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 문화 현상과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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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상화
1992년 04월 1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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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부터 우리는 탈현대화 또는 후기산업사회 현상이라고 일컬어지는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논의가 심심치 않게 진행되는 것을 보아 왔다. 최근에 상영된 영화 \'경마장 가는 길\'도 이 포스트모더니즘과 연관하여 많은 관심과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이 영화는 종래의 작품들처럼 사건을 중심으로 극을 전개하는 선적인 구성을 따르지 않고, 끊임없이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순환시키면서 조금씩 이야기를 확장시키는 구성을 보이고 있다.
프랑스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주인공 R이 유학기간에 동거하던 J라는 여자와 대구에 살고 있는 가난한 자신의 아내 사이에서, 선택할 수 없는 이상에의 욕구와 현실의 사이를 방황하다 마침내 절망의 깊은 수렁에서 허덕이게 된다는, 아주 짤막한 스토리를 비슷한 사건과 대사를 끊임없이 되풀이시키고 순환시킴으로써 길게 늘어놓고 있다. 예술의 행위를 통해 표현되는 작품은 어떤 경우에든 인간에게 교훈과 계몽성을 가지고 접근한다는 통념적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극의 구성이 관객을 의아하게 만들기도 한다. 여기에서 이 작품을 감독한 장선우씨는 \"반복하면서 반복에 머무르지 않고, 일상을 통해 비일상을 포착하고, 허상을 통해 본질에 접근하며, 개체를 섭렵하여 총체적인 것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우리는 또 몇 년 전에 미국의 전위음악가 존 케이지의 음악회와 백남준의 비디오아트공연을 보면서 포스트모더니즘 예술행위의 일단을 접할 수 있었다. 존 케이지의 공연작품 가운데 「4′33″」라는 테마가 있었다. 이 작품에서는 피아니스트가 피아노의 건반을 열지도 않고 정확히 4분 33초 동안 피아노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피아노 소리 대신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어쩌다 건물 밖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음과 연주장안에서 청중들이 내는 기침소리, 그리고 옷을 스치는 소리가 고작이다. 케이지의 관점에서 보면, 이렇게 음악회라는 상황이 엄연히 존재하는 한 그것은 어디까지나 음악회이며, 따라서 음악을 연주하는 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의 주장처럼 모든 것은 다 음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관객에게 음악을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상상을 자극하기 위해 창조되는 개념음악인 것이다.
미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지금까지처럼 화가가 자신의 생각이나 객관적인 사실을 캔버스에 그려내는 행위에 의해 이루어지는 미술 작품에 반하여, 포스트모더니즘의 예술행위는 이러한 전통적 사고와는 사뭇 다른 면을 보여준다. 그림을 그리는 캔버스를 이제 더 이상 삶을 재현시키는 일차원적인 표면으로 보지 않고, 화가가 행동하는 투기장으로 파악한다. 지금까지의 미술행위가 인간의 눈을 중시했다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오히려 손을 중시한다. \'액션 페인팅\'과 같이 땅바닥에 긴 천을 깔고 빙글빙글 굴러 가면서 화면을 장식하는 것이라든지, 행위예술에 참여한 관객에게 신발에 페인트를 묻히게 해서 그 천위를 걸어가게 한다든지 하는 따위의 예술행위가 그것이다. 이 경우에 화가는 그리는 대상보다는 오히려 그림을 그리는 바로 그 순간에 존재하는 자신의 실재를 더욱 중요하게 상정하니, 이 실재야말로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실재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실재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언어로 말하는 것은 곧 거짓말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믿는 소설가는그 허위성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새로운 형식의 소설 창작기법을 동원하기도 한다. 재단사들이 옷을 재단하듯이 가위나 칼을 사용하여 여러 작품에서 임의적으로 인용문을 따와서, 아무런 통일성이 없어 보이는 내용을 서로 병치시키고 있다. 이와같이 형식이나 기교를 배제시킨 채로 다양한 개체를 조합하는 소설 창작은 이성이나 논리성을 배격하고 좀더 자발적이고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을 추구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우연과 임의성을 중시하는 선禪 불교를 비롯한 동양사상에서 그 원리를 차용한 듯이 보인다.
