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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인간불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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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김경진 1992년 04월 122호
이 글은 중국 북경의 중앙민족학원-이 대학은 중국의 민족정책을 위해 설립된 학교의 하나인데, 이 곳에는 소수민족으로서 조선족 학자들과 학생들이 많이 참여하여 활발한 역할을 하고 있다-의 간부 훈련부 철학교연실에 소속한 중견 학자인 김경진 선생께서 월간 해인의 독자들을 위해 직접 한글로 집필하여 우송해 온 글이다. 잘 알다시피, 중국의 불교는 사회주의 혁명 과정에서 큰 상처를 입었으며 오늘날에도 학술 방면의 부분적인 연구활동을 빼고는 신행 활동은 미미한 실정이다. 김선생의 글은 그런 과정에서 형성된 \'오늘날 중국인들의 불교에 대한 선입견\' 과 \'현실의 중국불교의 모습\'을 그 옛날 삼무일종의 법난을 설명하는 가운데 비교적 소상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전에도 전문적인 연구자들을 통하여 중국 학자들의 불교를 보는 시각들이 소개되기는 하였지만, 죽의 장막 건너편 사회주의 \'중공\'이라는 편견으로 말미암아 관념적인 이해를 넘어설 수 없었다. 이제 점차로 중국과의 교류도 활발해져 가고, 중국을 여행하는 불자들의 발길도 늘어가는 형편에서 중국에 살고 있는 동포 학자의 육필로 소개하는 중국불교의 모습을 통해 중국이라는 환상의 나라에 대한 이해를 키우는 데에 작으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불교가 사회의 여러계층과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의 옹호와 지지를 받으며 많은 신도들을 가지고 있는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그 원인의 하나는, 불교가 특이한 도덕률로 신도들을 규범시켰을 뿐만 아니라 신도들의 일상 생활과 이상을 담은 교리를 실천으로써 변화시키고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불교는 그 자체가 국가나 가족의 정치와 경제 사무에 휩쓸려들어가기를 바라지 않는다. 어떤 나라에서는 천주교나 이슬람교가 직접 국가 정권을 장악하기도 하지만, 불교의 태도는 이런 종교와는 완전히 다르다. 불교의 태도는 오히려 인도 고대 바라문교의 \'정교분리\'와 일맥 상통한 점이 있다. 다른 원인 하나는, 불교는 바라문교보다 계급 관념이 희박하다. 그래서 불교는 교육을 받는 사람에 대해서는 계급과 빈부를 가리지 않으며, 여자를 그리 경시하지도 않는다. 그와 함께 불교는 \"고해苦海는 끝이 없고, 뉘우치기만 하면 살 길이 있다,\" \"백정의 칼을 놓으면 곧바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가르침으로 사회에서 여러 계층과 부류의 신도를 갖게 되었다.
앞에서 설명한 것은 불교 전교 방식의 전체적인 고찰이지만, 각 시대와 각 지역의 정황은 서로 많은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보기를 들면, \'본교本敎\'와 결합한 장전불교藏傳佛敎는 정교합일의 전통이라는 아주 큰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 남전불교南傳佛敎도 비교적 국가 정치에 대해 영향력이 크다. 남전불교나 장전불교의 이러한 현상은 세상 사람들의 신봉과 큰 관련을 갖고 있다.
한화불교漢化佛敎는 한족 지구에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계속해서 신봉받지 못하였다. 조선으로 전입된 불교가 한때는 국교로 된 것에 견주어 보면 그 영향력이 너무도 작았다고 볼 수 있다. 이천년을 흘러오면서 중국 한화불교는 한동안 일부 승려들이 중앙 정권과 밀접한 연계를 갖고서 여러가지 방식으로 정치에 간섭한 적이 있기는 했지만 끝까지 전체 불교를 대표하지는 못했으며, 다만 일부 승려들이 불순한 황제에 대하여 때때로 멸시하는 태도를 취하였을 뿐이다. 측천무후則天武后에 대한 많은 승려들의 태도가 바로 그러하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한화불교는 승려가 출가한 뒤 속세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수나라와 당나라 이래로 중앙집권정부는 승려책임자제도를 실시하여 그들이 불교계의 각종 사무를 관리하게 하였다. 이와같이 국가는 사찰을 관리하였지만, 사찰은 국가 사무에 간섭할 수 없었으며 오히려 국가 정권에 의지하여 발전해 나가야 했다. \"국주國主에 의뢰하지 않으면 법사法事가 불립不立한다\"는 중국 동진東晋의 고승 석도안釋道安의 명언은 이런 정황을 반영한 것이다.
그래서 중국의 봉건시대를 이어온 각왕조의 상층 계급은 불교에 대해 호감을 표시하였다. 그들은 불교가 나라의 통치를 공고히 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확인하였으며, 정권이 하지 못하는 역할을 불교가 능히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불교를 부축하려면 반드시 얼마쯤 특권을 주어야 함은 인정하였다. 통치 집단이 불교에 대해 세금면제와 같은 특권 조치를 취함으로써 사원 경제는 그 규모와 세력이 날마다 커 갔으며, 나아가서는 국가 부역제도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 결과 점점 국가와 사원 사이에 모순이 드러났다. 불법이 널리 퍼지고 교파가 많이 형성됨에 따라 서로 내용이 다른 경전도 많이 출판되었다. 게다가 일부 하층 군중 단체는 불교의 너울을 쓰고 통치 집단의 뜻과 맞지 않는 일들을 할 뿐만 아니라 가끔 반란까지 일으켜 통치 집단을 무척 골치아프게 하였다.
