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게 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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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해설 - 무관
1992년 04월 122호
시고행자 환본제 是故行者 還本際
파식망상 필부득 息妄想 必不得
무연선교 착여의 無緣善巧 捉如意
귀가수분 득자량 歸家隨分 得資糧
그러므로 행한 이는 본제에 돌아가서
망상을 쉬지 않곤 얻을 바 없네
인연 없는 방편 지어 마음대로 잡아 쓰니
본집에 돌아가서 분수 따라 양식 얻네
깨달음을 얻는 것이 불교인의 최상의 목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행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문제입니다. 옛 사람들은 이 부분을 수행하는 방편을 나타내 보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수행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요새말로 하자면 성별과 직업에 따라서 자신의 능력에 맞는 수행 방법이 개발되어야 합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내놓은 길을 따라가거나 잘 닦여 있는 아스팔트 길을 따라서 가는 방법이 쉬울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길을 일반적으로 크게 염불, 참선, 주력, 기도 등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참선만해도 여러가지가 있으니, 조사선을 닦는 간화선看話禪 또는 묵조선默照禪, 부처님이 말씀하신 사선四禪들이며, 간화선만 해도 공안이 천칠백 개나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수행 방법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이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을 넌지시 시사합니다.
덕숭산에 계신 만공스님은 견성암에서 공양 청정을 받았습니다. 그 날은 눈이 많이 내려서 큰스님을 위해 길을 말끔히 쓸어 놓고 시자가 큰절 조실스님인 만공스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스님, 눈이 많이 내려 길이 미끄러울 것 같아서 길을 모두 쓸어 놓았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만공스님은 시자의말을 듣고 한참 동안 시자를 바라보았습니다. 대중의 뜻을 전달하는 것으로 시자의 임무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큰스님을 모시고 가는 것까지가 임무이므로 시자는 조마조마했지요. 큰스님께서는 아무 말 없이 한참 있더니 \"너희들이 쓸어 놓은 길로는 안 갈란다\" 하여 시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옛 사람들은 이렇듯이 남들이 가는 길을 걷지 않는 것을 선종의 가풍으로 삼아 왔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에서도 반드시 옛 조사스님이나 큰스님들이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다만 이와 같이 자신의 길을 가는 데에서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았다는 것에 뜻이 있습니다.
오늘날 절집안에서는 이십일세기를 눈앞에 두고 과학만능을 부르짖는 시류에 편승하면서 이해타산에는 밝지만 실천하는 수행방법에는 소홀한 것을 봅니다.
\"이러므로 수행을 하는 이는 본제에 돌아가서\" 라고 했는데 \'본제\'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수행자 자신에 대한, 곧 인간에 대한 해석 문제입니다. 인간의 실상은 무엇인가? 인간 존재는 독립적이고 독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지만 이러한 생각은 무척이나 위험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자아 중심적인 주장은 자기 편익을 우선하려는 생각을 갖게 하고, 이러한 관념은 인간을 이기적인 존재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고집은 인간 개체의 독존성을 과신하는 경향으로서, 현대인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물론 불교의 인본주의에서도 인간 존중, 인간 이지人間理知의 사상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의 실제는 사유하고 행위하면서 행복을 추구하는 삶인데, 이 방법이 인간은 유한성을 본질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곧 지은 대로의 업(業,Karma)에 대한 과보로서의 존재임을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에 바탕한 관념은 자칫 인간 이성의 능력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인간의 실상을 바로 통찰해서 유한 속에 존재의 변천이 있고 이 변천이 괴로움(苦)으로 받아들여짐을 인정함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괴로움을 벗어나 즐거움의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 희망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제란 이런 의미에서 인간 이성의 책임이며 이 이성이 자신을 신뢰하고 일체의 문제는 자신에 의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에서 출발하게 합니다.
이러한 이성주의적 태도에서 말씀한 간결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자기를 등불로 하고 자기를 의지처로 하지 말라. 법을 등불로 하고 법을 의지처로 할 것이며 다른 것을 의지처로 하지 말라(自燈明 法燈明)\"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본제를 실천하고 이러한 본제에서 살고자 하는 사람은 \"망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망상이란 이기적이고 고착적인 집념 곧 고집입니다. 자기 자신을 바르고 행복한 길로 인도할 수 있는 유일한 등불은 자기 자신과 스스로의 이성에 의하여 파악된 법法 이외의 그 무엇도 될 수없다는 것을 간명하게 말했지만 수시로 변하는 자신을 보면서 아무도 자신을 그렇게 확고한 신념으로 대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을 일으켜세워서 부지런히 노력하게 하는 것은 자신뿐입니다. 옆에서 누가 무어라고 부추키더라도 자기 마음에 선택하여 결정하지 않으면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이러한 이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깨달음을 얻은 부처나 인간이 모두 평등함을 알 수 있습니다. 깨달음의 길이 아무리 어렵고 먼 길이라 하더라도 이성을 가진 인간이기에 누구나 성취의 가능성이 보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에서는 부처와 중생의 마음 사이에는 조금의 차별도 없으며 또한 건널 수 없는 깊은 강은 인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이란 절대자도 아니며 또한 절대타자도 아닙니다. 누구든지 자기 마음을 어둡게 가리고 있는 무명망상을 걷어버리고 맑고 깨끗한 마음을 되찾으면, 부처님의 지혜라도 그에게는 더 이상 불가사의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한편 인간의 무력함은 오랜 세월동안 깊고 두껍게 쌓은 습관들에 의해 모든 업이 자각의 바탕을 가리웠으므로 생겨난 것이기에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에 이 무력함을 없애는 방법은 타인의 힘을 잠시 조금 빌리자는 것입니다. 인간은 남의 잘못을 발견하기는 쉽지만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기 어렵고, 또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고치는 데에 힘쓰지 않으므로 무력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만에서 오는 경우가 많아서 다른 이의 구원을 거절하려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절대 절명의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는 그 때 자기 앞에 나타난 자비의 손을 잡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를 타력의 길이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어리석은 탓으로 무거운 돌을 짊어진 것과 같은 무명 번뇌를 가지고 바다를 건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은 그대로 가라앉을 수밖에 없겠지요. 그 때에 자비의 배가 있어 그 배를 탄다면 가라앉지 않고 무사히 바다를 건널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타력 신앙의 문입니다. 참회나 염불,주 력은 이러한 이중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절대 절명의 순간에 선택의 여지가 없는 신앙의 길입니다. 이때에 자비의 손길은 구원의 실상을 보여주는 성현의 가피인 것입니다. 이것은 어른이 위험에 놓인 어린이를 보고서 구해 주려고 하는 것과 같은 연민심이며, 이를 성현의원력에 의한 가피라고 합니다.
어렵게 공부하고 살아온 사람들이 힘들게 번 돈을 사회 사업이나 소년 선도 사업, 교육 사업 등에 아낌없이 희사하는 것을 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어렵게 수행한 성인들도 중생들의 고난을 보고 대비의 원력을 베푸는 것이지요.
\"인연 없는 방편 지어 마음대로 잡아쓰니 본집에 돌아가서 분수 따라 양식 얻네\" 라는 것은 이와 같이 자력과 타력을 다 함께 쓰는 것입니다.
본제에 돌아간다 함은, 곧 깨달음의 행복이라는 목적을 성취하고 나서 자신만이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뭇 삶을 영위하는 모든 것들에게 희망을 주고 즐거움을 주는 목적도 아울러 가질 수밖에 없는 이중구조를 가진 실존임을 말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