20세기를 마감하고 21세기를 준비하는 세기말의 상황에 놓여 있는 우리는, 이처럼, 지금까지 개념화했던 모든 현상을 뒤집고 부정함으로써 새로운 형식을 추구하는 포스트모더니즘 현상을 곳곳에서 목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문화 현상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철학, 사상, 정치, 경제, 과학 같은 모든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진행되는 새로운 사조라는 데에 깊이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81년 10월에 프랑스의 저명한 일간신문인 르몽드 지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문을 시작한 첫 구절과 똑같은 의미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유령이 지금 유럽에 출몰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듯이, 지금 세계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열병을 앓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얼마전에는 서울 한복판 동숭동 거리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축제 행사까지 벌어졌다고 하니, 우리나라도 이제 바야흐로 이 현상의 물결에 진입했다고 하겠다. 이 글은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 현상이 유래하게 된 동기와 개념을 추적해 보고, 다시 불교적 가치관에 대비하여 그것이 갖는 의미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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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 사조가 등장하게 된, 가장 보편적이며 핵심적인 이유는 이금까지의 관습적인 문화 양식으로는 20세기 후반의 이 계시록적인 시대의리얼리티를 도저히 묘사할 수 없다는 \'고갈의식\'에 있다. 코페르니쿠스적인 대사건들의 연속과 대중적 전자 매체의 확산, 믿을 수 없는 정치 및 사회의 현실 상황들은 예술가들로 하여금 작품 활동에 대한 반성, 언어의 재현 능력에 대한 회의, 그리고 더 나아가 새로운 창작 렌즈에 대한 탐색의 눈을 뜨게 해 주었다. 그리하여 고답적이고 귀족적인 모더니즘과 문화의 현실 반영 능력에 대해 낙관적인 리얼리즘 그 모두에 대하여 포스트모더니즘은 반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하나의 현상은 그것을 제공하는 토대에 대해 동전의 앞과 뒤의 모습을 갖는 것처럼, 포스트모더니즘 또한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그것들의 한계를 극복하겠다는 태도를 가지고 시작한 것이다.
곧,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은 서로의 반목과 대립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무질서와 파편화를 극복하고 질서와 총체성의 회복에 다같이 의미를 두고 있다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질서와 총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 척하는 것은 분명 허위이고 기만이며 자칫 어떤 획일적이거나 전체주의적인 지배 체제를 감추는 미명일 수도 있다고 경계한다. 그들은 다만 파편화된 현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제시하며 포용할 뿐이다.
그리고, 모더니스트들은 예술가란 사회로부터 스스로 분리시킨 특별한 존재이며 그렇기 때문에 예술과 예술가는 전지전능한 존재라는 낭만주의적 신념을 특권의식과 권위의식으로 치장하는 데 반하여,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예술가가 독자에게 제시해 줄 수 있는 보편적인 진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작가 또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우월한 위치에 있지도 않으니 예술가는 이제 성단에서 내려와 청중석에서 독자와 더불어 공동 창작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또한 모더니즘이 제시하는, 고양되고 심오한 때로는 고립된 어떤 의식의 순간에 나타나는 깨우침을 인정하지 않으며, 진리의 현현을 유보하는 불확실성을 선호한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은 구심점도 없고 축도 없으며 절대적인 확실성도 없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의 \'없음\'을 오히려 찬양하고, 궤도 안에서 궤도를 해체하고 초월하며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수많은 해석의 가능성을 예시하는 \'열린 시대, 열린 사조\'를 의미한다.