한화불교는 중국땅에서 발전하는 과정에서 몇 차례 큰 타격을 받은 적이 있다. 중국불교사에서는 이 사건을 두고 불법을 괴멸시킨 사건이라 하며, 불교도들은 흔히 \'법난法難\'이라 하고 불교도가 아닌 사람들은 \'멸불滅佛 사건\'이라고 한다. 역사를 더듬어 보면, 중국 봉건사회에 비교적 큰 멸불 사건이 네 차례나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곧 북위北魏 태무제太武帝의 멸불, 붑주北周무제武帝의 멸불, 당唐무종武宗의 멸불, 후주後周세종世宗의 멸불 사건들이 바로 그것들인데, 이 것을 중국 역사에서는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멸불 사건이라고 한다.
북위의 태무제(423∼452년 재위)는 가장 먼저 멸불 사건을 일으킨 황제이다. 그는 태연太延 사년(서기 438년) 삼월에 영을 내려 쉰살 이하의 모든 중들을 군인으로 환속시켰다. 이것은 그 무렵에 승려라는 허울을 쓰고 병역을 회피하는 사람이 무척 많았으며, 또 태무제 자신이 도교를 꽤 신봉하여 도사의 권언을 많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또 태평진군太平眞君 오년(서기 444년) 정월에는 관리와 일반 백성들이 개인의 일로 중을 공양하는 것을 금지하는 영을 내렸다. 이 조치는 절 밖에서 거주하는 중들이 살아 나갈 길마저 막아 놓은 셈이었다. 서기 446년 이월에 북위에 내란이 일어났는데, 얼마쯤 농민 봉기의 성격을 띤 내란이었다. 태무제는 이 내란을 진압하는 동안에, 장안長安의 사원 안에서 우연히 병기와 술빚는 기구 및 일부 관리와 부유층이 도피시킨 재물을 발견하자, 그 내란이 중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의심하였다. 그래서 그는 영을 내려 장안과 지방의 중들을 모두 살해하고 불경과 불상을 불살라 버리라고 하였다. 그때 태자 탁발황拓跋晃이 일부러 태무제의 영을 늦게 선포한 덕분에 원근에 있던 승려들은 소문을 듣고 서둘러 불살과 경전을 밀장하고 도망할 수 있었지만, 나라 안의 많은 사탑이 회멸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중국불교사에서 \'삼무일종三武一宗\'이라고 일컬은 멸법의 시작이었다. 그뒤에 왕위를 이어받은 문 성제文成帝(452∼465년 재위)는 곧바로 불교를 부흥시킬 것을 명하였다. 문 성제는 각지에 사원을 짓고, 평민이 출가하는 것을 허락하였으며, 탑을 세우고 불상을 모시는 일도 다시 시작하였다. 태무제 재위중에 있었던 이 제 일차 멸불사건은 그 기간이 비교적 길어서 열네다섯 해나 계속되었다. 그러나 태자의 개입으로 불교는 그다지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제 이차 법난은 북주 무제(560∼578년 재위) 때였다. 무제 자신은 도교와 불교에 대하여 큰 의심을 품고 있었으나 유술儒術 곧 유교의 가르침만은 비교적 존중하고 신봉하였다. 무제는 자신이 통치하는 동안 유불선 삼교도들을 조직하여 놓고 서로 우월성과 열등성에 대해 논쟁하게 하였다. 또 무제는 영을 내려 군신에게 불교와 도교의 앞과 뒤, 깊고 얕음, 같고 다름을 상세히 토론하게 하였다. 건덕建德 삼년(서기 574년) 오월에, 무제는 또 군신들을 모집하여 놓고 영을 내려 장빈도사가 직접 승려와 토론하게 하였다. 그 결과 지현智炫스님이 장빈도사를 반박하고 질책하여 마침내 승리하였는데, 장빈도사가 쟁론에서 실패하자 무제는 크게 노하여 곧바로 불교와 도교를 함께 폐할 것을 선포하였으며, 사문沙門과 도사들을 환속시키고 나서 사원과 사원의 재물을 군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료에 따르면 그때 환속한 승려와 도사가 이백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또 무제는 통도관通道觀이라는 직무를 설치하고 불교, 도교에서 이름난 승려와 도사를 일백이십 명이나 선발하여, 그들에게 유교 신봉자의 옷차림을 하게 하고 삼교의 경의經義를 저술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북주 국경 안의 불교와 도교는 대부분 소멸되었다. 무제는 또 건덕 6년(서기 577년)에 북제北齊를 멸망시킨 뒤에, 오백여 명 되는 북제의 승려들을 모아 놓고 불교를 폐지한다는 것을 선포하였다. 그때에 정영사淨影寺의 혜원慧遠이 무제와 여러번 대담하게 토론하였는데, 마침내 사리에 눌려서 더 할 말이 없게 된 무제는 크게 노하여, 북제의 국경 안에서 모든 불교를 소멸하라고 선포하였다. 사료에 따르면, 무제는 그때 북제의 팔주에 있던 사만여 개에 이르는 사원을 모두 관료들의 주택으로 만들었으며, 수많은 경전과 불상을 불살라 버리고 사원의 재물을 몰수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 중국 북방의 불교는 거의 소멸될 지경에 이르렀다.
무제의 멸불 사건은 꽤 철저하였지만 계속 진행된 기간는 오륙 년밖에 안 된다. 그뒤 불교는 선제宣帝(578∼579년 재위)때부터 시작하여, 정제靜帝(579∼581년 재위) 때에 와서는 경건한 불교 신도인 승상 양견楊堅이 보정補政한 덕에 도교와 더불어 전국 각지에서 전면적으로 회복되어서, 양견이 수 왕조를 세울 무렵에는 완전히 회복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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