다면 이 유사불교 현상이나 운동과 현대 한국불교간의 문제는 무엇이며 상호 보완하려는 노력은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여기서 먼저 논의해야 할 문제는 아무래도 불교 특유의 사상과 인간 이해 체계를 더욱 주체적으로 조명하는 작업이다. 깨달음의 불교, 카르마의 이법理法에 입각한 윤리적인 불교, 기복 중심의 불교라고 하더라도 불교를 철학적 체계만이 아니고 대중에 복무하는 포용력과 탄력을 갖춘 불교로서 생각해 본다면 아직도 경전에만 갇혀 있는 교리 중심의 불교와는 다른 창조적인 방법론의 탐색이 필요하다. 또 진부한 방법론의 이야기라는 비아냥도 있겠지만 방법은 역시 중요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이긴다는 발상은 허상이다. 중요한 일일수록 수단과 방법의 정확한 모색과 운용이 필요한 것이다. 이 방법론의 모색과 실천은 지금까지 수립된 풍부한 불교 해석의 성과를 체계적으로 통합하고 좀더 다양한 응용과 실천으로 문화적영역을 넓혀가는 작업과정이 필요하다. 곧 앞에서 말한 유사불교운동에 고차적인 다르마dharma를 부여하고 인간회복운동의 의미와 목표를 제시해 줄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현대 한국불교가 이러한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십년, 삼십년이 걸릴 수도 있다. 그러나 늦지는 않았다. 한정된 지명에 세부적으로 언급할 수 없는 우리는 이 독자적인 방법론을 수립하거나 우리 불교를 좀더 건강하게 하기위해서 몇 가지 문제만을 간략하게 점검하기로 한다.
불교 실천의 궁극적 대안을 위해서
첫째로 불교해석이 좀더 평이하면서도 초점이 있어야 한다. 불교해석학은 지금 동서양의 불교학계에서 새롭게 전개되고 있는 분야이기도 하지만 그 본질과 목표는 불교 전문가가 아닌 일반 대중과 인접 분야의 종사자들에게도 효과적으로 파급될 수 있는 불교적 의식意識의 재생산에 있다. 물론 이러한 작업은 단순한 편리함만을 위한 대중화가 아니기 때문에 길고 어려운 작업과정을 거친 뒤에만 가능한 것이다. 현재 우리의 불교 해석은 너무 단면적이고 고답적이다. 따라서 교의적 숙달이 부족한 불교인들은 \'불교는 현실적 당위를 너무 지나치게 내재화시켜 버리는 관념론이 아닌가\'라는 비판 앞에서 당혹해한다. 그리고 지난 팔십년대의 민중불교운동의 이론적 토대 역시 이 관념론적 경향을 극복하기 위해서 역사 유물주의에 따른 불교해석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불교는 인간의 실존적 의지를 철학의 칼로 분류하지 않는다. 역사유물주의야말로 인간을 현실적 자아의 오염에 함몰시켜 버리는 함정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곧 인간의 도식적인 역사의 법칙에 복무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의 독단은 인간다운 삶을 구현하는 인간의 얼굴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 불교는 역사와 제도, 체제에 봉사하기 보다는 인간 이웃들에게 복무해야 한다. 단적인 문제로 불교는 교도소 위문법회에 수천번씩 가는 것보다는 교도소를 더 이상 늘리지 않아도 되는 건강한 사회, 자선사업이 필요없는 사회를 이룩하는데 기여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교도소 위문이나 자선사업은 중요하다. 그러나 반면에 교도소위문과 자선사업만이 불교적 실천의 궁극적인 대안이라고 믿는 불교도는 결국 부패한 사회구조, 상품주의 문명이 끊임없이 쏟아내는 불행한 결과들은 은폐하고 부패구조를 미화시켜 주는 착오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거듭 적거니와 불교는 역사와 제도, 체제에 봉사하기 보다는 인간 이웃들에게 복무함으로써 세상의 소금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불교가 현실적 당위를 지나치게 내재화시켜버리는 관념론이라는 비판을 듣더라도 조금도 당혹해 하거나 관념론적 경향을 탈피하려고 역사유물주의를 끌어들일 필요가 없다. 