한마디로 포스트모더니즘은 탈정전화脫正典化 또는 탈중심화脫中心化로 그 특징을 요약할 수 있다. 그들은, 또 한편으로는, 개인주의를 중요시하는 자아와 주관성을 부정하고 자아의 해체와 주관의 소멸을 주장하거나 고립과 무관심과 형식 따위에 초점을 두는 예술행위보다는, 참여와 관심 그리고 실천적 행동을 더 중요시한다. 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일반성이나 보편성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우연성, 임의성, 유희성에 그 중요한 특징을 갖다놓는다. 일원론 사고와 절대적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고, 불확정성에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다원적이고 상대적인 관점에서 모든 현상을 파악하려고한다. 곧, 결합조다 단절을, 질서보다 혼돈을, 총체성이나 종합보다 해체나 분해를 더 중요시한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처럼 새로운 형태의 전지구적 이상 모델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대중의 각성을 통해, 문화의 측면만이 아니고 각양각색의 위치에서 광범위하게 앞으로의 세계를 이끌어가는 사조가 될 것이다. 국제 정치에서 제3세계의 대두와 같은 다국화 현상, 탈경제로 불리는 새로운 형태의 경제 질서, 민족과 국가의 경계를 뛰어넘는 보편화된 문화 현상 등 앞으로의 세계는 전지구적 사고와 행동으로 특징지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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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일반적인 검토를 해보았다. 이것은 어쩌면 불교 우화의 한토막처럼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과 같은 우매함을 범하는 일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에서 특징적으로 제기되는 몇 가지 개념은 불교의 가치관과 견주어볼 수 있는 점이 있어 흥미롭다. 자아의 부정과 주체의 해체, 일원론적이고 절대적인 원리의 부정, 그리고 우연성과 임의성을 중시하는 태도는 불교가 진리를 파악하는 관점과 유사한 점이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붓다의 경전은 기성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인 신학적 세계관을 반대하여 인간의 자주성과 연기론이라는 역동적인 세계관을 제시한다. 여기에서 연기론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매개해서 자기 동일성을 구성한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그래서 자아의 부정으로서의 무아설은 있는 존재를 부정하는 길만이 아니라, 아트만(존재)에게 아트만이라고 할 것이 없음을 밝힘으로써 모든 그것을 그것 아닌 그것으로 살려낸다. 그러므로 무아설은 아我와 무아無我의 치우침을 동시에 지양하는 중도 실상을 열어 주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제기하는 자아의 부정은 기존의 서구 철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합리성과 자아의 확실성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불교의 무아설과 같은 인식론적 태도를 가진다고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자아의 부정은, 자아와 세계를 해체시켜 어떤 곳으로 나아가는 무의미성을 내포한다고 볼 때, 자아의 공성을 주장하되 그 실상을 그대로 살려내는 불교의 무아설과는 상당한 뜻의 차이가 있다.
또 하나, 일원론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를 부정하며 다원적이고 상대적인 관점을 받아들이는 태도 또한 불교의 연기론이 제시하는 진리관과 유사하다. 붓다의 깨달은 실상으로서의 연기설은 신적인 일자에서 만유의 운동을 이끌려는 전변설傳變說과 만유의 닫혀진 요소들의 모임으로 설명하려는 적취석積聚說을 동시에 넘어서서 만유를 상호 의존의 활동상으로 설명한다. 그래서 일원론적인 사고 및 절대론을 부정하는 점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태도가 불교의 연기론과 유사하기는 하지만, 부정만이 있고 동시에 살려내는 역동성이 결여된 측면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밖에도 포스트모더니즘이 지향하는 세계와 불교의 가치관이 많은 부분에서 매우 유사한 인식 태도를 가지고 있음을 본다. 이와같이 한계를 보이고 있는 서구 가치관의 밑바닥을 뚫고서 솟아난 새로운 사고 경향인 포스트모더니즘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진리관에 가까이 접근해 있다고 보이며, 그런 점에서 앞으로 불교는 이런 새로운 사조에 많은 사상적, 방법론적 가치를 제공하게 되리라고 본다.
아무튼 지금 우리는 엄청난 변화와 통제할 수 없는 다양성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 다양한 형태의 가치관들이 인류의 행복과 안녕에 이바지 할는지, 아니면 인류의 멸망으로 이끌는지는 아무도 예단할 수 없다. 다만 불교에서 제시하는 무아, 무소유, 욕망의 창조적 긍정과 같은 대승적 지혜는 지금 인류가 처한 상황에 매우 소중한 지침이 되리라는 것은 버릴 수 없는 확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