선불교禪佛敎의 본질에서도 전망되는 바이지만 현실적 자아의 오염을 성찰하고 극복하는 반성적 자아야말로 인간 정신의 창조적인 전망을 획득할 수 있는 강한 정신의 힘을 보여준다. 결국 불교가 관념론이라는 지적은 그만큼 강한 자기 정신의 단련을 요구하기 때문인 것이다. 이미 지나가버린 이야기지만 팔십년대 이후 민중불교 운동 단체들이 노정한 실패 가운데 하나가 사회변혁운동의 부분고리로서만 자신들의 역할을 한정했을 뿐 주체적인 불교적 의식의 생산과 확대를 등한시했다는 점이다. 숱하게 명멸해간 단체들 대부분이 팜플렛 위주의 목소리만 컸을 뿐 깊이있고 긴 호흡을 가진 이념과, 조직을 창출해 내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 우리의 불교해석은 구체제교학舊體制敎學에 대한 철저한 자기점검, 봉건적 사회체제하에 이루어진 교의 해석의 옷을 벗어버려야 한다. 불교학계의 부단한 자기 점검이 없는 한 불교신앙, 사상의 자기 발견은 어렵기만 하다. 앞으로 우리 한국불교는 불교의 종교적 가치 체계를 더욱 깊이 숙달하고 그 성과를 평이한 일상 언어와 의식으로 표백表白하는 일에 전념해야만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돈황은 어디에 있는가
둘째로 포교의 내용과 목표가 선명해야 한다. 요즘 일요일마다 옆에서 지켜보는 어린이 법회에서도 느끼지만 어린이들이 사용하는 교재의 내용이 너무 어렵고 무미건조하다. 마치 불교학개론의 축소판 같아 아연실색할 지경이다. 어린이들은 성인의 축소판이 아니다. 사성제四聖蹄, 연기緣起, 삼법인三法印 등은 불교의 기초교리이긴 하지만 역설적으로 기초교리인 만큼 숙달하기 어렵다. 누구나 이야기하지만 불교사상의 숙달이란 뜨거운 머리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불교적 체험이란 번뇌와 해탈, 삶과 죽음, 성聖과 속俗이라는 불교적 시련을 충분히 거친 체험이 아니면 언제나 겉도는 것이 아니던가? 과연 어린이들이 성과 속, 번뇌와 해탈이라는 불교적 시련을 실존적인 문제로 응시하고 있을까? 어린이들에게 불교란 아름답고 우아한 종교이며 절은 배움의 장소라는 인상을 심어 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제 어른들의 경우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구십년대 들어 출판 물량의 확대와 불교방송과 같은 메시지 전달체계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말미암아 신자들의 불교 이의의 폭은 나날이 넓어지고 있다. 문제는 신자들의 불교 이해 수준에도 못 미치는 용어나 개념을 막연하게 나열하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오늘의 우리 포교의 현실이다. 포교에 나선 스님들과 포교사들은 포교를 위한 내실있는 연구와 경륜을 축적함으로써 대중의 불교 이해에 더욱 높은 지평의 다르마를 부여할 수 있다. 우리는 법회가 끝난 뒤에 봉투를 받아 사라지는 봉투법사 노릇에 만족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진정 불교를 사랑하고 염려하고 있다면 순수를 가장하고 위선과 자만의 가면 뒤에 숨지 말자. 모든 이기적이며 열등한 감정들은 언제나 순수의 탈을 쓰고 아무런 봉사나 기여없이 사회를 이용해 왔다는 것을 우리 모두 기억해 두어야만 한다.
지금 우리의 돈황敦煌, 우리의 불교는 어디 있는가? 많은 선지식들이 전법傳法을 위해 도착하고 다시 떠나던 돈황. \'형상만의 붓다를 숭배하기 위함이 아니라 사람을 숭배하기 위해서 불상을 그리고 조상한다不是崇拜佛而是崇拜人的創造\' 라는 문구를 벽에 쓰면서 그 찬란한 불교예술을 일구어낸 돈황.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밀봉되어 있던 돈황. 이제 우리가 찾아가야 할 돈황은 저 감숙성의 돈황이 아니라 이 척박하고 과열된 현대 사막사회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을 미지의 돈황이다. 우리의 돈황, 우리의 불교는 어디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